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21)화 (22/237)

“정말 그러고 가실 작정이세요?”

입을 잔뜩 내민 유디스가 프리아의 뒤에서 또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몇 걸음 나서기도 전에 멈춘 걸음에 프리아가 쯧쯧 혀를 차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회에 가는 건데 요란하게 차려입고 갈 필요가 있어?”

“다른 공녀님들은 모두 예쁘게 꾸미고 오실 거란 말이에요. 프리아 님께서 그러고 나타나신 걸 보면 모두 뒤에서 한마디씩 할 텐데.”

“어차피 한두 마디는 들을 각오로 가는 거니까. 걱정되면 유디스는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그럴 순 없어요. 프리아 님을 보필하는 건 제 의무이자 권리라고요. 가발을 쓰시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옷만이라도 바꿔 입으시면 안 돼요?”

“싫어.”

딱 잘라 대답한 프리아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궁의 계단을 내려갔다. 제비궁의 주인, 프리아가 입고 있는 것은 남성용 외출복이었다. 짙은 색의 재킷과 바지가 늘씬한 몸체와 어울렸지만 어디로 보나 후궁의 옷차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껏 멋을 낸 귀족 남성의 복식이라고 하기에는 원단이 평범하고 디자인이 소박해 하급 관리로 오해받을 소지 또한 다분했다.

“그러고 가시면 시종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시킬지도 모른다니까요.”

“귀하신 분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차 한 잔 정도는 따라 드릴 수 있지. 유디스, 질투 안 할 거지?”

정말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 프리아의 능청에 유디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정말 프리아 님 때문에 못 살아요!”

햇빛 가리개를 치켜든 유디스가 종종걸음으로 프리아의 뒤를 따라갔다.

후궁전 부지 중앙에 위치해 일명 중앙궁이라 불리는 이 별궁은 후궁들 간의 교류를 독려하기 위해 선대 황제가 즉위 초기에 지은 것이었다. 건축 목적과는 달리 어느새 중앙궁이 부와 권력, 미모, 황제의 총애를 겨루는 콜로세움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서로가 연적인 후궁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는 후궁전의 특성상 당연한 결과였다. 각 공국에서 보내온 아홉 명의 후궁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차출된 미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중앙궁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유디스와 실랑이하느라 예정된 다회 시작 시간을 조금 넘겨 도착한 프리아는 살롱으로 이어지는 계단 위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제부터 후궁들과 그 시녀들의 숫자를 합해 스무 명이 넘는 여인들의 무리 속에 혈혈단신, 아니 유디스와 둘이서 몸을 던질 예정이었다.

살롱 안에 모인 후궁들은 각 공국을 대표하는 사절이자 밀정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동료이자 연적이었다. 황제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다른 후궁들과는 달리 매일 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알려진 프리아는 그녀들에게 있어 이미 공공의 적이요,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까짓것, 부딪쳐 보자.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들이다. 제아무리 미워한다고 해 봤자 대화에 끼워 주지 않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프리아가 살롱의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출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프리아에게로 쏟아졌으나 곧 다시 머물던 자리로 돌아갔다. 찻잔 위로 홍차를 내리는 소리, 과자를 베어 무는 바삭 하는 소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카드 게임에 열중한 소녀들에게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우와! 나 방금 완벽하게 무시당했어. 유디스, 봤어?”

뭐가 그리 신기한지 눈동자를 반짝이는 한심한 상전을 향해 유디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시라면 무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건 그냥 심부름 온 시종을 향한 당연한 반응이라고요. 살롱이 하도 넓어서 앉아 계신 자리에서는 프리아 님의 얼굴은커녕 옷차림이나 겨우 보였을걸요? 공녀님들 모두 프리아 님을 몰라봤다는 것에 제 어머니의 명예를 걸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중앙궁을 관리하는 시녀장인 모드가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와 코끝 안경을 밀어 올렸다.

“무슨 일이냐. 공녀님들이 계신 귀한 자리다. 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아래층 시녀들에게 고했어도 되는 것을.”

보기 드문 미모야. 심부름꾼으로 두기엔 아까운 얼굴이군. 후궁 감별사 25년 외길을 걸어온 시녀장이 날카로운 눈매를 빛냈다. 눈만 깜박이고 있는 미청년 대신 그 뒤에 서 있던 시녀 아이를 발견한 시녀장이 알은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비궁 아이로군. 주인께서는 오늘도 몸이 좋지 않으시더냐?”

“오늘은 함께 자리하셨습니다. 제비궁 주인이십니다.”

공손한 동작으로 미청년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시종장의 미간이 모였다.

“방금 뭐라고 했더냐? 제비궁 주인께서…….”

오셨다고? 그럼 이 시종 아이가, 이 예쁜 사내가, 아니 이분이 바로 프리아 님이란 말이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시녀장이 말까지 더듬으며 자세를 낮췄다.

“감, 감히 자리하신 줄도 모르고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상석을 곧 비우겠습니다.”

어째서 미리 기별해 주지 않았느냐? 넌 무엇을 하는 계집이기에 주인을 저리 허술한 차림으로 나서시게 해? 직무 태만이 아니더냐. 속사포처럼 귀엣말을 건네며 걸음의 속도를 높인 시녀장이 유디스를 꾸짖었다.

본래 후작 부인으로 황녀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궁에 입성했던 시녀장은 뛰어난 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선대 황제 시절부터 잦았던 후궁전의 분쟁을 중재해 오고 있었다. 일찍이 귀족 소녀들을 위한 교양 지침서를 써 스테디셀러에까지 올려놓았던 시녀장의 명성은 제국은 물론 각 공국에까지 퍼져 있었다.

“그것이, 프리아 님께서 극구 고집하시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느냐? 그간 그렇게 보고도 몰라? 가뜩이나 주목을 받고 계신 분을. 옷차림 하나로 입방아에 올라 괜한 말을 들으시게 하다니.”

“프리아 님께 다시 말씀 여쭐까요?”

“어쩔 수 없구나. 이왕 벌어진 일. 너는 주인 곁에 꼭 붙어 있어라.”

질책을 마친 시녀장이 살롱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소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폭이 넓은 드레스 자락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도록 팔걸이를 퇴화시킨 의자 위에는 자원이 풍부한 광산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공국 중 가장 자금력이 높다고 하는 모스라티아 출신의 공녀 라리사가 디저트로 나온 푸딩의 탄력 있는 속살을 짓이기고 있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양장본을 건성으로 넘기며 셋이 앉아도 거뜬히 넓은 소파를 혼자 차지하고 앉은 열여덟의 소녀가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소유한 힐데린 태생의 공녀 에머린이었다. 다음으로 아홉 개의 공국과 제국을 축소해 그려 낸 카드 게임 지도 위로 연신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소녀가 난공불락의 요새, 험난한 산세로 유명한 공국 흐라우드 출신의 유스티나였다.

열일곱 동갑내기인 유스티나와 라리사는 에머린의 뒤를 이어 살롱 서열 이인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항상 고고한 척하는 아스문드 공녀 로제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녀들의 질시에는 아스문드 공국이 일찍이 제국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로제타가 가장 상품上品의 후궁전인 장미궁을 처소로 받았다는 것 또한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석 시녀로 로제타를 따라온 사촌 리엔 역시 세 공국은 먼 옛적 아스문드의 가신이었다가 배신하여 독립한 근본 없는 것들이라며 가까이하지 말 것을 권했다. 리엔이 유독 싫어한 것은 계집도 아닌 주제에 뻔뻔하게 후궁으로 들어온 사내 후궁이었지만 그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탓에 애꿎은 제비궁 시녀 아이만 리엔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한참 동안 체스 말의 이동 위치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베카가 고개를 들어 뒤쪽을 응시했다. 가장 작은 영토를 지닌 알젠토 출신의 공녀 베카는 라리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벽에 붙은 구석 자리를 택했다. 몸이 약한 탓에 체구가 가녀려 실제 나이인 열다섯보다 더 어려 보이는 베카는 어른스럽고 차분한 로제타를 친언니처럼 따르고 있었다.

“로제타 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베카의 말에 로제타 또한 몸을 돌려 중앙을 바라보았다. 요란해 보일 정도로 화려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겹겹이 걸친 라리사가 시녀장에게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에머린이 들고 있던 책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숙녀를 위한 에티켓』. 시녀장이 쓴 책 중의 한 권이었다.

“프리아 님께서 오셨으니 자리를 비켜 드려야 합니다. 이 자리가 가장 상석이니 내어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 남창이 여길 왔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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