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30)화 (31/237)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포근한 이불 속에 감긴 것처럼 온몸이 꿈결처럼 아늑했다. 적당히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진다. 오웬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사내의─.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게 뜬 오웬의 눈동자 위로 간지럽게 바람이, 사내의 숨이 불어왔다. 자신의 후궁 프리아가 빈틈없이 몸을 붙인 채 오웬을 안고 있었다. 맞닿아 있던 것이 후궁의 살결이었음을 깨닫자 지난밤의 기억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재정 대신의 연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황제의 침실에 침입한 죄를 물어 남동은 옥에 가두고 대신의 아들에게는 근신을 명했다. 관대한 처분이었다. 착각으로 인한 사고라 주장했으나 오웬은 그것이 자신을 골리기 위한 루탄의 장난질이었음을 직감했다. 연루된 자들을 참수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호위와 대신에게까지 죄를 물어야 마땅하나 린드가르트에게 근심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친정의 안위를 살펴 달라 요청한 적 없는 그녀였다.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싶었다.

많은 양의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불유쾌한 두통이 찡하니 오웬을 습격해 온다.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잠들어 있던 후궁이 새끼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며 오웬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정인의 품안에서 눈을 뜨는 아침은 그야말로 축복이지.’

하루쯤 제비궁에서 아침까지 머물고 오면 어떻겠냐며 쓸데없는 훈수를 두던 바이런의 말이 떠올라 오웬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후궁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가 더욱 깊이 잠이 들기를 기다렸던 오웬이 눈동자를 굴리며 프리아의 기색을 살폈다. 고른 숨을 확인한 오웬이 시선을 내리자 후궁의 목으로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손자국만이 아니다. 치열 그대로 멍든 잇자국과 붉은 기운이 감도는 입술 자국이 목을 중심으로 점점이 꽃피듯 후궁의 몸에 수놓여 있었다.

습격을 당한 것은 후궁만이 아니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젖은 옷가지는 물론이거니와 두서없이 흩어져 있는 천이며 빈 기름병 따위가 속을 드러낸 서랍장 주위로 나뒹굴고 있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침실의 풍경은 처참했다.

“폐하, 일어나셨사옵니까.”

침실의 문을 열고 나가자 충직한 시종장이 언제나처럼 그날 입을 옷가지를 받쳐 들고 오웬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의 소동을 들었을 터인데 야단스레 안부를 물어 오지 않는 태연함이 외려 노인의 연륜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있던 시종이 다가와 부지런히 오웬의 벗은 몸을 닦아냈다.

“꺅!”

오웬의 알몸을 목격한 시녀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아섰다.

“철없는 것 같으니. 이러고도 네가 프리아 님을 모시는 수석 시녀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지만 소녀, 폐하의……. 폐하의…….”

시종장의 야단을 들은 시녀 아이가 붉어진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거시기를 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프리아 님을 깨우겠습니다!”

도망치듯 침실로 달려가는 시녀 아이를 오웬이 제지했다.

“쉬게 둬. 깨우지 말도록.”

‘무슨 짓을 하셨기에.’ ‘프리아 님이 녹초가 되도록.’ ‘깨우지 말라니 다정도 하셔라.’ ‘보았소?’ ‘훌륭하더이다.’

모여든 시녀들이 눈짓을 교환하며 ‘얼굴뿐 아니라 그곳도 잘나신 폐하’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나이 어린 유디스만이 손부채를 부치며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후궁전을 빠져나가는 오웬의 뒤를 따르며 시종장이 간밤 이후의 경과를 고했다.

“……소인은 놀랐습니다.”

“뭐라고 하였느냐?”

잠시 말을 흘려들은 오웬이 재차 묻자 시종장이 만면 가득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기를 다스리기 위해 프리아 님을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까. 본시 아플 때, 외로울 때, 슬프고 괴로울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정인인 법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도 생각나고 보고 싶어지기도 하지만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어느 결에 그렇게 프리아 님께 의지하게 되신 건가 하고요. 사람 사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는 법이지만 말입니다.”

“내가 그자를 의지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군.

오웬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눈치 빠른 시종장이 트루바니아에서 온 사신이 가져왔다는 코담배 갑의 정교한 세공에 관한 칭찬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아니라고 하셔도 이 늙은이 눈에는 다 보인답니다.’

황위를 물려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부쩍 넓어진 오웬의 어깨를 올려다보며 손주의 성장을 지켜보듯 시종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상 창 시합과 가면극은 물론이고 폐하의 탄신연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폐하?”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황제의 탄신일에 개최될 연회에 대한 화제로 옮겨 간 지 오래인데 무엇에 홀린 것인지 발걸음을 멈춘 황제가 몇 발짝 뒤에서 망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폐하?”

간밤에 내린 비로 쌀쌀해진 아침 바람이 멈춰 선 오웬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찬 공기에 닿자마자 떠오른 감각.

온기, 감촉, 숨결까지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니. 스스로의 생각을, 충동을, 감정을 오웬은 믿을 수가 없었다.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시종장의 재촉을 흘려들으며 오웬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찬바람에 노출된 목덜미가 간밤의 온기를 그리며 흠칫 떨렸다. 살갗에 스민 후궁의 체취가 오웬의 주위를 오래 맴돌았다.

갔구나.

프리아가 눈을 떴을 때는 흰 시트만이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허리 아래에서 몰려왔다. 향유 덕분일까. 색사 이후에는 쓰라려 반신욕을 하고서야 진정되던 비부의 아픔이 평소보다는 덜했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들을 발끝으로 헤쳐 가며 프리아가 창가로 걸어가 내려져 있던 커튼을 밀어 젖혔다.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눈을 감았다 뜨자 멀리 창밖으로 멈춰선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어느새 익숙해진 황제의 뒷모습이다. 긴 밤이었다. 황제와 몸을 섞었던 수십 번의 밤보다 간밤의 기억이 더 깊었다. 그저 평소보다 긴 색사를 했을 뿐인데 긴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프리아.’

떠올리자 다시 욱신하고 가슴이 조였다.

나는 당신의 그 무엇도 앗아 가지 않을 거야.

침실을 살피러 온 유디스가 창가에 선 프리아를 향해 반색하며 달려왔다. 유일한 벗 유디스에게로 몸을 돌리며 프리아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프리아 님이 좋아하실 만한 책은 3층, R-7 구역에 있어요.”

까마득히 높은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책장과 그 안에 담긴 책들이 자아내는 장관에 프리아가 경탄하며 입을 벌렸다. 기왕에 허락받은 장서관 출입인지라 야무지게 써먹겠다며 바쁘다는 유디스를 졸라 행차한 본궁행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다정한 척은 혼자 다 하시더니, 성적 취향이 좀 위험하신 거 아니에요?’

프리아의 목에 남은 손자국에 기함한 유디스가 씩씩거리며 황제를 비난하는 바람에 눈치 보여 며칠간 장서관에 가 보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오늘 오후에 본궁 업무가 있다는 소리에 아침부터 내내 졸라 간신히 따라온 것이다. 유디스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예쁜 옷도 꺼내 입었다.

‘누가 보면 도적에게 당하기라도 한 것으로 오해할 거니까 안 돼요.’

목을 감싼 실크를 풀어 버리려고 하는 프리아를 제지하며 유디스가 엄중하게 경고했다.

‘오해 좀 하면 어때. 살아남았으니 다행이지 않소, 하고 맞받아 주면 되지.’

‘몸도 돈도 홀랑 다 빼앗겼다고요?’

‘몸을 왜 빼앗겨.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온통 물리고 빨린 자국투성인데 그럼 전투 치르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보일까 봐서요?’

‘그렇게 심해?’

‘심해요.’

그렇게 대답하며 거울을 가져다준 유디스가 울긋불긋 얼룩진 프리아의 목덜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남에게 고통을 주며 좋아하는 별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도 있다 들었지만 그게 우리 폐하가 될 줄은 몰랐다.

‘프리아 님도 설마 맞고, 목 졸리고 그런 거에 취미가 있으신 건 아니시죠?’

‘아픈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내가.’

얼토당토않은 소리!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한 멍 자국에 기분이 상한 프리아가 자개로 장식된 경대를 밀어냈다. 이국에서 가져온 귀한 물건이라며 마르시아 후작 부인이 보내온 것이었다.

A부터 C구역까지는 법학이구요, D부터 F까지는 철학이에요. 그 외에도 농학, 경제학, 공학이 있고, 아무튼 오늘은 R에서 S구역, 문학을 중심으로 둘러보시면 될 것 같아요. 대출 절차는 제가 다시 와서 밟을 테니 프리아 님은 골라서 한데 모아 놓기만 하세요.

간략한 설명을 마친 유디스가 ‘바쁘다! 바빠!’ 하며 종이 뭉치를 움켜쥔 채 들어왔던 문으로 달려 나갔다. 몇 달에 한 번, 후궁전 예산 정산 건으로 관리들과 자웅을 겨루는 날이 있다더니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었다.

눕힌 아치 형태를 한 장서관은 과거 신전으로 쓰이던 건물이라 했다.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굵은 기둥의 바랜 무늬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층마다 배치된 사서와 구석에 놓인 탁자 위에서 케케묵은 두루마리와 씨름하고 있는 학자들을 제외하면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공간이었다.

“R-7구역이란 말이지.”

입구에 걸린 배치도를 다시 확인한 프리아가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계단과 복도에는 소음 방지를 위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사서가 가벼운 묵례를 보내왔다. 비싼 옷을 입은 덕분에 시종이라는 오해는 받지 않은 모양이다. 궁정을 방문한 귀족이 아니라 후궁이라는 것을 알면 눈빛이 달라질까.

‘쓸데없는 생각.’

스스로를 꾸짖으며 프리아가 Q에서 R로 이어지는 서고로 발을 들여 놓았다.

R과 S. 로맨스와 사가saga를 뜻하는 약자다. 한동안 챙겨 보지 못하던 새에 쏟아져 나온 신간에 환호하며 프리아가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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