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요, 곧 프리아 님의 처소가 될 거랍니다. 폐하의 처소가 곧 프리아 님의 처소이고, 프리아 님의 처소가 곧 폐하의 처소 아니겠습니까?”
헉, 언제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시종장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프리아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만면에 웃음을 띤 시종장이 깍듯이 문안 인사를 올린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프리아 님. 간밤은 평안하셨는지요?”
한밤중에 불러내 억지 간호를 시킨 사람치고는 참 뻔뻔한 인사였다. 기가 막힌 프리아가 뚱한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프리아 님의 보살핌 덕분에 폐하의 상태가 몰라보게 좋아졌답니다. 아침 일찍 기상하시어 업무에 복귀하셨지요. 지금은 벌써 오후 정무에 들어가 계십니다.”
시계가 벌써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날 저녁을 먹은 이래 내내 공복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자 새삼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프리아의 배 속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에 입술 끝을 끌어 올린 시종장이 몇 발짝 물러나며 뒤를 가리켜 보였다.
“우선 간단하게 요기하시고 저녁 만찬에 드시지요.”
내실 안쪽으로 유려한 다리 곡선을 자랑하는 테이블이 놓였고 그 위엔 간단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스프와 흰 빵, 그리고 오믈렛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차림이었다. 따뜻한 스프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금세 몸이 따뜻해졌다.
남쪽에 위치한 알훼니아와는 다르게 대륙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제국은 장기간 이어지는 혹한의 겨울과, 꽃들이 서둘러 피고 지는 짧은 여름을 지니고 있었다. 봄을 한참 넘겼음에도 녹지 않던 후원의 눈을 떠올리며 프리아는 흰 빵을 뜯어 수프 위로 띄웠다.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죠. 시종장 할아버지.”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프리아 님. 저는 프리아 님의 아랫사람입니다.”
시종장의 주름진 얼굴을 보니 차마 하대가 나오지 않았다. 귀족 신분이었으나 방치돼 엄격한 신분 교육을 받지 않고 자라난 탓일까, 나이 많은 하인들을 코끝으로 부리는 일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제가 일어나기 전에도 다녀가셨던가요?”
“예, 프리아 님. 곤하게 주무시고 계셔서 일부러 깨워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제가 저기에서, 그러니까 폐하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나요? 누운 기억이 없는데, 혹 시종장 님께서 옮겨 주신 건 아닌가 해서요.”
“프리아 님의 옥체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분, 황제 폐하뿐이십니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옮겨 주신 것이 아닐까요?”
설마요. 불신 가득한 프리아의 얼굴이 시종장을 향했다.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폐하께서는 참으로 다정하신 분이랍니다.”
퍽이나.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프리아가 입술을 불만스럽게 내밀었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프리아 님. 빈 잔에 차를 따르며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아 님! 무사하셨군요!”
이제나 저제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디스가 반색하며 프리아를 향해 달려왔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정말이지 전 너무 걱정이 되어서 한숨도 못 잤답니다.”
“이 입가의 침은 뭐야, 유디스? 여기 뺨에 눌린 자국도 있는데?”
자신에게로 반겨 든 시녀의 볼을 잡아 늘리며 농을 하는 사내 후궁의 격의 없는 모습을 한 무리의 귀족 부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쩜 차림새가 저게 다 뭐랍니까?’
‘아무래도 가발을 써야겠지요? 머리가 이리 짧으실 줄이야.’
‘살결이 고와서 백분을 쓸 필요도 없겠어요. 비결이 뭔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눈요기하듯 바라보던 부인들이 시종장에게 소개를 요구하는 헛기침을 날렸다.
“프리아 님, 트리다 공작 부인, 마르시아 후작 부인, 루리아 백작 부인 드셨사옵니다.”
시종장의 호명에 따라 우아한 손동작으로 드레스 자락을 모아 쥔 부인들이 한 명씩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보석의 감정가를 매기듯 진지하게 전신을 훑어보는 중년 부인들의 기세에 압도된 프리아가 당황하며 따라 몸을 낮췄다.
“설마! 설마! 설마! 사비나 컬렉션의 후원자이신 그 트리다 공작 부인이 맞으세요?”
여인들의 이름을 듣자마자 흥분한 유디스가 부인들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를 알고 있느냐?”
“그럼요! 그럼요! 지난 시즌의 레드 벨벳 드레스는 완전 센세이션을 일으켰는걸요! 그 대담한 디자인! 농후한 컬러! 옆에 계신 분은 열두 꼬임 땋은 머리를 유행시킨 마르시아 후작 부인! 제 앞에 계신 이분은 나무딸기 연지 신드롬을 일으키신 루리아 백작 부인? 꺄아아악! 저 완전 팬이에요!”
사모하던 극단 가수라도 만난 소녀처럼 흥분해 날뛰는 유디스와 간격을 벌린 프리아가 시종장에게 설명을 촉구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입니까, 할아버지?
“프리아 님의 몸단장을 도와주실 분들입니다. 워낙 바쁘신 분들이라 어렵게 모셔 왔지요.”
내년 봄 연회 일정까지 꽉 차 있는 분들이거든요, 홋홋.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시종장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전 유디스로 충분한걸요. 바쁘신 분들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진심으로 돕고 싶네요.”
단장이라는 단어에서 불길함을 느낀 프리아가 뒷걸음쳤다. 아뿔싸, 진퇴양난. 어느새 소집된 시녀 군단이 프리아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시종장 님, 목욕물 준비가 되었습니다.”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극진히 모셔라. 만찬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도록 하고.”
“예, 시종장 님.”
“유디스! 유디스!”
베테랑 시녀들에게 포위되어 애처롭게 자신을 부르는 상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유디스가 뺨에 홍조를 띄웠다. 살아 있는 연회의 전설, 제국의 패션을 선도하는 트리다 공작 부인을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장신구의 거성 마르시아 후작 부인과 화장계의 신성인 루리아 백작 부인까지 함께 말이다. 이분들에게 친히 가르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후궁의 신분을 뛰어넘어 프리아 님을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자신감이 유디스에게 솟아올랐다.
총애하는 후궁들을 불러 모아 혼욕을 즐기던 선황제의 악취미 덕에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욕탕에서 꽃잎 찜질을 당하고 나온 프리아가 침대 위로 늘어졌다. 그런 프리아의 곁에서 부채질하며 유디스가 눈을 빛냈다.
“프리아 님, 후작 부인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프리아 님에게 딱 어울리는 남주석藍柱石 귀걸이가 막 오늘 아침 공방에서 완성되었다지 뭐예요. 그걸 다른 부인들에게 선보이시려고 가져오던 중에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거예요. 어쩜 신기하기도 해라. 이래서 모든 물건엔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하나 봐요.”
“이런 사내 귀에 꽂게 하려고 고생해서 만든 건 아닐 거 아냐.”
“무슨 말씀이세요.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할걸요? 그리고 올여름 유행색 말인데요. 다른 공녀님들은 벌써 서너 벌씩 이미 다 맞춰 놓으셨다고 하더라구요.”
“너도 한 벌 지어 입어, 유디스.”
“저 말고 프리아 님이요. 한 다섯 벌쯤 맞춰 달라고 할까요?”
“다섯 벌씩이나?”
“프리아 님 체면이 있잖아요.”
“내 체면은 조금 전에 다 씻겨 내려간 것 같다.”
아주머니들, 무서웠어……. 몸서리를 치던 프리아가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갓 목욕을 마쳐 발그레해진 피부가 타월에 감싸인 모습이 유디스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치장이고 뭐고 이대로 폐하께 보내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 문이 열리며 부인들이 장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당대 최고의 의상과 장신구 그리고 화장 도구가 내실 가득 펼쳐졌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시녀 아이와 달리 시큰둥한 표정을 한 프리아로 인해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디자이너가 보란 듯 더욱 화려한 의상을 꺼내 들었다.
“악센다르산 최고급 실크를 아낌없이 사용한 작품입니다. 저희 컬렉션 중 가장 고가의 아이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요?”
“…….”
가지고 온 의상도 슬슬 바닥이 나고 있다. 이쯤에서 결정을 해 주지 않으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총애받는 후궁의 몸단장을 부탁한다기에 선약도 취소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더니 이건 뭐 상전이 따로 없다. 이렇게도 반응이 없을 줄이야.
수십 벌이 지나가도록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옆에 앉은 시녀 아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얼굴만 반반하면 단가. 아주 그냥 홀딱 벗겨 보내 버리고 싶네.
프리아는 프리아대로 죽을 맛이었다. 옷을 고르는 데만 반나절, 입히는 데 또 반나절. 어차피 황제의 눈엔 이 옷이나 저 옷이나 똑같아 보일 것을 뭘 이리 골라 대는가.
지금 눈앞에서 펄럭대고 있는 드레스만 해도 그렇다. 장식된 레이스가 조금 다를 뿐인데 대하 서사시와도 같은 벅찬 설명이 따라붙는다. 드레스가 정해져야 머리 모양을 정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장신구와 화장법까지 달라진다는데 그냥 후딱 아무거나 입어 버리고 싶다. 아무래도 좋다. 다 좋다, 다 예쁘다, 예쁩니다.
‘유디스, 아직 결정 못 했어?’
‘다들 하나같이 예뻐서 고를 수가 없어요. 저 많은 아이들 중 어떻게 하나만 고르나요. 잔인해요.’
‘제일 입기 편하고 벗기 편한 걸로 골라.’
‘전 못 고르겠어요. 이건 고문이에요.’
고문은 내가 당하고 있잖니. 아무거나 빨리 찍어.
그렇겐 못 해요오.
“처음부터 다시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빛내며 유디스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 프리아가 소파를 박차고 나와 장인의 손에서 드레스를 빼앗아 들었다.
“이거 좋네요,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새벽의 찬가? 오후의 속삭임? 아, 파랑새의 귀환. 좋습니다. 이걸로 하죠.”
간신히 정해진 드레스에 공작 부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후작 부인과 백작 부인의 표정이 화색으로 바뀐다.
“프리아 님의 안목이 참으로 높으십니다. 여간해서는 소화하기 힘든 색상인데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세요.”
“피부 톤이 워낙에 고우시니까요. 오호호호.”
“그간 궁에 안주인이 계시지 않아 어찌나 분위기가 어둡고 칙칙하던지요. 다음 연회는 정말이지 기대가 큽니다. 다시금 밝은 머리 색 가발이 유행할 거예요.”
“요난나 님 이후로 말이죠? 오호호호.”
어멋, 백작 부인. 아부에 열중하느라 그만 금기의 단어를 입에 담고 만 백작 부인의 옆구리를 후작 부인이 찔러 댔다. 수십 개나 되는 싸개 단추를 채우느라 시녀들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던 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 이름이었던가. 지난밤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였다. 요난나.
“누구예요?”
“예?”
“요난나란 사람, 누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