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4)화 (25/237)

‘전하께서는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숨이 턱까지 차 달려온 오웬에게 시종관이 한 말이었다.

‘이 나라의 황손이 죽어 가고 있다. 한시가 급하거늘 아버지는 무얼 하고 계시단 말인가. 휴식이라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당장 비켜서지 못하겠느냐.’

분함을 이기지 못해 발까지 굴러 가며 호통치는 오웬을 시종관이 연민이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궁내에서 황태자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눈곱만 한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는 드물었다. 황태자의 모든 관심과 애정, 시선 한 조각까지도 모조리 집어삼키고 마는 탐욕스런 요물이 별궁을 지배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몽마夢魔에 단단히 씐 것이 분명하다. 요물의 현신이 황태자의 기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소문이 제국을 넘어 타국에까지 퍼졌다. 친자식이 위독함에도 불구하고 남첩과의 정사에 정신이 팔려 있는 황태자를 그 누가 아비이자 제국의 제왕 될 이라 부르겠는가. 시종관의 신분으로 황손을 제지할 수도, 제지하지 아니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시종이 난색을 표하며 황손을 돌려보내기 위해 애썼다.

‘황손 저하, 황태자 전하께는 소신이 말씀을 전해 드릴 것이니 외람된 말씀이오나 본궁에 돌아─.’

‘내 나이가 어리다 하여 네가 지금 황손을 능멸하려 드느냐.’

오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검을 뽑아 든 오웬이 검날을 시종의 턱 끝으로 겨눴다. 주춤 물러나는 시종을 밀쳐 내고 침실의 문을 급히 당겨 열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어지럽게 화려한 침실이다. 이국에서 가져왔을 것이 분명한 기이한 조각상과 동물들의 박제, 축제에서나 쓸 법한 가면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커다란 침상을 붉은 오키드가 담긴 화병들이 둘러싸고, 금실로 수를 놓은 다마스크 천개가 침대를 덮고 있었다. 잠시 노려보고 있던 오웬이 걸어가 붉은 천을 잡아 젖혔다. 장정 서넛이 누워도 거뜬할 만큼 넓은 침대. 그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있으나 마나 한 부친이었다. 부친 따위 앞으로도 평생 보지 않고 살아간대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아서가, 형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너에게는 내가 있고 나에게는 네가 있지 않느냐.’

그리 말해 주던 형이었다. 자신보다 더 큰 목소리로 부모 따위 필요하지 않다고 함께 외쳐 주던 형이었다. 오웬에게는 네 살 위의 형이 곧 부친이자 모친이었다. 동생이 부모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아서는 열과 성을 다해 오웬을 보살폈다.

그는 이제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터였다. 황손비의 회임을 그 누구보다 기뻐했음에도 조카가 태어나면 동생인 자신은 그 다음으로 밀려날 것이라며 섭섭함을 내비치는 오웬을 위해서 오랜만에, 어린 시절에 그리했듯 둘만의 비밀 장소를 찾아 버려진 성터로 들어선 길이었다.

비바람을 맞아 풍화되고 골조의 일부만 남아 있는 신전의 발견에 흥분한 오웬이 발밑의 허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구덩으로 미끄러졌다. 오웬의 팔을 잡은 아서가 동생을 끌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이 갑자기 내린 비로 지반이 약해져 있던 땅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함께 추락했으나 자신을 감싼 아서가 충격을 완화시켜 준 덕에 오웬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아야야.’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아서의 정강이에 부러진 철 조각이 박혀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각을 빼낸 뒤 피에 젖은 정강이를 찢어낸 천으로 동여매며 아서는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동생을 안심시켰다. 수색에 나선 사냥개가 바로 구덩이를 찾아낸 덕분에 형제는 어려움 없이 처소로 돌아왔다.

며칠 후, 피로를 호소하던 아서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의식을 되찾은 아서는 상처 부위에 극심한 통증이 있음을 궁정의에게 전했다. 아물어 가는 듯 보였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흐르고 고름이 생겨 악취마저 풍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턱이 마비되어 침을 흘리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황손비가 복통을 호소했다. 조산의 위험성을 경고한 궁정의가 황손비의 안정을 위해 환자와 격리시킬 것을 권고했다.

사지를 떨며 경련하는 아서의 피부를 찔러 피 색깔을 살피던 태의가 어두운 표정으로 진단을 내렸다. 불결한 환경에서 상처를 입은 것이 발병의 원인이라 했다. 오염된 상처 부위는 괴사할 것이며 그 독은 점점 퍼져 만약 살아난다 하더라도 영영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태의의 말을 들은 오웬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아서가 오웬을 손짓해 불렀다.

‘내가 걷지 못하게 된다면 네가 그 아이와 놀아 주겠니?’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탄신일에는 린드가르트와 춤을 춰 주겠어?’

그리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는다면……. 내 대신 그 아이……. 내 아이를 지켜 주겠어?’

그리할 것이라고, 죽어도 그리할 것이라고 오웬은 울면서 소리쳤다.

호흡 곤란에 시달리면서도 아서는 병문안을 온 친족들에게 애써 눈을 맞추고 안부를 물으면서 자신의 와병으로 인해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한 사죄의 말을 건넸다. 지혜롭고 영민하던 제1황손의 투병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궁정인 모두가 한마음으로 쾌유를 빌었다.

조부도 육중한 몸을 이끌고 찾아와 황손의 치료에 모든 힘을 다하라며 태의를 다그쳤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황태자에게는 애초부터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는 신체로 인해 자신의 치세가 끝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는 황제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손자 앞에서 자신의 수명을 헤아리며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아서의 시선이 방 이곳저곳으로 불안정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당분간만이야. 린드가르트의 상태가 안정되면 내가 당장 가서 데려올게.’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아서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련이 일어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간신히 미소 지으며 아서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제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뜨겁게 들끓던 열이 내리고 무서우리만큼 정신이 또렷해지고 있는 것을 아서는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열이 내리고 한기가 들기 시작한다면 곧 저를 부르십시오, 저하. 위험한 신호입니다. 때를 놓치면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회생할 가능성은 없다. 혹여 운이 좋아 산 채로 썩어 가는 육체를 몇 년간 더 유지시킬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영혼마저, 자기 자신마저 지금의 의지 그대로 지켜 나갈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젊고 건강한 친동생을 질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눈부시게 성장해 제국의 권좌를 이어받게 될 동생을 질시 없이,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볼 수 있을까. 악취를 풍기며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인 남편을 린드가르트는 언제까지 참아 줄 수 있을까. 그녀의 애정이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누릴 자격이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인가. 제 손으로 안아 줄 수도 없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줄 수도 없는 아비를 과연 아이는 사랑할 수 있을까.

오랜 투병으로 인해 외모는 물론 성품마저 망가져 버린 사람들을 누누이 봐 왔다. 고작 한 달간의 발병에 망가져 버린 육체였다. 정신은 언제까지 버텨 낼 수 있을까. 내리막길만이 남아 있었다.

떨리는 손을 다른 한 손으로 잡아 가며 아서는 빈 종이에 오랜 시간을 들여 문장을 썼다.

첫째, 제1황손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제2황손 오웬에게 양도한다.

둘째, 황손비 린드가르트를 폐하고 가문으로 돌려보낸다.

셋째, 황증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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