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 뭘 그렇게 음흉하게 지켜보는 건가?
귓전에서 들려온 속삭임에 시종장이 기절할 듯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고! 바이런 님! 쇤네의 심장이 멎어 버릴 뻔하지 않았습니까?”
“뭘 보는 건데?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있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는 바이런의 덜미를 붙잡은 시종장이 소리 죽여 속삭였다.
“폐하와 프리아 님께서 함께하시는 만찬입니다. 방해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럼 저기 있는 게 제비궁 주인이야? 나 가까이 가서 좀 보고 올게.”
“안 됩니다! 눈치도 없이 어딜 끼어드시려고 그러세요.”
은발이 성성한 시종장이 있는 힘껏 바이런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궁중 시녀들의 인기를 황제와 함께 양분하고 있는 바이런이었다. 외모, 체격, 성품, 혈통 뭘로 따져도 우리 폐하가 바이런의 수십 배는 월등하다고 믿고 있는 시종장이었으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얻어진, 여인네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능수능란한 연애 스킬에는 불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낸 여인이라고는 형수 하나인 우리 폐하와 낮술 마시면 제 어미도 몰라보고 유혹한다는 망나니 도련님과는 경험치 면에서 도저히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리 판단한 시종장이 온 힘을 다해 바이런을 잡아당겼다.
“저 음식들은 다 뭐야? 할배, 사람 차별하네? 나한테는 저런 거 안 차려 주고선! 나 저기 낄래. 포크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 거잖아? 음식 놓고 깨작거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저거 봐. 다 남을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방 안으로 난입할 기세인 바이런을 문가에서 떼어 놓느라 힘을 소진한 시종장이 숨을 헐떡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이고오, 바이런 님. 제가 언제 차별했다고 그러십니까아? 마음만 먹으면 매 끼니마다 더 잘 차려 드실 수 있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섭섭하네. 아무리 후궁이라지만 사촌 형한테 소개도 못 시켜 주나?”
바이런 님은 그냥 사촌이 아니라 짐승이시잖아요. 프리아 님 놀라십니다. 지난밤 이미 만나 통성명까지 한 사이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시종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웬일로 같이 저녁을 다 먹어?”
“보기 좋지 않습니까?”
훗훗. 제 솜씹니다. 황제 부부의 오붓한 시간 만들어 주느라 고생한 시종장이 뿌듯해하며 콧수염을 매만졌다.
“사이가 벌써 저렇게 좋아진 거야?”
“앞으로 더욱, 더더욱 좋아질 겁니다.”
“저 성질에 식탁 엎지 않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나 본데?”
항간에 퍼진 소문과는 달리 사촌 동생과 사내 후궁의 사이가 다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바이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우리 폐하가 어디 그런 난폭한 행동을 하실 분인가요? 다정하고 마음 여리셔서 개미 한 마리 쉽게 죽이시지 못하는 분 아닙니까?”
“할배는 좀 저 녀석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
“미화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갓난쟁이 시절부터 지켜봐 온 저입니다. 우리 폐하의 성품은 제가 잘 알지요. 제 가족 끔찍이 아끼고 아랫사람 살뜰히 챙기시는 분 아닙니까? 책임감도 강하셔서 한번 제 사람이라 여기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보살펴 주시는 분입니다.”
책임감이 강한 건 맞다. 자기 가족 끔찍이 아끼는 것도 맞다. 다만 그 애착이 지나쳐 본인을 외골수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죽은 형에 대한 그리움은 형수와 조카에 대한 지나친 보호로 이어졌고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책망하며 삶의 기쁨으로부터 본인을 격리시키는 금욕적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 제비궁 주인은 ‘제 사람’ 범위에 들어간 거야, 못 들어간 거야?”
바이런의 질문에 시종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프리아 님께서 밤새 폐하를 간호해 드렸다. 그러니 큰 상을 내려 주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에 어떠한 태도를 보이셨던가. 대답은 아니 하셨지만, 귀찮다는 듯 두 눈을 꼭 감고 계셨지만 아마도…….
“이미 들어가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공녀님들의 처우 또한 세심하게 신경 써 주고 계시니까요. 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들이니 부족함 없이 모시라 하셨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폐하에게 시집을 와 주신 귀하신 분들이 아닙니까? 그중에서도 프리아 님은 각별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신궁 후궁의 자리에 오르셨으니까요.”
“유일하게 살을 맞댄 사이긴 하지.”
바이런의 입에서 나온 적나라한 단어에 시종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점도 있기는 하지만 폐하와 프리아 님 사이에는 무언가 특별한 교류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특별한 교류라니?”
“글쎄요. 말로는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어디까지나 늙은이의 연륜에서 비롯된 감 같은 것이니까요.”
“뭐, 할배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문틈 사이로 다시 얼굴을 집어넣은 바이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가 먼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곱게 차려입은 실루엣만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드레스를 입었군. 그렇지 않아도 사내 후궁은 무얼 입고 밤 시중을 드는 걸까 궁금하던 차였다. 여인의 복식을 한 사내의 옷을 하나씩 벗긴다? 꽤 구미가 동하는 상상이었다. 새로운 놀이에 눈을 뜬 바이런이 짓궂게 미소 지었다.
“장서관 출입을 허락해 달라?”
“예, 폐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을 벗어난 후궁의 청원에 오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어째서지?”
왜냐고 묻는 오웬의 질문에 프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왜냐니? 당연히 책을 읽고 싶어서 그러지.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겠다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들어주면 안 돼?
“장서관의 책을 읽기 위함입니다, 폐하. 지금까지는 시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만 윤허해 주신다면 제 손으로 직접 책을 살펴 고르고 싶습니다.”
“다른 청은……. 다른 요구 사항은 없는가?”
“없습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도움을 받았으니 이번 한 번만은 사내의 요구를, 그 어떤 사치스러운 요구라 할지라도 들어줄 마음을 먹고 있던 오웬이었다. 장서관 출입이라니. 소원이라 할 것도, 청원이라 할 것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이 진정 내게 청원하고 싶던 일이었단 말인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쏘아보는 오웬의 눈빛을 사내의 맑은 눈이 투명하게 받아들였다.
“예, 폐하…….”
안 되나? 역시 안 되는 일이었나? 몇 번이나 되묻는 오웬의 태도에 불안감을 느낀 프리아가 대답하는 말끝을 자신 없게 늘어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더는 자신에게 손대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하고 싶었으나 기각이 예상됐다. 고르고 골라 이 정도면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 싶어 내밀었던 카드인데 이 정도로 승낙이 어려울 줄은 몰랐다. 저 표정 좀 보라지. 뭐가 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누가 보면 크게 땅이라도 떼어 달라고 한 줄 알겠어.
차라리 크게 땅이라도 떼어 달라고 했다면 오히려 흔쾌히 승낙했을지도 모른다. 기껏 사람이, 그것도 보통 사람도 아닌 황제가 무엇이든 내려 주겠다는데 요구하는 것이 고작 장서관 출입? 건국 이래 황제에게 이런 청원을 한 후궁은 없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한 나라를 가져다 안겨 줄 수도 있는 것이 황제이거늘. 호의를 거절당한 남자의 못난 분노,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 상태로 오웬의 심기가 뒤틀렸다.
“엿듣는 건 무리인가. 멀어서 잘 안 들리는군. 할배는 걱정 안 돼? 우리 꼰대는 저 녀석 저러다 영영 후계자 못 낳는 거 아니냐고 걱정이 태산이던데.”
“아직 젊지 않으십니까? 육체 강건하시니 언젠가 소식이 있겠지요.”
“제비궁 주인하고만 놀면 애가 생길 리가 없잖아.”
우리 폐하의 아이라니. 얼마나 예쁘고 귀여울까? 황자님도 좋고 황녀님도 좋다. 고 앙증맞은 입으로 ‘시종장 할부지!’라고 부른다면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몰라. 망상에 빠진 시종장의 어깨를 바이런이 흔들었다.
“할배, 그렇지 않아도 나 할배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구경하느라 깜박하고 있었지 뭐야.”
“무얼 물어보시려는지요, 바이런 님?”
“할배라면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소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소상히 고하겠사옵니다.”
“기르라고, 이름이 기르라고 하는 자인데 혹시 알고 있어?”
예? 바이런 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요? 충격으로 떨리는 시종장의 얼굴을 바이런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기.르. 기르라는 이름을 가진 궁정인이야. 궁정인이라면 할배가 다 꿰고 있잖아?”
“지금 기르라고! 기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름으로 인해 늘 반쯤 덮여 있던 시종장의 눈이 등잔만큼이나 크게 뜨였다.
“역시 할배는 아는구나! 제비궁 소속 맞지? 어젯밤에 만났거든.”
“어디서 보셨습니까! 옥체는! 어디 상하신 곳은 없으셨습니까?”
“지붕 위에서 봤는데. 넘어져서 두어 번 구르긴 했지만 아마도 크게 다치진 않았을 거야. 내가 몸 바쳐 보호해 주었거든.”
“아이고오! 연세가 몇인데 아직도 그러고 노신답니까! 우리 나이에 뼈가 부러지면 여간해서는 잘 낫지도 않는다구요.”
“연세라니? 나이가 몇인데?”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는데. 동안이었나 보군. 실례한 모양이야. 간밤에 만났던 정령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며 바이런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보다 두 살 위셨으니 올해 예순다섯이실 겁니다.”
“할배, 아직 60대였어? 70이 다 된 줄 알았는데. 아니, 이게 아니라 할배 대체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난 기르의 나이를 묻고 있는 거라니까?”
“황실 살림하느라 늙었습니다욧!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며 황손 저하분들을 누가 키워 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그래. 수고 많았어, 할배. 그래서 대체 기르는 몇 살이라는 거야?”
“예순다섯쯤 되셨을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엄연히 친척 어르신인데 아랫사람 대하듯 이름을 부르는 건 예가 아니지요. 폐하의 종조부이시니 바이런 님하고는 …….”
어디 보자, 외사촌의 아버지의 당숙이면 뭐라고 부르셔야 하더라. 손가락을 접어 가며 황실 가계도를 헤아리고 있는 시종장의 손목을 바이런이 붙들었다.
“할배, 혹시 치매 왔어? 오웬이 혹사시켜서 그래? 은퇴하고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바이런 님, 은퇴라니요! 이 몸이 죽는 날까지 은퇴란 없습니다. 아이고, 금세 까먹었네. 그러니까 기르 저하와 …….”
“아니, 알훼니아인이 어떻게 내 친척 어르신이 되냐고? 다른 사람 착각한 거 아니야?”
“알훼니아인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기르 저하는 틀림없는 제국 태생이십니다. 그것도 황가의 종친 어르신인데요.”
서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 확신한 바이런이 확인을 위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내가 말하는 기르는 알훼니아 출신의 제비궁 주치의고 어마어마한 미인이야. 사람이 아닌 줄 알았지 뭐야.”
“제가 말씀드리는 기르 저하는 승하하신 선대 폐하의 아우이십니다. 미인이라고는…….”
그냥 사내답게 잘생기셨다고만 말씀드리지요.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시종장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노인이 되셨겠네요. 그때가 언제더라……. 30년쯤 되었을까요? 실험하신답시고 새로 지은 별궁의 지붕을 날려 버리시더니 그대로 토끼셨습니다. 후에 화가 풀리신 폐하께서, 그러니까 선대 폐하께서 몰수했던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멀리 동쪽으로 가셨다는 말도 있고, 서쪽으로 가셨다는 말도 있고 소문만 무성했지요.”
그 땅문서를 지금까지 제가 보관하고 있는데 돌려 드릴 길이 요원하네요. 늘 사고만 치시는 저하셨지만 이제는 그립기도 하네요. 죽기 전에 한 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살아 계신다면 말이지요.
“아무래도 할배가 말하는 기르 저하와 나의 기르와는 연관이 없는 것 같아. 그렇지?”
“그새 또 반하셨습니까? 기르 저하가 아닌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중년을 넘어 노년에까지 손을 뻗으신 줄 알았지 뭡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만큼 경로사상 투철한 젊은이가 어디 있다고. 노년이라니 그쪽은 아직 미지의 세계란 말이야. 억울한 오해를 받은 바이런이 툴툴대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나저나 프리아 님께서 주치의까지 데려오신 줄은 몰랐네요. 언제 한번 인사라도 드려야겠습니다. 손님 맞을 생각에 머릿속이 다시 분주해진 시종장의 어깨를 바이런이 주물렀다. 할배! 나 부르는 거다? 그때 나 꼭 부르는 거야? 꼭? 꼭? 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