“정말 혼자 계셔도 괜찮으세요?”
“괜찮아. 오히려 그게 편한걸.”
“무리하게 책을 꺼내시려다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어린애도 아니고. 내 키가 훨씬 큰데 그럼 너희보고 꺼내 달라고 하겠니? 사서는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잖아.”
“꼭 사서를 부르셔야 해요.”
“참,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언행에 각별히 조심하시구요. 사서들과도 필요 이상의 접촉은 삼가시는 게 좋습니다.”
누가 오해를 한다고. 수행 시녀들의 쓸데없는 걱정에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장서관 앞이었다.
후궁전에 남은 올가를 제외하고 프리아를 따라온 세 소녀, 유디스, 이사벨, 리브론이 정숙을 지켜야 할 장서관 문 앞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제각기 챙겨 온 베일과 천을 흔들어 대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겹꽃 무늬 레이스가 가장자리를 따라 촘촘히 흘러내리는 미색 베일. 눈이 부시도록 하얀 실크 베일. 얼굴을 거의 뒤덮는 망사로 된 검은 베일 중 무엇을 프리아 님께 씌워 드려야 하는가.
“뭐니 뭐니 해도 흰색이지요. 순수를 강조하는 그런 느낌?”
자신이 가져온 실크 베일을 높이 펼쳐 들며 유디스가 먼저 치고 나왔다.
프리아 님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듯하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난도가 높은 토론이었다. 프리아 님께 가장 어울리는 베일을 골라내는 센스와 미적 감각, 그리고 프리아 님의 눈부신 미모를 적절하게 감추어 뭇 사내들로부터 보호해 드려야 하는 보호막의 기능까지. 이것은 단순한 베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목과 안위를 건 승부에 다름없었다.
“순수를 강조해서 어쩌려고 그래요.”
유디스의 말에 이사벨이 야멸치게 치고 나왔다.
“너희들 따위는 넘볼 수 없는 절벽 위의 꽃임을 강조해야 하지 않겠어요? 검은색 두꺼운 베일을 씌워 얼굴을 완전히 가려 버려요.”
보고 있던 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죄수냐.
“내가 아무리 후궁이라지만 엄연한 사내인데 궁정인들 모두가 남색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으면 어떡해요?”
리브론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있어도 각자 취향이 있겠지.”
“취향에 맞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프리아 님의 미모는 곧 나의 자부심. 유디스가 눈동자를 빛내며 소리쳤다.
“유부남에 할아버지에 순 샌님들뿐인데.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워?”
사람도 얼마 없는 장서관의, 그나마 인구 밀도를 높여 주는 학자들과 사서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포크 쥘 힘만 있어도 응큼한 생각을 하는 게 사내들이라고 저희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셨어요.”
우아한 모친의 얼굴에 먹칠을 하며 이사벨이 반박했다. 백작 부인……. 따님이 이러고 다니는 건 아세요?
“평범하게 하고 다니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그 사내 후궁이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채지 못할걸?”
“모를 리가 없죠. 금발 미인이 이 궁중에 여러 명 있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다가도 베일로 둘둘 말고 들어가면 없던 관심도 생기지 않을까?”
“그, 그런!”
프리아의 말에 세 소녀가 서로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려도, 드러내도 위험한 이 치명적인 상전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직 상처가 남아 있으니 꼭 가리고 계시구요. 사서들과 가능한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3초 이하!”
유디스가 프리아의 목에 실크 천을 걸어 주며 말했다.
무슨 전설 속의 메두사도 아니고.
“그럴게. 슬슬 가 봐야 되지 않겠어? 늦지 말아야지.”
프리아가 소녀들에게 오늘 외출의 목적을 상기시키며 등을 떠밀었다.
“어머! 시간 좀 봐요!”
그럼, 프리아 님, 다녀올게요. 시계탑을 올려다본 유디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녀들을 재촉했다.
중앙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들떠 있다. 소녀들의 입에서 다시금 발랄한 수다가 터져 나왔다.
“오늘 세 부인이 모두 오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일정을 맞추느라 고생하셨다고 해요.”
멀어지는 소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디스와 단둘이 지냈던 시절과 비교하면 조금 소외된 감도 있지만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종일 프리아와 황제의 관계 진전에 대해서 골몰하고 있는 것보다는 저렇게 또래들과 즐겁게 수다를 떠는 편이 훨씬 보기 좋았다. 낙엽만 굴러도 웃을 나이,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경쾌했다.
언제 와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공간이다.
장서관의 규모는 실로 대단했다. 작가별, 연도별, 국적별로 정리되어 있는 책장을 앞에 두고 프리아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신간이나 인기 서적들은 따로 분류되어 있어 찾아보기도 쉬웠다. 장서관은 알훼니아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서적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보물창고이자 아무리 머물러도 지루할 틈이 없는 최적의 놀이터였다.
서고에서 풍겨 오는 책 냄새가 갓 구운 빵 냄새만큼이나 강렬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프리아는 실감할 수 있었다. 구석에 놓여 있는 사다리를 끌고 온 프리아가 설레는 마음으로 사다리의 계단을 올라갔다.
책을 고르느라 사다리를 여러 번 왕복하던 프리아의 목에서 유디스가 걸어 주었던 흰 천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윗 칸에 꽂힌 책을 빼내느라 뒤꿈치를 들던 프리아가 사다리 아래까지 흘러내려 있던 천 위로 발을 올려놓았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아찔한 감각.
떨어진다.
흰 천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곧 등으로 느껴질 차가운 바닥의 감촉을 상상하며 프리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추락은 했으나 바닥에 닿기 전 구조된 모양이었다. 몸을 받친 누군가의 단단한 근육이 맞닿은 천 너머로 느껴졌다.
“기르!”
눈도 뜨기도 전에 프리아는 자신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보호자이자 스승이며 주치의인 누군가의 이름. 궁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면 달밤에 만난 사나이. ……이름이 뭐였더라? 의정…….
남자가 다급하게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기르? 내 품에 안겨 있는 이가 진정 기르가 맞는가.”
“……의정 대신 대리 나으리?”
능글맞은 음색, 전에도 안긴 적 있는 탄탄한 허벅지와 가슴, 자신의 결후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던 칼 솜씨를 지닌 사내. 의정 대신 대리였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정녕 기르가 맞는 모양이군.”
두 번 다시는 보게 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기르의 이름을 빌려 사기까지 쳤는데. 이런 곳에서 또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낭패다.
흙 씹은 표정으로 굳어 있는 프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특유의 장황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손끝으로 느껴지는 온기, 귓가에 들리는 달콤한 목소리, 한낮임에도 두 눈동자로 볼 수 있는 그대 얼굴. 그날 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구려. 아니 그날 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지금 내 눈앞에 그대가 있다는 사실이 꿈일 수 있으니. 그날 이후 그대를 찾아 헤매던 나의 영혼이 환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지. 내 손과 귀와 눈동자가 날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당신의 느끼함이요!
“상큼한 과일에 대한 욕구가 솟구치는 걸 보니 그 밤에 뵈었던 의정 대신 대리 나으리가 맞는가 보구려.”
“바이런이라고 그때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는가. 의정 대신 대리 나으리보다는 바이런이라 불러 주는 쪽이 시간과 체력을 한결 아낄 수 있다오. 삶은 유한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법이니.”
“그냥 담백하게 말을 하는 편이 그대의 시간도 절약되지 않겠소?”
“그대도 나의 시간과 체력을 아껴 주는 것이오? 그러나 나는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이라면 전혀 아깝지 않으니 짧은 말이라도 가능한 길게 하여 그대를 붙잡아 두고 싶다오.”
뭘 먹으면 저렇게 느끼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진지하게 말이다. 프리아가 소름이 돋아 오는 팔뚝을 쓸어내렸다.
이제 와서 사람 잘못 봤다고 부정한들 믿어 주지 않겠지. 아니 그보다 이제 몸 좀 바닥에 내려 줬으면 한다.
“이것 좀…….”
프리아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청산유수 바이런이 말을 이어 갔다.
“우연히 그대를 만나게 되는 날을 기대하며 온 궁정을 헤매었소. 후궁전만은 찾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어찌나 안타까웠는지. 마음 같아서는 제비궁으로 달려가 그대가 꿈은 아니었는지, 정령은 아니었는지 제비궁 주인께 물어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오.”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건가.
그런 짓 했다간 난 죽는다!
폐하보다 유디스의 분노가 더 무서웠다. 짐짓 엄한 표정으로 프리아가 바이런에게 엄포를 늘어놓았다.
“그런 무례를 저지를 생각을 하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려. 약초 연구를 위해 처소를 자주 비우고 있어 주인께서도 내 행방을 모르실 때가 많다오.”
“그럼 그대를 만나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왜 날 만나겠다는 것이오? 이유가 궁금하오. 어디 몸이라도 편찮으시오? 궁정의를 찾는 편이 낫지 않겠소?”
“내 병엔 그대가 명의요.”
“내 실력을 알지도 못하거늘. 착각이 지나치신 것이 아니오?”
“매정하시구려. 우리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을 넘어선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전혀.”
“난 그대의 차가운 이성에도 관심 있다오. 함께 토론의 시간을 가집시다.”
한참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바이런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 프리아는 무척이나 염려스러웠다.
‘가능한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3초 이하!’
유디스의 경고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3초가 다 뭔가. 1각의 시간을 1억겁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용한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