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32)화 (33/237)

각 공국에서 보내온 후궁 중 황제가 선택한 여인이 황후가 되는 것이 제국의 오래된 관례였지만 이미 성혼을 하여 자식까지 낳은 황족이 황위를 잇게 될 때는 기존의 배우자가 그대로 황후에 봉해지곤 했다.

공국에서 보내오는 후궁은 대공의 피붙이이자 일종의 대사라고 볼 수 있기에 성별, 외모, 나이가 황제의 눈에 들지 않아도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황제의 눈 밖에 난 사내 후궁이었던 프리아도 문제없이 후궁 생활을 영위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통이나 역모에 해당하는 큰 죄를 짓기 전에는 처벌도 불가능했으나 후궁전 암투로 희생된 후궁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프리아를 쫓아내겠다는 공녀들의 대화는 반쯤 허세였으나 실제로 황후가 된다면 얼마든지 구실을 만들어 모함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국의 역사 속에서 황후와 후궁들 사이에서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음모와 협잡은 대를 이어 반복되었고 각 공국 간의 우호 관계를 냉각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건국 초기 아스문드의 위세에 가려져 있던 힐데린, 흐라우드, 모스라티아, 세 공국이 지금과 같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 또한 세 공국이 배출한 황후들에 있었다.

후궁들의 다툼에 진력이 난 황제들은 나이가 찬 황태자를 언제까지 미혼으로 둘 수 없다는 핑계를 들어 미리 혼인시켜 공국의 간섭을 피하기도 했다. 제국인들 사이에서도 공국 출신의 낯선 황후보다는 제국 내에서 발탁된 태자비의 인기가 훨씬 높았다.

황제의 모친인 선태후 역시 제국 출신으로 황태자와는 먼 친척뻘에 해당하는 황족이었다. 쉬쉬했으나 황태자의 남색 취향에 대한 소문은 태자비 후보에게까지 들어갔고 혼약을 거부하는 여동생을 달래 기어코 태자비로 앉힌 것을 페르마 공작은 아직까지 마음에 걸려 하고 있었다.

외모가 빼어났던 선태후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전 황손비, 높은 지지와는 달리 결국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두 여인을 제국인들은 한마음으로 안쓰러워했다.

이방인인 요난나에 의해 선태후가 냉대받았던 것을 기억하는 제국인들은 또다시 알훼니아 출신인 후궁에게 황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에 깊이 근심하고 분노했다. 황제의 즉위 반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모후가 될 예비 황후의 회임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 또한 요망한 이방인의 술수 탓이라 생각한 국민들은 사내 후궁인 프리아에게 미움의 화살을 돌렸다. 풍문을 바탕으로 화가 자신들의 상상력을 더해 그려진 악랄한 초상이 시중에 나돌고 있는 것에는 이러한 원인이 있었다.

차라리 전 황손비인 린드가르트가 황후에 오르기를 바라는 일부 제국인의 바람이 황제와 형수인 린드가르트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소문으로 나타났다. 망측한 소리라며 얼굴을 붉히는 자와 옛적에는 아우가 죽은 형의 아내를 취하는 일도 왕왕 있었으니 뭐 어떠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술집에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젊은 황제의 즉위로 들떠 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안이 실리기 시작했다. 제국을 둘러싼 각 공국들의 불만도 커져 갔다. 모든 이의 눈길이 후궁전으로 쏟아졌다. 불안, 불만, 질시, 혐오. 그 시선의 중심에 알훼니아 출신 사내 후궁 프리아가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충원된 시녀들이 도착했다.

허드렛일을 담당할 시녀 둘은 곧 세탁부와 조리부로 배치되어 일선에 투입되었으나 수행 시녀의 역할을 하게 될 귀족 소녀 둘은 새침한 표정으로 응접실에 앉아 유디스와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수석 시녀인 유디스라고 합니다. 다들 들어서 아시겠지만 프리아 님은 폐하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계신 분이기에 여러분께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한마음 한뜻으로 보필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석 시녀의 위엄을 내보이려 애쓰며 유디스가 평소와는 달리 힘을 줘 작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벨이에요.”

한눈에 보아도 꽤 값이 나가 보이는 녹색 새틴 드레스를 걸친 소녀가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것으로 유명한 핸슨 백작의 차녀였다. 딸의 미모를 과신한 백작이 대세로 떠오른 사내 후궁의 처소로 싫다는 이사벨을 밀어 넣은 것이었다.

본래 황제가 자주 찾는 후궁의 주변에서 정부 또한 탄생하는 법이었다. 가능한 많은 수의 자손을 남기는 것이 황제의 의무이자 권리였던지라, 상대적으로 접촉 빈도가 높은 수행 시녀들이 황제의 눈길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자신들이 모셨던 후궁의 라이벌로 등극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거라. 어떻게든 폐하의 주위를 맴돌아서 눈에 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야심찬 소녀 이사벨이 저와 동갑이라 들어, 더욱 만만해 보이는 유디스를 코끝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간 황제를 만날 기회도 많았을 텐데 아직까지 수석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별 볼 일 없는 외모만큼이나 지능 또한 변변찮은 모양이었다.

“리브론입니다. 올해 열일곱이구요.”

밤색 머리의 소녀, 리브론이 유디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굳이 제 나이를 밝혀 왔다. 아무리 자작의 딸인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백작의 여식이라 해도 저보다 어린 유디스에게 허리를 굽힐 생각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두 분 다 경험이 없으실 테니 제 지시를 우선으로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프리아 님께서 불편해하실 수도 있으니 당분간 의복 수발은 제가 그대로 할 터인즉 두 분께서는 하루 빨리 궁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제가 하는 것들을 잘 보시고 따라 익히셨으면 해요.”

낯선 여자들에게 프리아 님의 소중한 몸을 만지게 할 수는 없다, 그리 결심한 유디스였다. 망할 놈의 관리들 같으니. 진중한 부인들로 보내 달라고 그리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 새파랗게 젊은 계집애들은 다 뭐란 말이냐. 분명 폐하를 노리고 온 것이다. 앙큼한 것들.

팽팽한 눈빛 싸움을 펼쳐가며 방 안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고 있는 세 소녀 앞으로 다가온 시녀가 뒤늦은 일행이 찾아왔음을 알려 주었다.

“재정 대신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들어오세요.”

시녀의 말에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인이 긴장한 얼굴을 그들 앞에 내보였다. 먼저 도착한 두 소녀들과 달리 수수한 차림새를 한 여인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석 시녀님, 이사벨 님, 리브론 님.”

조금 늦기는 했지만 동료가 될 다른 시녀들의 이름까지 미리 알아온 준비성이 유디스의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수석 시녀님’이라고 깍듯이 예를 표하고 있지 않은가.

“올가라고 합니다. 연락을 늦게 받아서 이제야 도착했어요.”

“수석 시녀 유디스입니다. 실례지만 나이를 여쭈어도 될까요?”

겨우 한 살 나이 차이 가지고 저를 이기려 들었던 리브론에게 한 방 먹여 주기 위해 아침에 전달받았던 서류에서 미리 확인한 바 있는 올가의 나이를 굳이 유디스가 물었다.

“열아홉입니다. 곧 있으면 스물이에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올가가 대답했다.

“새로 오신 분들 중에 가장 연장자시네요. 어떻게, 궁 생활 경험은 있으신가요?”

“본궁에 선황제 폐하를 모셨습니다. 승하하신 이후로는 린드가르트 님의 처소에서 일을 했구요.”

“훌륭하세요. 경험도 풍부하시고 본궁에 대해 아는 것도 많으실 테니 큰 도움이 되겠어요.”

“아닙니다. 모쪼록 유디스 수석 시녀님께서 부족함을 감싸 주시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잘들 논다.

다른 두 소녀들과 달리 수수하고 다루기 쉬워 보이는 올가에게 힘을 심어 줌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행 시녀들 간의 서열을 세우려는 유디스의 의도를 눈치챈 이사벨과 리브론이 썩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항변을 시작하려는 찰나, 어제 빌려온 이야기책을 밤새워 읽느라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뜬 프리아가 침의 바람으로 응접실에 나타났다.

“유디스, 나 배고파.”

“어맛, 프리아 님! 그런 차림으로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왜?”

잠이 덜 깬 것인지 졸음을 매단 프리아의 눈가가 느리게 깜박이며 한 박자 늦게 손님들을 인식했다.

“아, 손님이 오셨구나.”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격의 없는 옷차림과는 달리 정중한 자세로 무릎을 굽힌 프리아가 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보낸 후 뒤돌아, 나왔던 침실로 사라졌다. 제 상전이 반쯤은 잠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유디스가 단체로 홀린 듯 입을 벌린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어머, 망측도 하셔라.”

물 흐르듯 우아한 동작에 일순 시선을 빼앗겼던 소녀들이 시치미를 떼며 쥘부채를 흔들었다.

“기상이 매우 늦으시군요.”

“건강이 염려되시지도 않으신가요? 유디스 님은?”

수행 시녀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프리아 님의 건강을 따지고 드는 소녀들의 뻔뻔함에 유디스가 동그란 눈을 치켜떴다. 감히 지금 누구에게 따지고 드는가. 공국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자신만큼 프리아 님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부할 수 있는 유디스였다.

“올가 님은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죠?”

소문의 사내 후궁을 보았음에도 자신들과는 달리 별다른 언급이 없는 올가에게로 이사벨이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흐트러진 미남의 등장에 잠시 심장이 널을 뛰었지만 그것은 예고도 없이 속살을 내보인 사내 후궁의 무례에 놀란 것일 뿐이었다. 듣던 대로 천박하고 경박한 사내가 아닌가.

“저는…….”

갑작스런 이사벨의 트집에 당황한 올가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이미지의 분이시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니, 올가 님은 프리아 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던 건가요?”

리브론 또한 이사벨을 거들며 올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전 황손비의 유폐궁에서 일했다는 시녀가 프리아 님을 어찌 생각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진 유디스도 덩달아 귀를 기울였다.

“……여인과 다름없는 분이실 거라……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제 말씀은……. 여인만큼이나, 아니 여인보다도 고우신 자태를 지니신 것은 맞사오나…….”

집중된 시선에 어쩔 줄 몰라하며 올가가 뒷말을 자신 없게 흘렸다. 트집 잡기에 재미를 붙인 이사벨이 다시 한번 올가의 말을 잡고 늘어졌다.

“실례가 아닙니까? 프리아 님을 예사 여인과 비교하시다니요.”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런 것이 아니면 뭐랍니까? 린드가르트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이사벨의 입에서 나온 전 황손비의 이름에 순식간에 올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그리 함부로 입에 담으시는 겁니까? 예의를 갖추세요!”

이사벨의 생트집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던 올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사벨을 노려보며 언성을 높이는 올가의 급변한 태도에 유디스와 리브론이 기 싸움 중이었던 것도 잊고 눈짓을 주고받으며 당혹스러운 심정을 공유했다.

‘갑자기 왜 저러신답니까?’

‘낸들 아나요?’

‘저렇게 화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게요.’

‘황당하네요.’

‘유폐궁에서 일했다더니 전 황손비와 사이가 각별했었나 봐요.’

‘그래도 이건 아니죠.’

‘그러니까요. 이제부턴 제비궁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수행 시녀가 애들 장난이랍니까.’

‘애들 장난 아니죠. 어지간해서는 궁에 발도 들여 놓지 못할걸요.’

‘그렇지 않아도 자격과 외모를 갖춘 분들로 보내 달라고 제가 신신당부를 했답니다.’

‘유디스 님이야말로 어린 나이에 수석 시녀의 자리에 오르셨잖아요. 외모, 혈통, 기품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으십니다.’

순식간에 죽이 맞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서로의 취향에 대한 문답을 나누었다. 나고 자란 영지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까지 확인한 유디스와 리브론은 마을 정세와 친척 간의 대소사까지 나누며 공감을 쌓아 갔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올가가 자신이 지나쳤다며 용서를 구해 왔다. 선황제 폐하의 승하로 오갈 데 없어진 자신에게 손 내밀어 준 유일한 은인이었기에 그만 생각이 앞서 과잉 반응을 보이고 말았노라고 고개를 숙였다.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 소녀와 고개 숙인 여인 앞에 다시 나타난 프리아가 자신을 모시게 될 새 수행 시녀들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준비된 인재가 필요하다, 자신을 보조할 수행 시녀의 추가 투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강력히 주장해 왔던 유디스의 말과는 달리 본래 후궁전 안에서의 업무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모시는 후궁의 옷 수발과 머리 모양 손질, 함께 수를 놓으며 소일하기, 수다 떨며 차 마시기, 시시때때로 상전의 미모 칭찬하기와 연애 조언하기 등 사내인 프리아가 보기에는 왜 네 사람이나 이런 일에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놀아 줘야 할 여동생의 숫자가 또 늘어났구나. 소녀들 몰래 한숨을 내쉰 프리아가 수다 삼매경인 수행 시녀들의 뒤에서 이야기책을 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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