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6)화 (27/237)

“그래서 폐하는 무사하시더냐!”

한밤중에 들이닥친 변고에 잠옷 바람으로 달려 나온 시종장이 손끝을 떨며 소리쳤다. 재정 대신의 생축연에 참석했던 황제가 환궁했다는 소식에 막 침상에서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황제를 수행했던 시종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와 황제가 머물렀던 별채에 침입자가 있었음을 고해 왔다.

한바탕 소동 이후, 침입자의 정체가 재정 대신의 막내아들인 루탄이 불러낸 남동이었음이 밝혀졌다. 늘 밀회를 나누던 약속 장소로 찾아간 남동이 약에 취해 황제를 루탄으로 오해하고 접근했고 깨어난 황제에게 제압당했다는 것이다. 평소 과하게 풍류를 즐기던 막내아들의 죄를 사죄하기 위해 재정 대신이 무릎을 꿇었다.

암살의 의도는 없었으나 황제의 옥체에 손을 대려한 죄는 크다. 호위병에게 끌려온 남동은 옥에 갇히고 루탄은 부친의 감시 아래 근신을 명받았다.

“예, 시종장님. 다만…….”

“어서 고하여라! 늙은이의 애간장을 끊어 놓을 셈이냐!”

“폐하께서는 매우 심기를 상하시어 본궁이 아닌 후궁전으로 납시었습니다.”

“후궁전으로 말이더냐?”

“예, 시종장님. 제비궁으로 드셨사옵니다.”

시종관의 말에 시종장이 장식장에 놓인 시계를 쳐다보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다. 다행히 옥체는 상하지 않으셨다고 하나, 우리 폐하께서 많이 놀라고 상처받으신 모양이다. 모쪼록 프리아 님께서 폐하를 잘 다독거려 주시기만을 바랄 뿐.

“이 늦은 시각에 통보 없이 침소를 찾는 것은 부부간에도 실례일 것이나, 현명하신 분이니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해 주실 것이야.”

‘사람 하나 죽일 기세였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시종관이 불안한 표정으로 후궁전으로 향하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리는 비에 황제가 젖지 않도록 방수 천을 펼쳐 들고 따라붙던 시종들을 사납게 밀쳐내고 빗속을 헤쳐 가던. 불쾌한 일을 당해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라고는 하나 그것은 도저히 아끼는 애첩을 만나러 가는 사내의 표정이 아니었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 하면 모를까.

‘괜찮겠지?’

목석같던 황제를 흠뻑 빠져들게 한 소문의 사내 후궁. 시종관은 애써 불안을 떨쳐내며 비에 젖어 차가워진 몸을 떨었다. 자신에게도 정인의 침상이 필요했다. 연인의 온기로 따스하게 데워진.

* * *

숲이다.

뿔피리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 말들의 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국의 겨울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사냥제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화살의 시위가 당겨지고, 떠난 활의 자취를 쫓아 발 빠른 개들이 앞다투어 달려 나갔다. 오웬이 화살통에서 두 번째 화살을 꺼내 들었다. 승마복을 차려입은 귀족 부인들이 과장된 음성으로 황손의 활 솜씨에 경탄했다.

사냥개가 몰아 온 사슴의 목덜미에 시종이 칼날을 갖다 대자 훅하고 끼쳐 오는 피 냄새에 후렴구처럼 여인들의 감탄사가 딸려 왔다. 시종들은 경쟁하듯 잡힌 동물의 목을 비틀고 사지를 해체해 수레에 담았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 있었다. 숲의 중반에 이르자 사냥에 몰입한 남자들은 제각기 사냥감을 쫓아 더 깊은 산중으로 흩어졌다. 오웬의 휘파람 소리에 하늘 높이 떠 있던 매가 날개를 퍼덕이며 되돌아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검은 말 위에 올라탄 황태자가 채찍을 휘두르며 정상으로 향하는 모습을 본 참이었다. 부친의 취미는 여우 사냥이었다. 말 등 가득 털 고운 여우들을 싣고 돌아오는 부친의 모습에 환호하던 때도 있었으나 한 번도 그 모피의 주인이 되어 보지는 못했다. 다른 이가 잡은 것은 싫다. 아버지가 잡은 붉은 여우 가죽이 꼭 갖고 싶다며 떼를 쓰던 오웬을 위해 첫 사냥에 나섰던 아서가 몸을 다쳐 가며 붉은 여우를 잡아 오기도 했다.

직접 사냥에 나서게 된 열두 살 이래 오웬은 한 번도 사냥감을 놓쳐 본 일이 없다. 컹컹 짖어 대는 소리와 함께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사냥개가 푸드덕거리는 꿩을 입에 물고 돌아왔다. 깃털이 화려하고 꼬리가 긴 수컷이었다. 사냥개가 물어 온 수꿩의 피에 젖은 목덜미를 오웬은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어미를 잃은 어린 짐승을 발견한 매가 날카로운 발톱 가득 움켜쥐고 돌아와 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 자작나무 사이로 붉은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이 깊은 산중까지 따라올 정도로 사냥에 흥미가 있는 여인이 있을 리 없다. 승마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은 모두 숲 초입에 설치한 천막 안에서 쉬고 있었다. 부친이 기어코 황궁 행사에까지 대동한 정부, 요난나다. 크르르 소리를 내며 위협하기 시작하는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오웬이 다시 말에 올랐다.

멀리 주홍빛을 띤 여우 한 마리가 숲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기고 팽팽하게 당겼다. 사내가 올라탄 백마의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가 있는 산 위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깊이에 비해 폭이 좁아 다 자란 말이라면 충분히 건너고도 남을 만한 거리였다. 연신 자신의 정부를 불러 대는 황태자의 재촉에 사내가 말을 몰아 벼랑 앞으로 향했다.

훌쩍 키가 자라 이제는 성년을 앞둔 오웬을 사내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마주칠 일도 없었다. 자랄수록 부친을 더욱 닮아 가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볼 때면 혐오스러워 구역질이 올라왔다. 피 끓는 나이. 육체의 성장에 따라 의지와 상관없이 수시로 끼치는 육욕에 그자처럼 아랫도리를 도려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늘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죽고 싶다면 그대로 죽으면 될 일이었다. 황태자를 따라 제국으로 오기 전에, 황태자비의 침실에 함께 들기 전에, 더러운 몸을 빌려 자신을 태어나게 하기 전에.

‘황손 말대로 정말 활을 잘 쏘더라. 하마터면 내가 탄 말을 쏘아 죽일 뻔했지 뭐야.’

아서 역시 저 사내를 죽이고 싶었을까.

사냥개에게 쫓긴 붉은 여우가 덤불에서 뛰쳐나와 벼랑으로 달려갔다. 한계까지 당겨진 오웬의 활시위가 버틸 힘을 잃고 화살을 제 품에서 떠나보냈다.

‘아직 사람을 죽이긴 모자란가. 황손 저하, 더 크면 날 해방시켜 주겠어?’

‘캥!’

짐승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감은 눈꺼풀 속에서 어지럽게 빛의 입자가 산란했다. 사방에서 짖어 대는 개 소리가 들려왔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환한 햇살 아래 화살을 맞은 여우가 벼랑 위에 쓰러져 있었다. 사내의 모습은 없었다. 백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건너간 것인가. 벼랑 끝까지 걸어간 오웬이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보던 그때.

꽃이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 붉은 옷자락이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욕지기가 섞인 기침과 함께 눈물과 콧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벌린 입으로 한꺼번에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통증이 폐로 느껴졌다. 숨이 부족해도 넘쳐도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한 프리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을 뭘로 보고!’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원망과 이유도 없이 공격당한 분노,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충격이 프리아를 부들부들 떨게 했다. 오후 내내 견제와 호기심으로 점철된 눈길을 한 몸에 받느라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죽을 판이었다. 연회에 간 황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오늘은 오지 않겠거니 안심하고 잠자리에 든 참이다.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오히려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다음에 또 보게 된다면 이름이라도 잊지 않게 기억해 두었다가 말을 건네야겠다 싶어 프리아는 다회에서 만난 후궁들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귀족 소녀 로제타, 적대감을 드러내 보이던 세 소녀, 라리사, 유스티나, 에머린. 의자 뒤로 몸을 숨기고 자신을 쳐다보던 가녀린 소녀 베카, 끝까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악센다르 공녀 레지나.

꼬마 공녀 로잔나와 마가렛을 더해 모두 여덟. 자신까지 합하면 공식적인 후궁의 숫자만 아홉이다. 사내인 자신을 빼고 아직 나이 어린 두 공녀를 제외한다고 해도 여섯. 젊고 건강하니 황제와 결합한다면 후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이도 많이 낳아 줄 것이다. 그뿐인가. 황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품에 뛰어들 여인이 궁 안팎으로 수백 명이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여기로 오는 거야. 프리아가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오더니 노크도 없이 벌컥, 침실의 문이 열렸다. 누구지? 인식을 하기도 전에 다가온 형체가 프리아의 몸 위로 제 몸을 눌러 왔다.

“폐하! 어맛!”

따라 들어왔던 수석 시녀가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쳐 침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폐하?”

하긴, 이런 야심한 시각에 쳐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이놈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폐하, 젖으셨습니다. 우선 물기라도 닦아 내심이─.”

흠뻑 젖은 몸이다. 어디 가서 무얼 하다 왔는지 비에 젖은 흙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옷차림으로 덮쳐 온 까닭에 프리아의 침의마저 젖어 가고 있었다. 겉옷을 벗기려는 프리아의 손을 제압한 오웬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좀, 벗고…….”

뒷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잔뜩 화가 나 있는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대처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오웬이 다시 프리아의 몸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흣!”

전에 없이, 오웬이 이를 세워 프리아의 목을 깨물었다.

‘이게 무슨…….’

손이 제압된 상태였기에 그저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아!”

들개라도 된 것처럼 이를 세워 물어 오는 통에 통증을 느낀 프리아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뱉었다. 소리를 들은 오웬이 잠시 동작을 멈췄다. 몸을 비틀어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오려 시도하던 프리아가 꿈쩍도 하지 않는 강한 어깨에 탄식을 토해 냈다. 들짐승인 양 거친 숨결이 오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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