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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14)화 (15/237)

뼈가 붙은 지 오래인 새끼손가락이 저려 왔다. 입가에서 또다시 사내의 손길이 느껴진다.

왜 사라지지 않는 거야.

“……요난나.”

입술 끝을 누르고 있던 프리아의 손을 황제가 잡아챘다. 격하게 숨을 몰아쉰 황제가 억센 힘으로 프리아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폐하, 소리가 입술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다시금 정신을 잃은 황제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프리아가 중얼거렸다. 요난나?

열이 높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이마의 체온이 처음 물수건을 얹어 주었을 때와 비교해 확실히 높아졌다.

“그러게 악화된다니까…….”

이를 어쩐다. 시종장을 부르려 해도 부를 방법이 없다. 입구였던 벽을 힘껏 두들겨도 목청껏 소리를 높여 보아도 기척이 없었다. 황제의 증세가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자신을 이리 둔 것일 텐데 왜 갑자기 체온이 상승하는가. 눈을 뜬 순간 시계視界에 들어온 자신 때문일까. 분노가 열을 지폈을까. 물수건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해열제가 필요했다. 그것도 급히.

‘달 밝은 밤에는 유독 환하게 떠오르곤 하지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한들거린답니다. 그래서일까요? 멀리 날아간 씨앗이 성벽이나 탑 같은 높은 곳에 움트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 마리포사! 문득 떠오른 약초 이름에 프리아가 반색했다. 마리포사, 공국의 야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이다. 꽃의 형태가 나비의 날개를 닮은 까닭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해열 작용이 뛰어나 열이 오르기 쉬운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늘 상비해 두고 있는 약재였다.

잎과 줄기를 달여 먹거나 생으로 씹어 복용한다. 감기를 앓을 때면 기르가 늘 달여 주던 약초였다. 꽤 쓴맛을 지니고 있기에 먹지 않겠다며 도망 다녔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성벽이라면 경비병의 눈에 띌 위험이 있으나 지붕 위의 탑이라면 따로 지킬 이가 없을 것이다. 본궁 앞에서 성채 위로 솟아오른 첨탑과 종탑의 위치를 보아 두었으니 지붕 위로 오르기만 한다면 마리포사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자 시원한 바람이 맞부딪쳐 왔다. 창문 옆 벽에 부착된 구조물이 제법 튼튼해 보인다. 구조물을 밟고 올라서 손을 위로 뻗는다면 수월하게 지붕으로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알훼니아에서는 수 척이 넘는 나무도 타고 다녔건만 이 정도 높이쯤이야.

신중을 기해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세월의 더께가 얹힌 돌 위로 프리아의 발자국이 찍혔다. 빗물로 변색된 청동 아가씨의 어깨를 짚고 서자 아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사위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한낮이었다면 장관을 이루고 있을 대정원과 친족이 거주하는 별궁, 저 멀리 후궁전까지 감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저기쯤 되려나. 자신이 기거하는 후궁전의 위치를 가늠해 보던 프리아가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밤 사냥을 마친 매가 날개를 퍼덕이며 제 둥지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노랗게 마리포사의 꽃이 날갯짓하고 있었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바이런은 읽던 책의 갈피에 깃털 펜을 꽂아 표시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붕 위에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쥐나 고양이보다는 한층 무겁고 부피감이 있는 존재. 저 발걸음은 분명……. 자객인가?

바이런의 등줄기로 한기가 끼쳤다. 하필이면 그 빈틈없는 사촌 동생이 1년에 단 한 번 스스로를 내려놓고 앓아눕는 시기였다. 바이런은 며칠째 본가에서 나와 황제의 침실에서 가장 가까운 내실에 머물고 있었다. 대대로 황제를 수호하던 기사단장이 쓰던 방으로 유사시엔 비밀 통로를 통해 황제의 내실로 누구보다 빨리 도달할 수 있었다.

일단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섣불리 호위병을 호출해 자객과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를 첩자에게 몸을 숨길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객이 황제의 내실로 숨어들기 전에 잡아야 했다. 부디 자신보다 뛰어난 솜씨의 검객만은 아니기를. 침대에 던져 두었던 검집으로부터 검을 빼낸 바이런이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의 뒤로 사라졌다.

기특한 것. 장한 것. 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붕 틈새에서 훌륭하게 꽃을 피워 낸 마리포사를 향해 프리아가 찬사의 말을 건넸다. 탑의 둘레를 따라 선형 계단을 오르듯 제법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미안, 너희가 필요하단다. 일단 눈에 띄는 세 송이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며 프리아는 밑동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꺾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달여 먹는 것과 생으로 섭취하는 것 그 어떤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맛은 처참했지만 효과는 확실한 풀이었다.

혹시 모르니 두 줄기만 더. 어차피 날이 밝으면 시종장이 살펴보러 올 것이고 그때에도 열이 내리지 않으면 태의를 불러 달라 청하면 될 것이다. 꺾은 줄기를 손에 들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프리아가 내실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어둡다. 그사이 달이 구름에 가려져 시야가 어두워졌다. 더러 이끼가 낀 곳도 있기에 발밑을 주의 깊게 살피며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쿵 하고 부피감 있는 물체와 부딪혔다. 반동이 느껴지는 따스하고 두툼한 형체, 사람?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온 사과에 프리아 자신이 더욱 놀랐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궁의 지붕 위였다. 인적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누구…….”

상황을 인지하는 동시에 팔이 꺾여 뒤돌려 세워졌다. 턱 밑으로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금속,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이 느껴진다. 낯선 자의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누구냐? 소속을 밝혀라.”

“…….”

“다시 묻는다. 소속은?”

난감해진 프리아의 머릿속으로 유디스의 탄식만이 울려 퍼졌다.

‘어느 후궁이 맨얼굴을 척 드러내고 후궁전 밖을 활보하신답니까? 외간 사내 눈에 뜨이기라고 하면 어쩌시려고요?’

이건 눈에 띄어도 보통 뜨인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제압당하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있는 힘껏, 머리를 덮은 후드를 잡아당겨 얼굴을 더 가리려고 애쓰자 낯선 자의 손아귀 힘이 그 강도를 높였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너를 이대로 호위병에게 넘길 것이다. 이 야심한 시각에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지?”

“…….”

“폐하를 해하기 위해 잠입한 것이 아니더냐.”

바이런이 다시 묻자 품 안의 존재가 강하게 도리질을 하다 턱 밑의 칼날에 베인 듯 신음을 내뱉었다.

“아, 아야!”

이런 한심한 놈 같으니. 탑 그림자에 숨어 자객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이런은 자객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옷차림과 신이 난 듯 흥겨운 자객의 발걸음에 맥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숨어 있는 코앞까지 근접했기에 일순 경계했으나 흔해 빠진 들꽃과 대화하는 모습에 저건 자객이 아닌 그냥 동네 바보라고 잠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어찌하여 민가도 야산도 아닌 궁의 지붕 위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제압과 동시에 빠르게 몸을 뒤져 보았으나 무기로 쓰일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혹여 덜떨어진 시종이 아닌가 싶어 소속을 캐물었지만 묵묵부답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혼날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문 것인가?

“나는 이 나라의 의정 대신인 페르마 공의 대리를 맡고 있는 바이런이다. 순순히 정체를 밝힌다면 정상 참작을 해 줄 용의도 있어.”

신음에 마음이 약해진 바이런이 칼날을 거둔 순간이었다. 잽싸게 몸을 돌린 사내가 바이런의 손목을 깨물었다. 이거 원, 살쾡이 새끼도 아니고. 황당함에 손을 놓친 바이런에게서 벗어난 사내가 재빠르게 뛰쳐 나갔다. 뛰어 봤자 벼룩이거늘. 너 잡히면 죽었어. 간만에 성격 나온 바이런이 사내의 뒤를 쫓았다.

운도 지지리 없지. 몇 걸음 못 가 다시 잡힌 것도 모자라 바닥에 미끄러져 크게 넘어진 프리아의 머리 위에서 의정 대신 대리 나리가 씩씩거렸다.

“손에 든 건 뭐야? 이건 뭐 하러 꺾었어? 독초냐? 독약을 제조하려는 것이야?”

“아니거든!”

“바른대로 말해!”

“이보세요, 바이런 씨!”

발끈하던 프리아가 얼굴을 들킬세라 자신도 모르게 쳐들었던 고개를 재빨리 수그렸다.

자꾸 고개를 숙이는 것이 수상하다. 한사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보면 자신이 얼굴을 아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딘가 덜 자란 듯 선이 가는 몸매를 보아하니… 많아 봤자 10대 후반? 숙모의 백으로 입성했다던 히겐 가문의 셋째인가? 혹은 낙하산 주제에 실수 연발로 악명이 높다는 고모님 댁 골칫거리 막내? 갖은 인맥을 동원해 각지에서 종자로 올려 보내지는 귀족 댁 철부지 중의 하나가 분명하다.

“너 나 알지? 나 누군지 알잖아. 내 이름도 알고 있고.”

그건 방금 네가 네 입으로 얘기했잖아!

넘어진 아픔과 쪽팔림에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프리아가 소리 없이 반박했다. 이 망신을 떨고 이제 와서 후궁이라 밝힐 수도 없다. 황제 새끼는 왜 아파서! 시종장 할아버지는 왜 날 불러서! 그딴 새끼 뭐가 이쁘다고 난 꽃 찾으러 이곳까지 올라왔단 말인가.

“일어서서 얘기하지. 맘대로 이런 데 올라오고 그러면 안 돼.”

자, 여기 손.

내밀어진 손을 노려보고 있던 프리아가 반발하듯 바이런의 팔을 쳐냈다. 도움 따윈 바라지 않는다는 듯 스스로 일어서더니 곧 다시 미끄러져 균형을 잃는다. 순발력을 발휘해 뒤로 넘어가던 사내의 허리를 끌어안은 바이런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학습 능력이 없구나. 어느 부서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칠칠치 못해서야.”

“이것 좀…….”

“기껏 궁으로 보내 주신 부모님께 미안하지 않아?”

“놓고 얘기…….”

“여긴 도련님이 뛰어놀던 뒷마당이 아니야. 황제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궁이지.”

“좀 놓아주시오. 당신 발밑에.”

“오늘 일도 내가 봤으니 망정이지. 호위병 눈에 뜨였다면 그대로 고문실로 직행…….”

이어지던 바이런의 뒷말은 다음 순간 폭발한 사내의 외침에 묻혀 사라졌다.

“아, 진짜! 사람 말 좀 들으라고! 당신 발밑에.”

새똥 있어요.

아니나 달라. 주춤거리며 물러선 바이런의 신발창 밑으로 이미 앞서 두 번이나 애먼 사람을 희생시켰던 조류의 배설물이 뭉개지며 달라붙었다. 물컹, 하고 느낀 순간 이미 바이런의 몸은 돌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품 안의 사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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