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8)화 (19/237)

프리아의 입에서 나온 요난나란 단어에 시녀들의 손까지 멈췄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백작 부인이 요란스럽게 부채를 부치며 시선을 회피했다.

“무슨 말씀이실까? 잘못 들으신 모양이에요.”

“조금 전에 요난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제가요? 설마요? 오호호호호호.”

과장된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더욱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부인들 중 나이로 보나 작위로 보나 리더 격인 공작 부인이 수습을 위해 나섰다.

“프리아 님께서는 폐하의 부친 되시는 전 황태자 전하에 대해 들으신 바가 있으신지요?”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요?”

“예, 프리아 님. 백작 부인이 입에 담으신 분은 전 황태자 전하의 애첩 되셨던 분이랍니다. 사냥 중 낙마 사고로 돌아가셨지요. 너무 애통해하신 나머지 황태자 전하께서 따라 목숨을 끊으신 탓에 선대 폐하께서는 격노하시며 그 이름조차 입에 담지 말라 하셨습니다.”

황제의 첫사랑이라도 되는가 싶어 짓궂은 호기심을 발휘했던 프리아가 예상치 못한 비극적 스토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프리아 님께서도 그 이름은 입에 담지 않도록 주의하셨으면 합니다. 하물며 폐하 앞에서는 더욱, 말이지요.”

저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요난나라고 하는 애첩은 황제의 아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대역 죄인이라 할 수 있다. 그 탄식 같은 울림은 자신의 아비를 빼앗은 자에 대한 원망을 담은 것이었을까.

생각에 잠긴 프리아의 표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백작 부인과 후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 다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애썼다.

“귀걸이가 맞춘 듯이 잘 어울리십니다. 남주석이 아무리 곱다 한들 프리아 님의 눈동자 색에 비할까요.”

“어쩜 이렇게 살결이 고우실까. 폐하의 심미안에 감탄을 표합니다.”

“마치 이 드레스를 입기 위해 태어나신 것 같사와요, 오호호호.”

실상 사내인 프리아에게 있어서는 조롱 같은 찬사였으나 부인들은 간만에 찾아온 대박 물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여색을 밝혀 후궁은 물론이거니와 하룻밤 여인들에게까지 값비싼 보석과 드레스를 내리던 선황제 때와 비교하여 지금의 황실 납품 시장은 반의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유일한 궁 안의 레이디였던 린드가르트 황손비는 치장을 거부하고 유폐를 자청했으며 연이은 국상으로 인해 연회도 열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황제의 새 후궁들밖에 없었다. 신규 고객층의 유입으로 일순 부활한 것처럼 보이던 패션 업계는 곧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공국의 공녀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열어 보였으나 정작 그 아리따운 모습을 봐줄 님이 요지부동 그녀들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유행은 총비에게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총비는커녕 황제의 눈길을 수 초만이라도 사로잡은 이가 없다고 하니 누가 제국의 유행을 주도하고 누가 그 많은 드레스와 보석들을 사 주겠는가.

오랜 기다림 끝에 나타난 총비 후보의 등장에 장인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사내’라는 사소한 결점이 있긴 하나 전 황태자의 애첩이었던 요난나만큼의 미모만 갖춰 준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황제의 금고만 열어 줄 수만 있다면 계집이든 사내든, 젊든 어리든 혹은 늙든 상관이 없었다.

“귀족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랍니다. 의무와도 같아요.”

“암요,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고, 상업이 발달해야 제국 경제가 튼튼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저희가 저희 한 가문 잘되고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프리아 님이 오늘 걸치신 것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으로부터 구원받을지 감히 짐작도 못 하실 거예요.”

“입고 걸치시는 그 모든 것들이 유행될 것이랍니다. 영양들이 앞다투어 프리아 님의 스타일을 따라 하게 될 거예요.”

“궁극적으로 일자리 창출, 빈민 구제, 제국의 안녕과 평안까지 도모할 수 있답니다.”

결론적으로 황제에게 다 사 달라고 해라라고 요약될 수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강의였다. 어느 순간 세뇌되어 황제에게 옷 사 달라, 보석 사 달라 조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프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귀족 부인들이란 모름지기 시종장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사기성이 농후한 집단이었다.

* * *

폐하, ……드셨사옵니다.

긴 식탁의 안쪽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오웬이 시종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집중하느라 호명된 손님의 이름은 미처 듣지 못했다. 소연회장에 만찬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에 사절단 혹은 친족과의 저녁 약속이 잡혀 있는 것이리라 여겼다. 흥취를 돋우기 위해 조도를 낮춘 실내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실루엣이 촛대 불빛 사이로 흔들리며 다가와 오웬의 맞은편 의자에 자리 잡았다.

여인은 풍성한 긴 금발 머리를 반은 땋아 올리고 반은 풀어 어깨 위로 늘어뜨렸으며 흰 피부 톤이 돋보이는 연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레이디의 정체를 알아차린 오웬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궁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내 분명 씻겨서 보내라고…….”

예, 폐하. 씻.겨.서 보내 드렸습죠. 흡족한 표정을 한 시종장이 소연회장 입구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시종장이 받아들인 의미를 짐작한 오웬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내 후궁과 만찬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계절 과일을 시작으로 빵과 고기, 스튜와 파이가 식탁 위로 놓였다. 청포도와 복숭아, 버찌가 담긴 바구니가 구운 닭요리와 양념 송아지 찜, 비둘기와 자고새 구이 사이로 놓였으며 훈제 돼지고기가 얹힌 접시에는 삶은 아티초크와 시금치, 완두콩, 당근이 곁들여졌다. 바다가 먼 이유에서인지 해산물의 숫자는 적었으며 민물고기인 송어와 잉어찜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파이는 갓 완성되어 따끈한 김을 내뿜고 있었고 끓인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가 듬뿍 뿌려졌다. 다음으로 달걀과 설탕, 우유를 아낌없이 사용한 케이크와 푸딩까지 더해지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어제까지 앓아누웠던 사람이 이런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 거야?’

맞은편에 앉은 오웬을 슬쩍 쳐다보았던 프리아가 질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오웬의 기세에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림새가 부끄럽고 민망하다. 사내로 태어나 이게 무슨 짓인지. 이런 광대 짓도 모자라 새 옷을 사 달라고 애교를 부리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자존심이 있지. 부인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꾸미는 대로 몸을 내어 주기는 했지만 이런 촌극은 앞으로 사양할 작정이었다.

“왜 먹지 않지? 입맛에 맞지 않다면 다른 걸 준비시키겠다.”

인형처럼 치장한 사내 후궁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식탁 아래로 내리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고기를 썰기 시작하는 사내 후궁의 손가락 사이에서 새파란 보석이 빛을 냈다. 사파이어, 형과 함께 골랐던 린드가르트의 약혼 예물 중 하나였다. 이젠 더는 볼 수 없게 된 그녀의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오웬이 씁쓸히 잔을 들었다.

“……폐하.”

“고하라.”

시선조차 주지 않는 황제를 곁눈질하며 프리아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제 막 회복하신 직후가 아닙니까? 술은 삼가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황제가 앓아눕건 쓰러지건 간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기껏 지붕까지 올라가 마리포사를 따 왔던 자신의 노력이 퇴색되는 것 같아 프리아가 소심하게 제동을 걸었다.

“지난밤.”

기어코 비워 낸 잔을 내려놓으며 오웬이 뒷말을 이었다.

“너의 도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오웬의 시선이 프리아의 어깨로 향했다.

“옷이든.”

내려간다. 손등 위로 멈춘다.

“보석이든.”

다시 위로 올라온 시선이 맞부딪쳐 왔다.

“재물이든 원하는 만큼 내려 주겠다.”

분명 공작 부인네들이 말했던 후궁으로서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 하지만 프리아에게는 그저 ‘후궁’이라는 스스로의 우스꽝스러운 위치를 다시금 상기시켜 줄 뿐인 순간이었다. 저 젊은 황제는 진정으로 자신이 값비싼 보석과 화려한 옷가지들을 탐할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사내 후궁의 침묵을 그저 어떤 것을 요구할지, 얼마나 요구할지, 바삐 가늠해 보는 것이라 여긴 오웬이 무심하게 과일이 담긴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저는…….”

복숭아를 손에 든 오웬이 한입 깨물어 살집에 상처를 냈다.

“저는…….”

수밀도水蜜桃의 즙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의식중에 핥아 내는 오웬의 붉은 혀를 바라본 프리아가 지난밤의 접문을 떠올렸다. 진정 무섭게 달려들던 입술이었다.

“한 가지, 폐하께 청원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