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3)화 (24/237)

제법 굵은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야외로 나갔던 손님들이 실내로 몰려 들어온 까닭에 연회장은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성황을 누리고 있었다. 익살스러운 광대들의 기상천외한 공연에 박수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넉넉히 준비된 요리와 음료,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오는 화려한 무대, 초청된 광대와 가수, 배우들의 공연 수준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행세 좀 하는 귀족 집안이라면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연회라 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행사에는 손님들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킬 희대의 볼거리가 하나 더 마련되어 있었다. 가장 안쪽에 마련된 연회의 상석에서 재정 대신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홍안의 청년에게로 호기심과 경탄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이 모여들었다.

사가에서 개최되는 생일 연회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재정 대신에 대한 황제의 신뢰가 두텁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영민한 황손 아서를 일찌감치 자신을 이어 갈 다음 대 황제로 눈여겨본 선황제는 중앙 관료이던 황손비의 부친을 재정 대신에 임명해 힘을 실어 주었다.

아서의 사망 후 실각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재정 대신은 황제가 바뀐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쉰의 생일을 맞은 그가 축하연을 연다는 소식에 황제가 참석 의사를 밝혔으나 정작 대신의 여식인 황손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업무의 연장처럼 중년의 남자와 젊은 황제가 무미건조한 대화를 이어 갔다.

휴식을 위해 설치된 간이 휴게실 안쪽에서는 형수와 눈이 맞은 황제가 제 형을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추문 또한 부채로 얼굴을 가린 입술 사이로 떠다니고 있었다.

선황제 시절에는 연회에서 황제의 눈에 든 젊은 여인이 정부가 되어 하루아침에 부와 권력을 손에 쥐는 일이 왕왕 있었으나 현 황제의 치하에서는 도통 그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못한 여인들은 한껏 차려입은 차림새를 젊은 황제 앞에 선보이기 위해 부나방처럼 단 주위로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서 샴페인 터트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졌다. 노래를 마친 가수가 손을 들어 관중의 환호성에 답했다. 이국의 옷을 걸친 무희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무대 위로 등장했다. 잠시 땀을 닦았던 연주자들이 이내 다음 곡을 연주하기 위해 서둘러 악보를 펼쳐 들었다.

“내 노래 어땠어? 야심 차게 준비한 신곡이었는데 말이야.”

일명 ‘티티’, 밤꾀꼬리라 불리는 금발 염색 머리의 청년이 남자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비벼 왔다. 공연을 마치기 무섭게 내실로 숨어든 청년의 엉덩이를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다른 남자가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최악이었어. 늘 그렇듯이 말이지.”

“네 노래는 딱 침실용이라서 다른 곳에서 듣기엔 적합하지 못하거든.”

마샬의 말을 거들며 루탄이 토라진 티티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하지 마아, 나 거기 약하단 말이야.” 몸을 배배 꼬며 교태를 부리던 청년이 루탄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청년의 손목을 붙들며 마샬이 짐짓 엄하게 말했다.

“지금은 안 된다고 했지.”

“칫, 지금 하고 싶단 말이야. 한 발 빼지 않으면 무대 위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오늘 밤 상대는 따로 있잖아. 아껴 두었다가 그 녀석을 흐물흐물 질척질척 녹여 주라고.”

“잘만 하면 후궁이 될지도 몰라, 티티.”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니까?”

“미친 놈 아냐? 누가 사내를 황후로 맞아?”

티티의 말이 웃겨 죽는다는 것처럼 술에 취한 여인이 깔깔거렸다. 다음 달 결혼을 앞둔 죽마고우의 약혼자였다. 친구 놈의 자랑과는 달리 이미 처녀가 아니었던 여인의 풍만한 육체를 루탄은 아낌없이 맛보았다. 그는 현숙한 황손비로 이름 높았던 누이 린드가르트, 능력을 인정받아 관료로 활약 중인 형 에릭과는 달리 악우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연회에는 얼굴도 보이지 말라는 부친의 말에 반항하듯 친구들을 불러 모은 루탄은 술과 약에 취해 자제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천하의 망나니 마샬이 부추겼다.

“그놈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고 싶지 않아?”

마샬이 주머니에서 꺼내 든 것은 일부 방탕한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환각제였다. 술에 넣어 마시거나 밀초에 넣어 굳힌 뒤 불을 붙여 연기 형태로 흡입했다. 그 상태로 잠자리에 들면 최악의 악몽을 꿀 수 있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꿈에 등장해 공포를 일으키는데 반수면 상태에서 체험하는 것이라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여 대는 것이다.

한 명씩 돌아가며 체험하고 나머지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즐기는 것이 최근 유행하는 놀이였다. 젊은 황제의 추태를 관람한 후, 그가 총애한다는 사내 후궁 대신 티티를 안겨 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은 마샬이 아닌 다른 친구가 내놓았다. 잘하면 신분 상승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유혹에 티티가 덥썩 미끼를 물었다.

오늘 밤 티티는 황제의 품 안에서 노래 부르게 될 것이었다. 수백 명을 녹여 낸 티티의 엉덩이로 함께 섞여 흐르게 될 고귀한 씨앗을 생각하며 사내들은 천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방 안 가득 비릿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퍼붓는 비에 발길이 묶인 손님들이 대저택의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침실을 배정받아 자러 간 사람들과 일찌감치 마차로 집에 돌아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밤샘 포커에 열을 올리거나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한데 얽혀 키득거리고 있었다.

밤이 깊도록 객실과 홀로 불려 다니는 통에 쉴 틈이 없었던 하녀 하나가 층계참에 서서 퉁퉁 부은 다리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길게 목을 빼 복도 안쪽을 힐끔거리는 하녀 아이를 중년의 하녀장이 제지했다. 별채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무장을 한 남자들이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황제가 잠든 침실을 수호하기 위해 궁으로부터 내려온 호위들이었다.

황제가 방에 든 이래 객실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시종관이 밀려오는 하품을 참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분위기에 취해 평소보다 많이 마셨던 탓일까, 아까부터 이상스레 호흡이 가쁘고 정신이 아득해져 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뗄 적마다 복도 끝에서 희미한 형체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헛깨비다, 헛깨비야. 시종관이 제 팔뚝을 꼬집으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벽에 걸린 등에서 불빛을 찾아 모여든 벌레들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타탁, 들려오고 있었다.

엄청나게도 피워 놨군.

발걸음을 들여놓자마자 끼치는 독한 향내에 티티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방금 루탄이 알려 준 비밀 통로를 통해 내실로 막 들어선 참이었다. 본래 화재를 대비해 설계된 비상 통로였으나 쓰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패거리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해 내 저희들 맘대로 이용해 왔다.

잠이 든 검은 머리의 청년에게선 불안한 호흡이 들려오고 있다. 협탁 위에서 비워진 물잔과 타고 남은 밀초를 발견한 티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환각과 최음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비약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 모양이었다. 하나만 취해도 몸이 배배 꼬일 강력한 약제를 둘이나 퍼부었으니 지금쯤 황제의 육체는 제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흥분되어 있을 것이다.

잘생겼는데? 내 취향이야.

땀으로 범벅이 된 황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티티가 소리 내어 웃었다. 후궁이니 황후니 하는 망나니의 헛소리에 못 이기는 척 합류했지만 정부가 되어 망할 귀족 놈들을 발아래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상대가 제국의 황제라면 훈장이 되었으면 되었지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은가?

창문을 열어 남아 있던 환각제의 기운을 몰아낸 뒤 벽을 두드렸다. 티티의 신호를 받은 남자들이 장식으로 위장된 벽의 구멍에 자신들의 눈을 맞췄다. 돈 주고도 못 볼 구경이 곧 펼쳐질 것이다.

천국을 보여 드리죠, 폐하.

아랫도리를 놀리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티티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이불을 젖히자마자 단단하게 긴장된 육체가 땀에 흠씬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코로 스며드는 땀내에 빠르게 하복부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경험상 지위가 높을수록 잠자리에서의 천박함 또한 그에 따라 비례했다. 지금 티티의 눈앞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것은 황제, 제국 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존재다. 땀에 젖은 옷자락 아래 감추고 있을 더러운 욕망을 기대하며, 티티가 잠든 황제의 몸 위로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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