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화 (16/237)

달이다.

뒤로 넘어져 머리를 부딪친 충격 탓일까.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바이런은 이토록 환하고 아름다운 달빛은 처음으로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게 내 뭐라고 했소. 위험하다니까. 당신 때문에 이게 뭐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정령인가? 정령이 말을 하고 있어.

숱한 여인들을 정복했지만 정령에게만큼은 어떻게 대시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워하던 바이런이 손을 들어 정령의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던 들꽃을 뽑아 귓가로 옮겨 주었다.

“당신은 달의 정령인가?”

얘 뭐래니.

잠시 의식을 잃었던 바이런을 흔들어 깨웠던 프리아는 그 순간 의정 대신 대리 양반의 정신 상태에 크나큰 불신을 느꼈다.

“당신 괜찮은 거요? 여기가 어딘지 알겠소?”

알다마다. 여긴 천국이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소. 내가 가서 사람을 불러오리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서 떠나가려고 하는 정령의 뒤태를 끌어안았던 바이런은 예상보다 매운 정령의 손찌검에 정령이, 정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주장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까 당신이 나한테 학습 능력이 없다느니 철부지 도련님이라느니 막말하지 않았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란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니. 분명 달님의 심술이었을 것이오.”

“닭살 돋는 말 좀 그만하면 안 되겠소? 의정 대신 대리 양반, 아무튼 난 자객도 첩자도 아니오. 약초를 구하러 올라온 것뿐.”

“그대처럼 아름다운 자객이라면 그 누구라도 목숨을 빼앗길 테지. 그대가 첩자라면 난 내 영혼까지 내어 주었을 것이야.”

“아깐 멀쩡해 보였는데……. 원래 이런 인간이었소?”

“미인들만 볼 수 있는 내 참모습이라오.”

“제발 거짓된 모습으로 대해 주면 안 되겠소?”

“자객도 첩자도, 또 시종도 아니라면 그대는 무얼 하는 사람이지? 그 고운 머리칼과 호수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보건대 혹 알훼니아…….”

바이런의 입에서 나온 고국의 이름에 프리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낭패다. 외간 사내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인 것으로도 모자라 정체까지 간파당하고 말았으니 유디스의 잔소리 3일치, 시종장 할아버지의 훈계 이틀분, 황제 놈의 미친 듯한 오해와 불신을 받게 되고 말리라.

“그러고 보니 제비궁…….”

바로 맞췄다. 의정 대신 대리 양반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에서 모셔 온 주치의였구려! 시종장 할배에게서 제비궁 주인을 모셔 왔단 얘기를 들었소. 그런데 여긴 왜 올라온 것이오?”

“폐, 폐하의 열이 쉽게 내리지 않으신다 하여 약초를 캐러 올라왔다오.”

“태의를 부르면 될 것을 어찌 몸소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올라왔소?”

“그, 그러게나 말이오. 이건 마리포사라고 해열에 효험 있는 풀인데 알훼니아에서는 흔하게 쓰이는 약재 중 하나라오.”

할 말이 없어진 프리아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리포사를 집어 내밀었다. 사내 둘의 무게에 깔렸던 탓에 가엾게도 꽃잎에 상처가 나 있었다.

“미인은 약마저도 예쁜 걸 쓰는군. 오웬에게 쓰이기보다는 그대의 귓가에 꽂히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꽃이오.”

“말 같지도 않은 말 그만하시오. 나는 이만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소. 주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이런의 언어 폭력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프리아가 꽃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의 내실로 가는 것이면 내가 안내하리다. 연결된 통로가 있소.”

안내를 자청한 바이런으로 인해 더욱 곤란해진 프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나 같은 놈이 어찌 폐하의 내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겠소. 나는 다만 시녀에게 약재만 전해 주려고 온 것이오. 나, 나는 다른 곳으로 내려가리다.”

“내려가는 길이 또 있소? 시종장 할배가 알려 주었소?”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바이런을 향해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프리아가 손짓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오? 양이 좀 모자랄 것 같아서 그러는데 몇 송이 더 따 와 주지 않겠소?”

그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부탁이라도 얼마든지. 느끼하게 미소 지으며 탑을 향해 달려가던 바이런이 프리아를 향해 돌아섰다.

“답례로 그대의 존함을 알려 주지 않겠소? 나 역시 그대에게 더 알려 줄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백 년 전 조상의 이름까지 알아내 읊어 주리다.”

필요 없어.

바이런이 눈치채지 않도록 천천히 뒷걸음치며 프리아는 먼 곳에 있는 그립고도 만만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기르!”

두 손이 꽉 차게 마리포사를 딴 바이런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가 찾는 이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참으로 신비스러운 사람이로세. 그것은 꿈이었을까. 기르라는 이름의 궁정인을 찾아 헤매던 그가 실제 제비궁의 주치의이자 연금술사인 당사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일이었다.

바이런이 서성이고 있는 바로 그 지붕 밑, 황제의 침실로 돌아온 프리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소한 사기를 치긴 했지만 수습도 했고 마리포사도 무사히 채취해 돌아왔다. 여러 번 미끄러지는 바람에 더러워진 손바닥 위로 여린 꽃줄기가 하늘거린다.

‘밖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뭘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뽀뽀?’

‘잼이 묻은 입술을 어디다 들이미시는 겁니까? 또 부엌에 다녀오신 건가요? 이미 드시고 오셨으니 간식은 필요 없으시겠군요. 외출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손 씻기, 그리고 발 씻기입니다. 기억하세요. 첫째도 청결, 둘째도 청결입니다.’

하지만 기르, 씻을 물이 없는걸.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힌 기르의 잔소리를 떠올린 프리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반박했다. 지붕을 쓸고 다닌 망토는 벗어 구석에 치워 두고 더러워진 신발 역시 그 옆에 놓았다.

명색이 황제의 침실인데 목욕실 하나 붙어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연결된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뿐. 암살에 대비하기 위한 이유일 테지만 구조를 알지 못하는 프리아에게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여분의 수건에 대야에 남아 있던 물을 적셔 손을 닦았다. 이제 황제에게 약초를 먹이는 일만이 남았다. 풍로가 없으니 달여 먹일 수는 없다.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먹여야 한다면 방법은 단 하나. 보기만 해도 쓴 침이 고이는 꽃줄기를 한동안 노려보던 프리아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입에 쓴 약이 몸에도 좋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임종 직전의 노파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지독한 맛이었다.

당장이라도 뱉어 내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으며 몇 차례 씹어 내자 줄기가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개나 고양이였다면 강제로 입을 벌려 먹게 했을 텐데. 일국의 황제에게 그런 무례를 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하려는 짓 또한 무례라고 한다면 무례였다.

뭐 어떤가. 이미 동침도 했는데. 한두 번도 아니잖아? 스스로를 독려한 프리아가 용기를 내 얼굴을 잠든 이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감은 눈 밑으로 시원스레 뻗은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이 내려다보인다. 시선을 둘 곳 모르는 프리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 범죄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며 뛰고 있다. 이건 추행이 아니다, 치료다. 이건 키스가 아니다. 그냥 입술을 붙이고, 붙이고만 있을 뿐이야. 아니 잠깐, 그저 붙이고만 있으면 약이 흘러 들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미션이었음을 깨달은 프리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숨결이, 지나치게 가까운 숨결이 흘러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켜 버린 프리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낭패다. 어이없는 탄식이 입가를 흘러나왔다. 약초를 삼켜 버리고 만 것이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와 울컥한 프리아가 누운 황제를 노려보았다. 어쩌겠는가. 다시 시도해 볼 수밖에. 남은 마리포사를 입 안에 쑤셔 넣은 프리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황제의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이런 철벽남 같으니.

꾹꾹 눌러 보아도, 비벼 보아도 통 열릴 기미가 없다. 키스 한 번 못 해 본 사내, 프리아는 자신의 테크닉 부족을 깊이 통감하고 있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더니. 그동안 숱하게 읽었던 낭만 소설 따위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닿기만 해도 숨이 답답한데 설왕설래는 어떻게 하는 것이야. 손가락을 넣어 강제로 벌리면 벌어지긴 할 테지만 차마 그리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잘못해서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후환이 두려웠다.

며칠을 앓느라 터진 입술이 보기에도 무척 아파 보인다. 제 입술의 각질을 밀어내듯 프리아가 혀끝으로 갈라진 황제의 입술을 적셨다. 순간이었다. 습기로 촉촉해진 입술 사이로 프리아의 혀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꿈결에 젖은 황제가 본능적으로 제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을 취하기 위해 움직였다.

빠져나가려는 것을 붙잡아 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속이 타고 목이 말랐다. 젖먹이 시절 유모의 가슴을 파고들던 그때처럼 본능을 좇아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첫맛은 쓰고 끝맛은 달았다. 엉키어 쓰고 다디단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조금만 더. 몽롱한 쾌감에 취한 황제가 다시금 혀를 감았다.

제발 그만. 더는 숨을 참을 수 없게 된 프리아가 황제를 밀어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시작한 건 난데 왜 당한 느낌이 들지? 생각지도 못했던 농염한 입맞춤에 귓불까지 빨개진 프리아가 손부채로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망할 자식, 어린놈이 왜 이렇게 키스를 잘해. 그새 다시 잠이 든 황제를 내려다보며 프리아가 불퉁거렸다. 잠자리 테크닉은 엉망이더니 제법 입술은 움직일 줄 아는군. 반론을 제기하듯 잠이 든 황제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아이처럼 혀를 찼다.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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