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5)화 (26/237)

‘전하, 전하, 앗, 전… 하.’

‘이름을 불러 다오. 내 이름을 불러 다오.’

‘아으, ……하. 아, 아론. 아론 님.’

부친의 이름이었다. 짐승처럼 엉겨 붙은 두 사내의 실루엣이 뿌옇게 흐려지는 눈 속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깔려 있던 사내가 헐떡이며 황태자의 목덜미를 끌어안자 황태자가 웃으며 사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춥지 않느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토록 뜨겁게 저를 데워 주시는데요.’

‘등이 아프지 않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의 무릎이 상하셨을까 걱정될 뿐이지요.’

크게 소리 내어 웃은 부친이 밀착된 자세 그대로 사내의 몸을 일으켜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려놓았다. 놀란 오웬이 나무 뒤로 몸을 감추었다. 부친의 허리 위에 올라탄 사내가 이윽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교성을 질러 댔다.

오웬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저런 인간을 부친으로 둔 스스로가 비참하고, 그저 형이 가엾어 눈물이 흘렀다. 오웬이 그대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전하, 전하, 누굴 아끼시옵니까? 세상에서 누굴 가장 아끼시옵니까?’

‘너다, 요난나. 너뿐이다.’

‘누가 전하의 사람이옵니까?’

‘너다, 요난나. 너뿐이로구나.’

‘정녕이시옵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너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다른 무엇도 필요 없노라고.’

‘황태자의 지위도 버리시겠나이까?’

‘버리겠다.’

‘태자비도 버리시겠나이까?’

‘알고 있지 않느냐? 내 정인은 너뿐이니라.’

‘자식도 버리시겠나이까?’

‘버리겠다. 이미 버렸느니라. 애초 원한 적 없었으니.’

‘저 하나만 원하소서. 제가 유일한 전하의 정인이고 여인이고 자식이옵니다.’

‘네가 나의 아내고 자식일지니. 요난나……. 요난나.’

사내의 발등에 입 맞추며 황태자가 몸을 떨었다. 황태자를 끌어안은 사내가 나무 뒤를 돌아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제1황손의 승하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궁정인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묵념을 올렸다.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다시 궁 안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울림이었다. 절망 속에 피어난 꽃처럼, 아비 없이 태어난 아기의 서러운 울음이 주인 잃은 황자궁에 메아리쳤다.

장례식 날은 비가 내렸다.

행렬을 이탈해 모습을 감춘 황손을 찾느라 궁 안이 발칵 뒤집히고 있었다. 오웬은 삼일 낮, 삼일 밤을 먹지도, 자지도, 움직이지도 않아 시종장의 애를 태웠다.

침실 문을 닫아건 황손이 대답조차 하지 않자 황제가 찾아와 직접 문을 두드렸다. 이러다간 둘째 황손마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황제를 근심케 했다. 또 아이를 낳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다고 한 태자비의 말 또한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갓 태어난 증손자 또한 몸이 약해 후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구토를 마친 오웬이 몸을 일으켰다.

‘이것은 꿈이다.’

꿈이길 바랐다. 눈을 뜨면 언제나처럼 다정한 형이 피어난 수국을 보러 가자며 자신의 손을 잡아끌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눈 감으면 이리도 생생하게 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왜 저들은 자신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제1황손은 죽었다, 아서는 죽었어, 너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행렬에 선 모든 이가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그날 아서를 졸라 성터로 가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주의 깊게 행동했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먼 근원에까지 닿았다.

‘애초 원한 적 없었으니.’

얽혀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행렬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내달렸다. 눈에 띄는 건물로 무작정 뛰어 들어와 고개를 수그렸다. 먹은 것이 없어 쓴 위액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버려진 폐궁인 모양이었다. 지켜보는 이 없음에 안심한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왔다.

죽일 듯이 노려보며 밀쳐 내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내에게 속아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믿은 채 화풀이에 불과한 학대를 묵묵히 감당해 내던 시절이 있었다. 머리가 굵어짐에 따라 한낱 정부에 불과한 그의 신분으로는 형과 모친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도 없다는 걸 깨닫자 사내는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었다.

‘황태자 전하가 나는 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지만 말이야.’

들을 가치도 없다. 돌아서 걸어가는 오웬의 팔을 사내가 쫓아와 다시 잡았다.

‘제2황손 저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이지.’

사내가 뱀처럼 교활하게 속삭였다.

‘놓아라!’

뿌리치려 애를 썼지만 사내의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삼일 밤낮을 굶어 탈진한 몸에 기력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계집처럼 꾸미고 계집처럼 말을 하고 계집처럼 남자의 품에 안긴다 해도 사내는 사내라는 것을 오웬의 몸을 붙든 힘이 말해 주고 있었다.

‘많이 놀란 것 같던데. 우리 황손 저하는 색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모양이야?’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 색사가 그렇게 짐승처럼 역겨운 몸짓으로 이루어진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징그럽다는 시선으로 보지 마. 따지자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황손 저하도, 황손 저하가 그렇게 사랑하던 형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 아니겠어?’

‘어찌 비역질과 부부간의 일을 비교하느냐! 돌아가신 형님을 욕되게 하지 마!’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사내가 입술을 벌려 웃었다.

‘부부 관계라……. 황태자 전하는 여인 앞에서는 서질 못하시거든. 그 고귀한 물건을 누가 서게 할 수 있었겠어?’

오웬의 허리춤을 가리키며 사내가 키득거렸다.

‘따지자면 내가 황손 저하를 태어나게 한 은인인 셈이지. 감사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아.’

자신을 노려보는 오웬을 보며 사내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더러운 남창이라 하지. 하지만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스스로 원해 몸을 팔아 본 적 없었어. 좋았던 적도 없었어. 네 아버지와 몸을 섞으며 늘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뻐하며 허리를 흔들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거야? 자, 봐.’

오웬의 손을 끌어 사내가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뿌리치려 애쓰는 오웬의 손이 사내의 옷자락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다리 사이 분명 있어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내가 하의를 내려 불에 지져진 밑동을 내보였다.

‘네 아비는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갔다. 내 몸을 이렇게 만들고도 그자는 후계를 봐야 한다며 나를 태자비의 침실로 끌고 갔지. 평생 연인을 안을 수도, 아이를 만들 수도 없게 하고는 손발을 묶어 별궁에 가두고 수시로 몸을 강탈했어. 색사? 그건 고문일 뿐이야. 맹세코 단 한순간도 즐겁지도, 네 아비를 사랑하지도 않았어.’

이렇게 잔혹한 짓을 부친이 했단 말인가. 아니다. 네가 나쁜 것이다. 네가 부친을 유혹한 것이다. 천성이 음란하기 때문이다. 사내를 원하는 몸뚱이기 때문이다. 너만 없었다면 부친도─.

그렇게 부정하는 오웬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사내가 즐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아직 사람을 죽이기엔 모자란가. 황손 저하, 더 크면 날 해방시켜 주겠어?’

누군가 몸을 누르고 있다. 먼 기억 속 남아 있는 혐오스러운 감촉이 되살아나 순식간에 오웬의 정신을 깨어나게 했다.

“일어나셨네? 예사 분이 아니시라 그런지 통 반응도 없고, 고자인가 싶어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불분명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다, 금빛 머리칼을 한 사내.

“약이 너무 셌나? 꿈에서 뭘 봤기에 표정이 이래요? 나는 그거 처음 마셨을 때 뒤진 애비가 살아나서 또 때리려고 쫓아온다고 울고불고 개난리를 피웠지 뭐야.”

타인에 의해 반쯤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눈동자만 얼어붙은 황제를 향해 티티가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겁나게 고귀하신 분이라 그런가. 얌전하기만 하네, 재미없게. 이봐요, 정신 든 거 맞아요?”

티티가 손을 뻗어 황제의 뺨을 두드렸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제가 티티의 손을 밀쳐냈다. 강한 힘에 뒤로 밀려났던 티티가 난색을 표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생각하더니 한쪽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아무튼 폐하, 내가 좀 천박한 놈이라서 예는 잘 몰라.”

엉성하게 예의를 갖춘 티티가 다시금 황제 앞으로 다가왔다.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지도, 엄마를 찾으며 어린아이처럼 울지도 않으니 이것 참 곤란하다. 황제의 추태를 기대하며 벽 너머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망나니들에게 무언가 보여 주여야만 했다.

“무슨 꿈을 꾸셨는지는 몰라도 내가 잘 달래 드릴 수 있는데. 사내놈 엉덩이를 그렇게 좋아하신다면서요?”

하룻밤에 열 명도 넘게 태워 본 몸이다. 고고하던 귀족 도련님들도 자신과 잠자리를 가지고 나면 간도 빼 줄 듯 태도를 바꿔 매달려 왔다. 제 아무리 이쁘고 잘난 후궁이라도 밤 기술 면에서는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비역질하는 피 같은 게 있나? 황태자도 그렇게 남첩에 빠져 정신 못 차렸다더니. 아, 우리 아버진 안 그랬어요. 내가 유별난 거지. 난 타고났거든.”

그 방면으로는 빠지지 않는다 자부하는 티티가 황제의 고간으로 슬쩍 다시 손을 뻗었다. 여전히 잠잠하다. 이럴 수가 없는데. 미약이 받지 않는 체질인가.

“모르긴 몰라도 아랫도리 시중 하나는 내가 귀하신 후궁님보다 더…….”

이어 가던 말을 멈춘 티티가 미심쩍은 눈길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표정이 이상했다. 미약에 취해 몽롱한 눈빛도, 환각제가 불러낸 공포로 겁에 질려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살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간혹 악몽 속에서 제 안의 괴물을 마주하게 된 자들은 살인자가 되어 깨어난다고 들었다.

“……요난나.”

한참 동안을 티티만을 노려보고 있던 황제가 탄식하듯 말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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