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2)화 (23/237)

거침없는 유스티나의 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녀장이 냉정한 목소리로 소녀들에게 자리를 비킬 것을 재차 요구했다.

“유스티나 님, 말을 삼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천박한 단어를 입에 담으시다니요. 대공님께서 아신다면 무척이나 노여워하실 것입니다. 에머린 님,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보아하니 제가 드린 책을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불같은 성미를 지닌 흐라우드의 대공을 언급하는 시녀장의 발언에 유스티나가 입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를 쳐다본 에머린이 조소를 지으며 라리사에게 손짓했다.

“얼마나 대단한 남창이길래 자리를 비켜 줘야 한다는 거죠? 아직 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달랑 시종만 보냈잖아요.”

“프리아 님이십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 알훼니아의 공자님이시죠.”

소란이 일자 다회에 참석한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소문만 무성하던 사내 후궁의 행차에 누구랄 것도 없이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살롱을 가로질러 시녀장에게로 걸어오는 청년에게 집중되었다.

‘그 알훼니아 출신인…….’

‘저건 그냥 시종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백 년을 입어도 다 입지 못할 드레스와 보석을 내리셨다는데 왜 저런 차림을 하고 있지요?’

‘다회에 나타나다니 이렇게 뻔뻔스러울 데가.’

“로제타 님, 사내 후궁이 왔대요.”

의자 뒤로 몸을 숨긴 채 얼굴만 살짝 내민 베카가 로제타를 향해 속삭였다.

“베카 님, 왜 몸을 숨기시는 거죠?”

“로제타 님은 무섭지 않으세요? 사내 후궁은 마녀보다 요사하고 마귀처럼 간요奸妖해서 폐하의 영혼을 밤마다 몰래 빼먹는다고 들었어요.”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베카의 눈동자가 다시금 중앙으로 향했다.

“베카 님,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요?”

“린다가요. 알벳과 루리아도요.”

베카가 시녀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알벳과 루리아는 트루바니아와 비올레타 출신의 어린 공녀들을 담당하고 있는 젊은 시녀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아직 오지 않으셨네요.”

“레지나 님도 아직 오시지 않았어요.”

베카의 말에 로제타가 악센다르 출신 공녀의 퉁명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레지나는 올해 스물셋으로 사내 후궁을 제외하고는 후궁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런 그녀를 두고 시녀들은 악센다르의 대공이 꽃처럼 아름답다는 차녀 대신 노처녀를 코앞에 두고 있는 장녀를 치우듯 대신 보낸 것이라고 떠들어 댔다.

“레지나 님은 지난번에도 오시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베카 님, 그런 헛소문에는 신경 쓰실 필요가 없답니다. 프리아 님은 저도 뵌 적이 있는데 그런 짓을 하실 분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는걸요.”

“만나셨어요? 언제요? 어디서요?”

로제타의 발언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베카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우연한 만남의 경위를 로제타가 털어놓는 동안 라리사들이 상석에서 물러났다.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소파 위로 억지로 앉혀진 사내 후궁이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아직 아이 티가 묻어나는 베카를 향해 로제타가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꽤 재미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어색하다. 불편하다. 썰렁하다. 자리도 너무 많이 남는다. 쳐다본다. 노려본다. 모두 이쪽을 보고 있어.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은 대쪽 같은 원칙주의자 시녀장에 의해 강제로 상석에 앉혀진 프리아였다. 애먼 여자아이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게 될 줄 알았다면 아무리 유디스가 흥겨워했어도 이런 자리에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수군거리기만 할 뿐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가장 가까이 위치한 세 소녀들에게 눈인사를 건네 보았으나 흥 하는 콧바람 소리와 함께 야멸찬 외면만 돌아왔을 뿐이다. 뭐, 자리를 빼앗겼으니 당연한가? 다과를 가지러 간 유디스가 돌아올 때까지는 홀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무안한 마음에 애꿎은 소파의 보푸라기만 잡아 뜯고 있던 순간이었다. 프리아의 귓가로 반가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

“프리아 님!”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엿한 후궁의 신분이기에 한껏 멋을 내어 차려입은 꼬마 공녀님들의 등장이었다. 토실토실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하는 로잔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프리아가 두 팔을 벌렸다. 망설임 없이 달려가 서슴없이 사내 후궁의 품에 안기는 두 공녀의 모습에 살롱에 모인 인원 전부가 경악했다.

그중에서도 재미없는 다회에는 가지 않겠다며 떼를 쓰던 어린 공녀들을 달래어 데려오느라 합류가 늦었던 알벳과 루리아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품에 달라붙은 자신들의 꼬맹이 상전들을 떼어 놓기 위해 그녀들마저 달려들자 소란은 극에 달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우레와도 같은 시녀장의 일갈에 알벳과 루리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자신들이 잡아 댄 낯선 사내가 후궁이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근래 들어 꼬맹이 둘이 싸우지도 않고 잘 어울려 다닌다고만 생각했는데 사내 후궁과 어울려 놀고 있었을 줄이야.

“억울하옵니다, 시녀장님. 로잔나 님은 저분이 제비궁 주인이신 줄도 모르고 계셨다지 않습니까?”

“마가렛 님과 로잔나 님도 모르고 계셨던 사실을 저희가 어찌 알 수 있었겠사옵니까?”

친구인 알벳의 말을 거들며 루리아가 뒤늦게 나타난 유디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유디스 님은 전부터 알고 계셨다면서 어째서 저희들에게 언질해 주시지 않으셨던 건가요?”

자신을 걸고 늘어지는 알벳의 말에 유디스가 기가 차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이보세요! 님들이 보모 노릇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동안 두 공녀님들의 간식은 누가 챙겨 줬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욧!

“어찌 이리 미덥지 못하단 말이냐. 자칫하면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었거늘!”

좋게 본다면 후궁들 간의 훈훈한 교류일 것이나 꼬투리를 잡고자 한다면 사내 후궁이 나이 어린 후궁을 꼬여 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시녀장의 근심은 컸다.

“이 일이 폐하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세 분 모두 위험해지실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그리 생각들이 짧은 게야.”

알벳과 루리아가 똘똘 뭉쳐 공격하는 통에 할 말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려 있던 유디스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십니다.”

지금 뭐라 했누? 시녀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세요. 보고 가셨거든요.”

프리아 님이랑 꼬맹이 공녀님들이 노시는 거요. 보셨어요, 다.

“그것이 사실이냐! 거짓을 고한다면 크게 경을 치르게 될 것이야.”

“거짓이 아닙니다. 얼마 전 폐하께서 후원에 납시어 프리아 님과 공녀님들을 보고 가셨습니다.”

그게 정말이니. 이번엔 알벳과 루리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폐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느냐?”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프리아 님께서는 늘 저렇게 웃으시냐고. 그 말씀만 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프리아 님께 정한 곳의 물을 떠 드리라고 하셨어요.”

뭐여, 그게.

어머, 닭살.

폐하, 닭살.

“프리아 님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단 말이더냐.”

“예.”

하긴, 아무리 남녀 사이라고는 하나 저건 아무리 봐도 삼촌과 조카, 큰오빠와 막냇동생, 젊은 아빠와 딸. 성적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이좋게 모여 앉아 디저트를 먹고 있는 프리아와 꼬맹이들을 바라보며 시녀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로잔나, 맛있니?”

“웅.”

로잔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아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것을 그랬다.

“마가렛, 더 먹을래?”

“아, 아니요.”

마가렛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왕자님이, 왕자님도! 자신과 같은 후궁이었다니. 왕자님인 동시에 후궁일 수 있는가. 그것도 마귀나 다름없다는 제비궁의 주인일 줄이야. 폐하를 버리고 왕자님을 택할 마음의 준비를 이제야 마쳤는데 앞서 왕자님을 차지한 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버리려고 결심한 지아비가 연적이 되어 나타나다니. 이 무슨 금단의 곱빼기 같은 운명이란 말인가.

“프리아 님.”

“응?”

“운명의 여신은 정말 심술쟁이인 것 같아요.”

“응?”

“하지만 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 더 줄까?”

“조금만요.”

공녀들에게 케이크를 덜어 주는 프리아의 손길에 후궁들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늘씬한 몸매, 우아한 동작,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이 끝내준다.

수수한 옷을 입고 있어도, 아니 수수한 옷 덕분에 결코 수수하지 않은 외모가 더욱 눈에 띄었다. 같은 후궁이 아니라 연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가슴 설레며 연심을 품고도 남을 엄청난 미남자였다. 황제의 아내가 되기 위해 먼 길을 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었는데, 매일 밤 찾아간다는 후궁이 저렇게 젊고 잘생긴 사내였을 줄이야. 뛰어난 황제의 심미안에 동의하면서도 그녀들은 들러리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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