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아와 유디스를 내려놓은 마차가 본궁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프리아에게 유디스의 투정 섞인 잔소리가 들려왔다.
“걸어가시려면 꽤 먼데 굳이 이곳에서 내려 달라 말씀하실 건 뭐예요. 등잡이 시종도 물리시고, 날도 어두워져 가는데 무섭지 않으세요?”
“멀어 봤자 후궁전 안이지. 아직 훤한걸, 뭐.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저녁 먹은 게 아무래도 얹힐 것 같거든.”
가슴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프리아가 엄살을 부렸다. 식사를 마친 황제가 먼저 자리를 뜨자 표정이 밝아진 프리아와 달리 유디스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간 밀린 업무가 많으니 이해해 주십사 부탁하는 시종장의 표정에도 아쉬움이 엿보였으나 수석 시녀 유디스의 실망에는 비할 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무룩한 유디스의 얼굴을 내려다본 프리아가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무서우면 손 잡아 줄까?”
무섭다, 정말. 프리아 님의 저 해맑음, 유유자적한 낙관이.
“전 정말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뭐가 문제였을까.”
“원래도 아름다우시지만 오늘은 정말 눈부시게! 압도적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계신단 말이에요.”
“원하는 거 말하라고 해서 말을 했을 뿐인데.”
“사람이 이 이상 어떻게 더 예뻐질 수 있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의 프리아 님은 어제보다 더 아름다우시거든요?”
“그게 그렇게 어렵나?”
“어렵죠.”
“어렵구나.”
각자의 고민에 잠긴 프리아와 유디스가 이해할 수 없는 인물, 황제를 다시금 떠올렸다.
“앓고 일어나신 직후라 피곤하셨던 걸까요?”
“그래도 그렇지. 기껏 간호해 준 사람한테 태도가 그게 뭐야. 자기가 물어 놓고는 왜 화를 내?”
“폐하가 화를 내셨다고요?”
금시초문. 눈을 크게 뜬 유디스가 프리아에게 달려들듯 다가섰다.
“아니 왜요?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씀이라도 하신 거예요?”
“나는 그냥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해서 말한 죄밖에 없어.”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다 하셨었어요? 그래서 프리아 님은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냥 장서관 드나들게 해 달라고. 그 말밖에 안 했는데. 아, 그렇지. 유디스, 이제부터 혼자 책 빌리러 가지 않아도 돼. 출입을 허락받긴 했거든.”
출입은 허한다. 단 다음에 마주할 때까지는 제대로 된 청원을 생각해 놓도록 해.
불온한 심리를 고스란히 내보이며 식사를 마친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뱉은 말이었다. 만찬이 밤 시중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던 터였다. 시종관을 호출한 황제가 프리아를 처소까지 데려다줄 것을 명했다.
“장서관이요? 폐하께서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고작 그런 청원을 하셨단 말씀이세요?”
“딱히 필요한 것도 없고. 그동안 유디스도 책 심부름 하느라 피곤했었잖아. 내가 직접 가면 네 수고도 덜 수 있으니 좋지 않아?”
“필요한 게 왜 없어요! 사비나 컬렉션의 신작이라든가! 신작이라든가! 신작이라든가!”
“유디스, 새 옷 갖고 싶었구나? 아까 말하지 그랬어. 내가 그 정도 사 줄 능력은 되는데.”
그 옷 한 벌 사면 저희 궁 이달 예산 바닥납니다. 뭘 알고나 하시는 말씀이신지. 불만으로 볼을 부풀린 유디스가 툴툴거렸다.
“하다못해 시녀라도 몇 명 더 내려 달라고 하셨어야죠. 이참에 궁을 옮겨 달라고 하셨어도 되고요. 어디 그런 기회가 흔한 줄 아세요?”
“일손이 부족해? 그러면 내가 돕지, 뭐.”
“그런 게 아니고요. 어엿한 궁의 주인이신데 저만 달고 다니시면 위신이 살지 않으신달까. 다들 서너 명씩 거느리고 다니신단 말이에요. 저 빼고 다들 그만두신 거 소문이 다 나기도 했고.”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를 도맡아 하는 중년 시녀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후궁의 일상을 함께하며 말 상대 겸 놀이 상대, 치장 어드바이스 및 연애 코치를 주 업무로 하는 고급 시녀는 유디스밖에 남지 않았다.
“남들이 봤을 때, 우와! 저분이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궁 후궁님이시구나!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해야지요. 뭔가 그럴듯한 것을 하사받았다고 하면 소문도 나고 좋잖아요. 저도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지고. 아무튼 프리아 님은 본인이 어떤 위치에 계시는지 좀 깨달으실 필요가 있어요.”
흥분해 말을 이어 가던 유디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아스문드 공녀의 처소, 장미궁의 코앞까지 걸어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장미궁인 줄 모를까 봐 궁 앞의 뜰은 온통 붉은색과 흰색의 장미로 뒤덮여 있었다. 코를 찌르는 장미 향기에 프리아의 발걸음도 멈췄다. 불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저녁노을이 저택의 배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끌리듯 다가선 프리아의 어깨를 유디스가 잡아끌었다.
“어서 가요. 괜히 건드렸다가 동티 나요. 아스문드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시지 않는 편이…….”
장미 나무 사이로 드러난 검은 머리 소녀의 모습에 유디스가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아가씨, 날이 어둡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뒤이어 나타난 노부인이 소녀의 어깨에 숄을 걸쳐 주다 철책 앞에 선 프리아와 유디스의 모습에 흐린 눈을 치켜떴다.
“괜찮아, 유모. 아직 더운걸.”
서쪽 지방 특유의 명료한 악센트, 붉은 기가 섞인 검은 머리카락에 선명한 초록색 눈. 틀림없이 다회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아스문드 출신의 공녀 로제타였다. 공국에서 함께 왔다던 유모와 수석 시녀가 늘 수호하듯 공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서 예를 차리지 않고 무엇 하는가.’
노부인의 엄한 눈매가 유디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기세에 밀릴 뻔한 유디스였으나 곧 자신이 모시고 있는 상전의 지위가 공녀보다 높다는 것을 깨닫고 보란 듯 고개를 더욱 높이 치켜들었다. 웃기시네. 인사는 그쪽이 먼저 해야 한다고.
꽃 향만이 더욱 진해지고 있던 그때, 공녀가 걸어와 자세를 숙였다. 공국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아스문드, 그 안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적녀다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인사였다. 황제의 관심이 사내 후궁에게로 집중된 이후에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황후 후보로 손꼽히고 있는 로제타, 그런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프리아도 답했다.
“아스문드의 딸 로제타, 제비궁 주인께 인사를 올립니다.”
“프리아입니다. 알훼니아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인사하기엔 상당히 민망한 신분과 차림새였다. 이 밤이 지나면 사내 후궁이 황제를 유혹하기 위해 공작새처럼 요란하게 꾸미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끝을 흐리는 프리아의 태도에도 기분 상한 내색 하나 없이 공녀가 예의 바른 말투로 대화를 이어 갔다.
“첫눈에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무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듣던 대로 무척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궁 안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 아뇨. 로제타 님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우십니다.”
프리아가 어색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에 만발한 장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미가 참 탐스럽게 피었군요. 궁 이름에 걸맞은 장관입니다.”
“받아 주신다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리엔!”
소녀가 정원 안쪽을 향해 호명하자 키가 큰 젊은 여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나타난 수석 시녀의 모습에 유디스의 표정이 떫은 과일을 씹듯 찌푸려졌다.
‘프리아 님! 저 여자예요.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 좀 보세요.’
“리엔, 프리아 님께 꽃을 드려.”
소녀의 지시를 받은 수석 시녀가 다른 시녀를 불러 가위를 가져올 것을 명했다. 시녀의 명을 받은 시녀가 자신보다 더 서열이 낮은 시녀에게로 지시를 전달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 귀족 가문이라더니 명령을 내리는 일에도 엄격한 서열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동료라고 해야 할지, 연적이라고 해야 할지. 다른 궁의 주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나 어린 공녀들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사랑받는 남첩으로 소문났으나 실상은 그 반대인 허울뿐인 후궁 프리아, 후궁이라기보다는 철모르는 어린애에 가까운 두 공녀들과 다르게 눈앞의 검은 머리 소녀는 ‘진짜’ 후궁이었다.
수려한 외모는 물론이오, 성숙한 자태에 품격을 갖췄으며 야무지고 영민하기로 이름나 있어 일찌감치 황후 후보로 주목받아 왔다. 아스문드 역시 제국의 가장 강력한 우방국으로 건국 초기부터 깊은 교분을 쌓아 왔으며, 강한 군사력에 더해 안정된 재정을 유지하고 있어 황후의 모국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하면서도 프리아는 그녀의 외견과 태도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비록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처럼 후궁에 걸맞은, 정당한 이들의 자리를 엉뚱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부채감을 느끼기도 했다. 뼛속까지 귀족 소녀 로제타가 우아한 태도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간 다회에서 뵐 수 없어 몸이 안 좋으신 것은 아닌지 근심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소녀의 마음이 놓입니다.”
“괜히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로제타 님의 염려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라 자주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자주는 무슨,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자리다. 관심도 없거니와 불청객처럼 끼어들고 싶지 않아 늘 유디스를 대신 내보냈는데 황제와의 교합 이후로는 쪽팔려서라도 더더욱 나갈 수 없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마침 다음 주에 중앙궁에서 다회가 예정되어 있는데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
장미 다발을 건네받은 프리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모습을 보였으니 더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도 써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회에 나가겠다는 프리아의 대답에 유디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뭘 입혀 드리지? 신발은? 장신구는? 부채는?’ 드레스 룸을 채운 무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비하며 유디스가 손에 든 꽃다발을 흥에 겨운 듯 빙빙 돌렸다.
“또 꾀병을 부릴 수도 없고 난감하네. 유디스, 다회에선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야?”
“차도 마시고 케이크도 먹고요. 카드놀이도 하고 최신 유행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누가 누구랑 사귄다든지 혼약을 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하지요.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르는 건 폐하에 대한 거예요.”
“폐하?”
“오늘 어디에 가셨다더라, 누구를 만나셨더라, 그런 공식적 일정 얘기요. 또 폐하가 좋아하시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많으세요. 음식 취향이라든가, 좋아하시는 색,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시는지. 폐하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 하신답니다.”
“인기 많구나.”
“당연하죠! 폐하 한 분만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 위해 모인 분들이시잖아요. 모두 폐하를 마음속 깊이 연모하고 계신답니다.”
“마가렛과 로잔나도 그럴까?”
“꼬맹이 공녀님들이야 지금은 폐하보다 간식과 놀이를 더 좋아하시겠지만 철이 들면 분명 폐하를 사모하게 될 거예요. 공녀님들뿐만이 아니에요. 제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폐하를 믿고 따르고 존경하고 있어요.”
그렇게 사모하는 여인들이 많은데 왜 하필 자신을 택한 것일까. 애정이 피어날 리 없는 관계. 후계를 낳지도 못하는 사내 후궁을 총애한다는 불명예를 왜 고집해 나가는 걸까. 프리아는 작은 방에 누워 홀로 앓고 있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디스.”
“네, 프리아 님.”
“제대로 된 청원이란 게 뭘까?”
“장서관 출입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요.”
“유디스가 나라면 무얼 내려 달라고 했겠어?”
“저라면 말이죠.”
돈? 명예? 권력? 머리를 굴려 가며 고민하던 유디스가 상기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제국의 모든 이를 제 발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거예요!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아요?”
“유디스 야망이 그렇게 큰 줄 몰랐네.”
“그냥 해 보는 소리고요. 저라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내려 달라고 했을 거예요.”
“다이아몬드?”
“로망이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목에 걸고 나가서 자랑할 거예요, 저는. 아쉽다. 프리아 님이 다회에 하고 가셨으면 모두들 코가 납작해졌을 텐데. 부러워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걸요? 물론 지금도 부러워서 다들 어쩔 줄 모르고 계시긴 하지만요.”
제대로 된 청원이라……. 고민 중인 프리아의 뒤를 저녁달이 따라왔다.
“프리아 님! 다회에는 정말정말정말 화려하고 예쁘게 꾸미고 가요! 날이 밝는 대로 재단사부터 불러야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길 위로 유디스의 들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