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몰라서 그렇게 험하게 구셨던 거냐고요!
기가 막혀 입을 벌린 프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오웬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 정말이지 망할 애새끼다.
“배려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폐하의 옥체를 우선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요.”
정말?
그렇게 물어 오는 오웬의 유순한 눈매에 프리아는 자신도 입꼬리를 끌어 올려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까 어서 하라고!
어르고 달래 다시 시작된 색사는 곧 암초에 부딪혔다.
“아파.”
집에서 쫓겨난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 오웬이 울먹였다. 빌어 처먹을 놈 같으니. 정작으로 아파서 울고 싶은 것은 프리아 쪽이었다.
“그냥, 그냥 해요. 제발.”
“아파.”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인내심이 바닥난 프리아가 황제를 밀쳐냈다.
분명히 이곳에 두었다.
침상에서 내려온 프리아가 분주하게 서랍장을 열고 수납된 물건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유디스가 서랍을 정리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물건은 분명히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있다.
감싼 주머니조차 요사스럽다. 붉은 벨벳 주머니 안에서 찾아낸 작은 유리병을 프리아가 주의 깊게 살폈다. 형수님들이 보내주신 후궁 필수품, 향유다.
이걸 쓸 일은, 그것도 자신이 자청해서 쓸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침상 위로 돌아온 프리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밀봉된 병의 뚜껑을 뜯었다. 퍼져 나오는 꽃향기를 맡은 오웬이 향기의 근원을 추론했다.
“자스민……. 라벤더 향도 나.”
지금 이 향유가 자스민인지 라벤다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 오웬을 째려본 프리아가 다시 병을 기울여 미끈거리는 액체를 양손에 듬뿍 묻혔다.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이리 와, 오십시오.”
허락을 구하듯 애원하는 오웬의 시선에 쯧, 소리 내어 혀를 찬 프리아가 손짓해 연하의 사내를 도발했다.
어찌된 일일까. 찰나와도 같은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순식간에 전신을 스치고 지나간 감각을 프리아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뭐지? 이건?’
“아파?”
오웬이 프리아의 낯빛을 살피며 다시 동작을 멈췄다.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프리아가 오웬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파?”
참기 어려울 터인데도. 오웬이 착하게 프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아니, 아니요.”
느린 속도로 움직이며 오웬이 프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품 안의 사내가 아파하는 일만은 어쩐지 하고 싶지가 않다.
왜 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거야.
꾸밈없이 응시하는 오웬의 시선에 프리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처음 몸을 섞었던 첫날밤보다 지금의 황제가 더 낯설었다.
프리아 자신도 모르고 있던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등줄기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감각. 물 아래 갇힌 것처럼 숨이 가쁘고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지금까지 겪었던 색사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황제의 몸이 이러했던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부끄러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눈을 질끈 감자 몸 위의 황제가 손을 뻗어 프리아의 뺨을 감쌌다.
“내가 싫어?”
“…….”
“나를 싫어해?”
당신이 싫다, 프리아는 황제가 싫었다. 싫다고 생각해 왔다. 그 누가 물어와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 지금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대답 없는 프리아 대신 오웬이 입을 열었다.
“네가 싫지 않아.”
뜻밖의 대답을 들은 프리아의 눈이 커졌다.
“나는…….”
상처 입은 어린 짐승 같은 표정으로 오웬이 말을 이었다.
“네가 무서워.”
무섭다니.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자신을 착각하고 있는 걸까. 전에 없던 배려의 대상이 프리아 자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네가 무서워.”
반복하는 오웬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쓸쓸하게 물었다.
“제가 왜 무서워요?”
“너 때문에… 모든 걸 잃게 될까 봐.”
아비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모든 걸 버리게 될까.
오웬은 품에 안은 사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한 대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프리아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저 때문에 폐하가 무언가를 잃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그 무엇도 앗아 가지 못해.
때가 되면 조용히 떠날 것이다.
어쩐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손끝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양팔이 황제의 벗은 등 뒤로 둘려 있었다. 땀에 젖어 미끄러지는 프리아의 손목을 오웬이 다시 잡아 어깨 위로 걸치게 했다.
숨을 헐떡이며, 첫 정사를 치러내는 청년처럼 오웬이 감각을 쫓아갔다. 사내가 오웬을 아득히 깊은 곳으로 끌어 내리고 있었다. 더 깊이, 저 먼 곳까지 갈 수 있을까. 파도처럼 밀려온 쾌감이 번개 치듯 오웬의 눈앞에서 점멸했다. 늘어지는 사내의 몸을 끌어안으며 오웬이 몸을 떨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드러낸 오웬이 고요한 눈빛으로 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다가온 커다란 손이 눈썹을 가린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올렸다.
누구를 보고 있는가.
이토록 따뜻한 손길과 시선을 자신에게 보낼 리 없다. 어딘가 시선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제정신이 아닌 황제와 몸을 섞었더니 자신도 옮아 머릿속까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아침이면, 약의 효과가 떨어지면 황제는 다시 자신을 냉대할 것이다. 늘 그러했듯 경멸의 눈빛을 던지고 침실을 떠나갈 것이다.
내 이름이나 알고 있을까. 프리아는 그것이 궁금했다.
황제의 이름은 오웬. 공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먼발치에서나 한 번쯤 보게 되겠지. 사신이 전해 준 젊은 황제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오웬.’ 소리 내 불러 본 밤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몸이었다. 자신의 약이 아니었다면 세 살도 되기 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도련님이었다고 소리치는 유모와 어린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며 힐난하는 기르의 싸움을 숨어서 본 적이 있다.
‘유모, 마녀가 뭐야?’
잠옷을 입혀 주는 유모에게 프리아가 질문하자 이미 노인에 가까웠던 여인이 작은 프리아의 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나쁜 말은 하시는 게 아닙니다. 도련님은 이 유모를 믿으시지요?’
‘응.’
‘다만 하루라도 더 사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유모, 울지 마. 프리아가 잘못했어.’
젖먹이 시절부터 받아먹었던 물약이 몸의 신경 체계를 교란시키는 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유모가 죽고도 수년이 지나 프리아가 기르의 조수 노릇을 하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잘 들으세요, 프리아. 가능한 중화시키기는 했지만 독성을 아예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발작이 일어나는 것 또한 그 때문입니다. 건강하게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지난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프리아의 몸은 남들과 다릅니다. 겉으로는 문제없이 보이겠지만 그 속은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남들보다 오래 산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가치 있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에요.’
‘나 죽어?’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아프지 않더라도 신념을 위해 싸우다가 죽음을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그대의 적이자 동지가 될 겁니다. 잔인하다 여기실지도 모르지만 제가 프리아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그대가 후회 없이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미리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언제 죽는데?’
‘이 기르가 앞으로도 10년간은 무리 없이 사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 다음은 스물다섯 생일이 지난 후에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요?’
스물다섯의 생일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계절마다 돌아오는 꽃들을 더는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 아침이면 이 밤을 잊을지도 모르는 황제가 자신을 기억해 줄까.
아쉽다니, 스스로 든 생각을 프리아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청원 말입니다.”
입을 열자 오웬이 따뜻한 눈빛으로 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폐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뭐, 오늘밤 있었던 일은 잊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지만.”
남사스러우니까요. 작게 덧붙인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폐하가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이름은…….”
“프리아.”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프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깜박였다.
“프리아.”
목소리마저 다정하다니. 너무 거짓 같잖아. 프리아… 프리아… 프리아. 귓가에서 속삭이는 음성을 들으며 프리아가 눈을 감았다.
잠이 든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오웬이 고개 숙여 흰 이마 위로 깃털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을 보냈다. 유리창을 때리며 쏟아붓던 비가 잦아들고 밤을 지새우는 산새의 울음이 먼 곳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