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31)화 (32/237)

전투가 길어지는지 출전한 유디스에게서 몇 시간째 소식이 없다. 식사 때를 넘기자 주린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코브alcove에 몸을 숨기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던 프리아가 한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하느라 뭉친 어깨를 두드렸다.

멀리 보이는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신화 속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프리아 님도 이제는 제국 사람이시니까요. 역사부터 공부하셔야죠.’

언젠가 거들먹거리며 유디스가 빌려왔던 두꺼운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황제들은 화가를 시켜 대대로 자신과 황후의 얼굴을 본떠 신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한 인물화를 그리게 했다는 것이다.

어디, 닮은 구석이 있나.

장서관 복도에도 걸려 있는 오웬의 초상화와 천장의 인물화를 비교하며 외모를 견주던 프리아가 ‘참, 실없는 짓도 한다.’ 스스로가 우스워 실소를 터트렸다.

“황가의 초상을 모아 놓은 화집? 있기는 하다만 특수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어 상부의 허락이 필요해서 말이오.”

관리는 아니신 듯하고, 외국에서 오셨소? 유학생? 현재 머무시는 곳이 어디요?

역사 서고를 담당하는 중년의 사서가 프리아의 소속을 물어 왔다. 깐깐하고 주문 많은 학자들만 상대하다가 오랜만에 젊은 방문객을 만나니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내친김에 소문의 전 황태자와 요난나라고 하는 정부의 얼굴이나 확인해 둘까 싶어 물어봤는데 상부의 허락이 필요하다니 생각지 못한 난관이었다. 일전에 만났던 느끼한 자는 쉽사리 속여 넘길 수 있었으나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면 유령 주치의 기르의 정체가 단박에 드러나고 말 것이다.

“그럼 됐습니다.”

역시 유디스를 통해야겠다. 단념한 프리아를 사서가 불러 세웠다.

“혹시 알훼니아에서 오지 않으셨소?”

제국에서는 흔치 않은 금발이라고는 하지만 얼굴 가득 ‘알훼니아 출신’라고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닐진대 다들 잘도 알아채고 물어 온다.

“그렇습니다만.”

“역시 그랬군. 옷차림도 그렇고 예사 미모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넘겨짚어 봤소. 그쪽 사람들은 참, 기름독에서 나온 족제비처럼 잘도 빼입고 다닌단 말이야. 사내가 좀 진중한 맛이 있어야지. 아이쿠, 이거 실례했구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오.”

“아닙니다. 어르신 말이 일리가 있네요.”

“어울리면 된 게지. 그건 그렇고 내 들은 얘기가 있어 뭣 좀 물어보려 하오.”

“들은 얘기라 하심은?”

“그쪽 고향에서 온 제비궁 주인 말이오. 지금 시중에서 그림이 돌고 있다오.”

“그림이라면 초상화 말입니까?”

“한번 보시겠소? 사적으로 구한 건데 보고 얼마나 비슷한지 말이나 해 주시오.”

초상화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자신의 초상화가 나돌고 있다는 소리에 호기심이 생긴 프리아가 품속에서 둥글게 말린 종이를 꺼내는 사서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것이오, 어떻소? 이렇게 생겼소?”

누구냐, 넌.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리색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한 군데도 닮은 구석이 없다.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 두터운 붉은 입술을 강조한 짙은 화장, 있지도 않은 눈가의 미인 점하며, 보는 이를 주눅 들게 만드는 오만한 표정,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만지고 있는 손가락에는 포도알만큼 커다란 루비 반지가 빛나고 있다. 인물의 당당한 표정과는 달리 배경 상단에는 조롱하듯 ‘남창’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닮았소?”

“글쎄요. 이건 여인의 초상이 아닙니까?”

“첩짓을 하니 계집이나 다름없지. 왜 그러시오. 닮지 않았소?”

“이런 건 어디에서 판답니까?”

“암시장이 있다오. 한창 인기 많은 물건이라 구하려고만 들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

“초상이 인기가 많습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프리아에게 사서가 그것도 모르냐며 퉁을 놓았다.

“남첩 때문에 황실의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걸어 놓고 욕이나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오.”

“욕을 한다고요?”

“그런다고 뭐, 어디서 떡두꺼비 같은 황손이 떨어질 것도 아니지만. 다 한때가 아니겠소. 남색 그거 나도 해 봤는데 별거 없더이다. 메뚜기도 한철이오. 폐하께서도 곧 정신을 차리시겠지.”

이렇게나 미움받고 있었던가.

한참 초상을 들여다보는 프리아를 재촉하며 사서가 뒷말을 이었다.

“닮지 않은 모양이오? 화가마다 개성이 있어서 조금씩 다르게 그린다 하더이다.”

“닮았습니다, 꽤.”

그렇소? 프리아의 말에 반색한 사서가 돌려받은 초상화를 다시 소중히 품 안에 넣었다.

“우리 마누라가 구해 달라고 해서. 나는 뭐 큰 관심은 없다오.”

사서가 멋쩍은 표정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알훼니아 출신이라면 덮어 놓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편견은 없으니 책을 빌릴 생각이면 부담 없이 들르시오.”

“그럼 앞으로 종종 들르겠습니다.”

돌아서 걸어가는 프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서가 의외로 눈이 낮은 황제의 심미안에 대한 훈수를 두었다.

“같은 알훼니아 출신이라도 저이는 저토록 훤칠하고 기품 있게 생겼는데 말이야. 거참, 높은 분들 취향이란.”

사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프리아 님, 오래 기다리셨죠? 늦어서 죄송해요. 그놈의 인간들 어찌나 꽉 막혔는지 규정, 규정하고 자꾸 따지고 들어서요.”

돌아온 유디스가 땀 닦는 시늉을 하며 고생담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실패했어?”

프리아가 장단을 맞춰 주며 경과를 되물었다. 일손이 모자라니 시녀 수를 늘려 달라고 해야겠다며 두 주먹 불끈 쥐고 재정부로 달려갔던 유디스였다.

“제가 누굽니까?”

콧대를 치켜세우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던 유디스가 재정 대신의 서명이 적힌 서류를 프리아 앞에 내보였다.

“다섯 명이나 증원 성공이에요. 두 명이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뒷목 잡고 쓰러지려고 했는데 마침 지원군이 나타나셨지 뭐예요.”

“지원군이라니?”

“린드가르트 님이 오셨거든요. 여간해서는 유폐궁 밖으로 걸음하시지 않는 분이신데 마침 아버님인 재정 대신을 만나러 오셨더라구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격해져서 말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옆방에서 듣고 계시다가 나오셔서 거들어 주셨답니다. 폐하께서 총애하는 분이시니 아낌없이 지원해 드리는 것이 옳다구요. 실물로 뵌 것은 처음인데 참 정숙하시고 음전하신 분이더라구요. 역시 그 소문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어요.”

“무슨 소문?”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목소리를 낮춘 유디스가 손을 입가에 대고 말을 이었다.

“폐하랑 그렇고 그런… 사이시라는.”

“아…….”

“그때도 제가 헛소문일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맞았어요. 시동생에게 그런 마음을 품으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던걸요. 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퍼트린 거죠, 뭐. 자신은 수행 시녀가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 제비궁으로 보내 드리는 것이 어떠냐는 말씀까지 하셔서 재정 대신께서 난처해하셨어요.”

“그래? 좋은 분이시구나.”

자신도 딱히 수행 시녀가 더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고생한 유디스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프리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프리아 님의 안부도 물어 오셨어요. 나중에 꼭 한번 뵙고 싶으시다고. 빨리 처리해 드리라고 대신께서도 말씀해 주셔서 일사천리로 승인이 났답니다. 당장 내일부터 충원해 준대요.”

이래서 세상은 뒷배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 봐요, 오홋홋.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가슴을 내민 유디스가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서류를 흔들었다.

린드가르트, 일전에 참석했던 다회에서도 들었던 이름이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대화 틈틈이 프리아를 곁눈질하던 라리사와 유스티나, 에머린에게서였다.

‘원래는 황후가 되셨을 분이신데 말이야.’

‘누구누구랑은 달리 품위가 넘치시지.’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않고 나대는 누구누구랑은 참 달라.’

‘제까짓 게 뭘 하겠어. 황손을 낳을 수도 없는데.’

‘아직 나이 어리셔서 색다른 장난감에 흥미를 보이시는 거지.’

‘어차피 황후는 우리들 중 하나가 될 테니까.’

‘황후가 되면 후궁전 청소부터 해 달라고 해야겠어.’

‘격이 떨어지는 미꾸라지부터 잡아야겠지?’

‘그때쯤이면 벌써 쫓겨나고 없을걸.’

자기들 딴에는 열 받으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프리아 역시 그 내용에 수긍했기에 오히려 대화에 끼어들어 맞장구를 쳐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너희들 말이 모두 옳으니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봐 달라고.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부러 전 황손비를 칭찬한 것이겠지만 유디스의 말을 들어 보아도 훌륭한 성품을 지닌 분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어떤 분이셔?”

슬쩍 물어 오는 프리아의 질문에 유디스가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린드가르트 님 말씀이세요?”

“응. 우릴 도와주셨다고 하니 어떤 분인지 궁금해져서.”

어떤 분이냐니. 그런 게 왜 궁금하실까. 잠시 머리를 굴리던 유디스가 상전의 속내를 짐작해 냈다.

“프리아 님이 더 예뻐요. 린드가르트 님께는 죄송하지만 비교급이 아니라고 할까.”

알지, 알지. 그 맘 알지.

폐하와 염문이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유디스 자신도 은근 전 황손비가 신경이 쓰였었다. 사내란 모름지기 금단의 관계에 빠져드는 자제력 없는 종자가 아니던가. 지적이고 단아한 외모에 차분하고 우아한 태도를 갖춰 황손비에 발탁된 연유가 수긍이 되었으나 미모로 따지자면 경국지색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프리아 님에 비해 한참 부족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닌데. 대쪽 같은 외모지상주의자 유디스의 뚱딴지같은 대답에 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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