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6)화 (17/237)

전에 없이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오웬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고 있었다. 며칠을 앓아누워 흠뻑 땀을 흘려 낸 육체가 믿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머리를 짓누르던 두통과 불유쾌하게 느껴지던 열도 간데없이 사라졌다.

오늘이 며칠이던가. 몸져누운 며칠간 정무가 많이 밀려 있을 것이었다. 바이런과 시종장이 그간 방패막이 되어 주었을 것이나 중요한 일은 오웬의 손으로 직접 처리할 수밖에 없다.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이건 뭐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오웬이 자신의 발치에 엎드려 있는 형체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시종장이 아니다. 바이런인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오웬이 누워 있는 곳은 공식적인 황제의 침실이 아니었다. 몇 대 전의 황제가 암살을 대비해 만들어 놓은 대피소에 불과한 협소한 공간이었다.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호화로운 침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오웬은 즉위 전부터 쓰고 있던 가구를 옮겨 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웬과 시종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매일 밤 오웬은 황제의 침실로 알려진 곳으로 걸어 들어가 몇 개의 내실을 거쳐 이 작은 처소에 도달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화려한 침실로 돌아가 시종들의 시중을 받았다. 사촌인 바이런조차 이 방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누워 있다 한들 설사 천하의 명의라도 함부로 들여보낼 시종장이 아니었다.

‘금발이라…….’

엎드린 채로 팔에 고개를 묻고 있는 사내는 금빛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여인도 아닌 사내의 금발. 오웬이 알기로는 궁내에서 그런 머리카락을 지닌 이는 단 한 명, 건방진 자신의 사내 후궁뿐이었다.

‘시종장이 쓸데없는 짓을 했군.’

간호라도 시킨 건가? 저런 놈에게?

잠든 사내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내키지 않는 억지 간호 놀음에 어울려 줘야 했을 후궁의 부루퉁한 표정을 떠올린 오웬이 코웃음을 쳤다. 침대맡에 얼굴을 묻고 잠에 곯아떨어진 모습이 꽤 그럴싸해 보인다. 평소 같았다면 바로 일으켜 세워 후궁전으로 돌려보냈겠지만 오늘 아침의 오웬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기에 이 좋은 아침을 사내 후궁과의 언쟁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시종장에게 처리하라고 해야겠군.’

관용을 베풀어 후궁의 무례를 눈감아 주기로 결심한 오웬이 사내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빈 대야와 수건이 후궁의 발치에 놓여 있다. 긴 밤 내내 잠든 자신의 머리맡을 지킨 것인가. 진정 사랑받는 후궁처럼?

의문에 답하듯 불안정하게 걸쳐 있던 사내의 상반신이 떨어질 듯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몸을 조금이라도 뒤척인다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내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시 후, 조금만 더 관용을 베풀기로 마음먹은 오웬이 후궁에게로 다가섰다.

‘이 꼴은 뭐지?’

가까이에서 본 후궁의 상태에 기분이 상한 오웬이 그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어쩌다 다친 것인지, 칼에 베인 상처가 결후에 남아 있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하얀 피부 위로 붉게 도드라진 자국이 꽤 아파 보였다.

상처뿐만이 아니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하다가 온 것인지 얼굴 위로 검댕이 묻어 있고 무명옷은 때와 먼지에 절어 있었다. 신발도 없이 맨발인 데다, 아니 대체 귀에 꽃은 왜 꽂고 있단 말인가.

며칠 전 후원에서 목격했던 후궁의 모습을 떠올린 오웬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화관을 쓰고 바보처럼 웃고 있었지. 이런 걸 정말 좋아하는군. 거의 바닥에 끌릴 듯 허물어진 후궁의 허리를 잡아 침대로 끌어 올렸다. 시트에 얼굴을 묻은 후궁을 돌려세워 천장을 향하도록 다시 눕혔다.

불편했던 자세에서 해방된 사내가 잠결에도 몸을 뒤척이며 덮인 이불을 쳐 냈다. 망설임 끝에 한쪽으로 밀려난 이불을 고쳐 덮어 준 오웬이 편치 않은 얼굴로 사내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방을 나섰다.

“폐하! 깨어나셨군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시종장이 달려와 오웬을 맞았다.

“열은 좀 어떠신지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폐하.”

짐작 가는 곳이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떨며 시종장이 대답했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태도에 기가 찬 오웬이 짜증 섞인 말투로 뒤를 이었다.

“그 사내를 데려다 놓은 것이 시종장 아닌가.”

“프리아 님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프리아 님께서는 함께 자리하지 않으셨던가요?”

밤새도록 프리아 님께서 손수 폐하를 간호하셨답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 있게 된 것 또한 프리아 님의 보살핌 덕분이지요. 사내란 모름지기 사랑하는 연인의 보살핌을 받아야 힘이 나는 족속이라고 하지들 않던가요?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선대 폐하께서는 어찌나 엄살이 심하셨던지 고뿔이라도 걸릴 적이시면 그 많은 후궁들을 죄다 본궁으로 불러 모으시곤 하셨더랍니다. 각자 대동해 오신 주치의들의 고견이 달랐던 탓에 어찌나 수습이 힘들었던지요. 그때 빠진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되었답니다.

이어지는 시종장의 수다를 듣지 않고 돌아선 오웬이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는 유디스를 턱짓해 가리켰다.

“저 아이도 따라온 것인가?”

오웬의 물음에 그제야 시녀 아이의 존재를 기억해 낸 시종장이 호들갑을 떨며 유디스를 깨우려 애썼다.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추태를 내보인단 말이더냐.”

프리아가 내실로 사라진 이래 종종걸음을 치며 시종장을 밤새 들볶았던 유디스였다.

‘저도 데려가 주시어요, 시종장니임. 데려가 주시어요오, 시종장니임. 프리아 님 곁에는 제가 딱 붙어서 시중을 들어 드려야 한단 말이에요오, 시종장니임.’

그리 생떼를 쓰다가 새벽이 올 무렵 소파 위로 쭈그려 앉아 훌쩍거리는가 싶었는데 시종장이 졸음에 빠진 사이 시녀 아이 또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자게 둬.”

그 후궁에 그 시녀라더니 칠칠치 못하게 잠이 든 모습조차 닮았다. 시종장을 제지한 오웬이 입고 있던 침의를 벗어 바닥에 떨궜다. 때맞춰 등장한 시종들이 부산을 떨며 시중에 나섰다. 오웬의 뒤를 따라 목욕실로 향하는 시종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장이 토막 잠을 자느라 굳어진 관절을 두드려 폈다.

“어이구, 삭신이야.”

눈치 빠른 시종 아이 하나가 시종장의 어깨를 두드려 안마를 시작한다. 손자뻘의 사내아이에게 한동안 어깨를 맡기고 있던 시종장이 퍼뜩 생각난 듯 몸을 곧추세웠다.

“아이고, 이런 정신머리하고는.”

목욕실로 바삐 뛰어간 시종장이 오웬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폐하, 프리아 님이 일어나시면 폐하를 뵙고 가시라 여쭐까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던 오웬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 아니, 좀 씻겨서 보내도록 해.”

씻겨서 후궁전으로 돌려보내라는 말을 단장시켜 침실로 들여보내란 뜻으로 오해한 시종장이 생각 이상으로 빠른 황제의 회복에 기쁨을 표했다.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소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랄라.

* * *

낯선 천장이다. 느리게 깜박이던 프리아의 눈동자가 월계수 잎 무늬를 두른 침대 기둥으로 향했다. 해를 가리는 휘장도 달려 있지 않아 햇살이 방의 중심부까지 진격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잠든 기억이…….

“……아.”

지난밤 시종장의 부름을 받아 본궁으로 왔던 것을 기억해 낸 프리아가 누워 있던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방 안의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프리아가 대신 누워 있다는 것은 스스로 걸어 침실을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황제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째서 이 자리에 누워 있단 말인가.

가능성 하나, 비몽사몽간에 황제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가능성 둘, 황제가 옮겨 놓았다. 가능성 셋, 황제가 나간 후 재빠르게 빈 침대를 차지했다.

황제의 옆자리를 침범했다면 그 성깔 더러운 놈이 자신을 가만두었을 리가 없다. 침대까지 곱게 옮겨 주었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황제가 떠난 후 졸음을 이기지 못해 침대에 누워 버렸으며 이 시간까지 푹 잠들었다는 것.

그렇다 해도 의문점은 남는다. 어째서 즉시 쫓아 보내지 않은 것인가. 혹시 내 간호에 감명이라도 받아서? 그럴 리가 없지. 새집의 둥우리처럼 사방으로 뻗힌 머리를 한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의 침실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할 정도로 규모가 작은 방이었으나 적재적소에 놓인 가구들은 하나같이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장식을 절제해 소재 자체의 결을 강조한 디자인은 방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듯 단단하고 완고한 인상을 주었다. 길이 잘 들어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호가니 책상이며 커다란 유리문이 달린 책장은 독서가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물건이었다.

후궁전 특성상 프리아의 처소는 젊은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사랑스럽고도 아기자기한 장식품과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본인의 심미안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유디스가 선택한 물건들이기도 했다. 그녀의 취향을 반영한 레이스 침구에 매일 밤 몸을 뉘여야 했던 프리아는 간만에 보게 된 제 취향의 공간에 눈이 씻기는 듯한 감흥을 느꼈다.

침구 하나만 따져 보아도 이렇게 다르다. 러플과 레이스 한 줄 없이도 푸른 비단에 포인트를 준 은빛 자수만으로 한결 품격 있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쿠션도 어찌나 탄력이 훌륭한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러 보아도 쉬이 꺼지지 않았다.

“내 방이었으면 좋겠다.”

아쉬움에 소리 내어 중얼거리던 프리아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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