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3)화 (14/237)

물수건을 갈아 주는 것 외에 따로 할 일이 없자 무료함이 몰려왔다. 의식 없는 황제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기도 민망해, 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어지럽게 서류가 널린 탁상 앞에 멈춰 선 프리아가 한 장을 들어 그 속의 내용을 뚫어지게 살폈다. 어려운 용어들로 포장은 했지만 결론은 자기 영지의 세금을 줄여 줄 것을 호소하는 모 후작의 청원서였다.

나머지 서류들 역시 국경 경비대장의 보고서, 수로 건설 제안서, 사병 규모를 늘리기 위한 지방 귀족의 건의서, 무역선 제조 상황에 대한 보고서, 강 이남으로 공방 위치를 옮겨 줄 것을 청하는 길드의 기안서, 옥에 갇힌 친척의 구명을 위한 탄원서, 마장의 규모를 늘리기 위한 예산안, 황궁 정원의 분수 수리 비용에 대한 청구서, 정기 연회의 연주 목록과 악사의 명단, 성년이 된 자식에게 영지를 떼어 주어도 될 것인지를 묻는 품의서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한 업무의 현장이었다.

일이란 일은 혼자 다 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 사소한 안건에까지 황제의 승인이 필요한 줄은 몰랐다. 집무실에서 처리해야 할 서류를 침실에 바리바리 싸안고 오니. 이러니 사람이 병이 나지 않을 수 있나. 너 참 재미없게 사는구나. 프리아는 잠이 든 황제를 돌아보며 끌끌 혀를 찼다.

탁상 위의 서류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의 서적이 벽의 한 면을 채우고 있었다. 법학, 제왕학, 정치학, 궁술학, 문법학, 역사학, 윤리학, 의례학, 조상학, 농상학……. 제목만 봐도 기가 질릴 목록들이다.

큰형의 서재에서 보았던 낯익은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시험 삼아 한 권 빼 든 프리아가 페이지 가득 빼곡하게 그어져 있는 밑줄과 덧붙여진 필기에 기겁을 하며 꺼내 든 책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다행히 책장 아래쪽에는 그가 좋아하는 이야기책도 몇 권 꽂혀 있었다. 그 속에서 읽지 못한 다음 권을 찾아낸 프리아가 쾌재를 부르며 책을 꺼내 들었다. 달이 비치는 창가에서 읽기 위해 가져가려는데 책장 사이에서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접힌 종잇조각이다. 그대로 책장 사이에 도로 끼워 놓으려다 호기심이 발동해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 들었다. 목탄으로 그려진 어린 소년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다양한 표정을 한 소년이 화지 위로 그려져 있었다.

웃는 모습,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 강아지를 안고 있는 모습,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 모습, 화를 내는… 설마. 어떤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프리아가 침상으로 돌아가 펼친 종이를 누워 있는 황제의 얼굴에 가까이 대 보았다.

“이랬었단 말이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 내는 유년 시절이 황제에게 존재하지 않았을 리 없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초상화가 꽤 마음에 들었거나 그림을 그려 준 이가 특별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려진 여러 표정 중 프리아가 본 것은 화내는 얼굴 하나뿐이다.

“좀 웃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폐하?”

굳게 다물린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당기자 호선을 그리며 황제의 입가가 휘었다. 웃으니까 좋잖아. 안 그래?

* * *

“움직이면 안 돼. 가만히 있어.”

“언제까지?”

아이가 칭얼거리며 품 안의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안겨 있던 강아지가 고개를 들어 입술을 핥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아이가 키득거리며 자세를 흩트렸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못생기게 그려 준다?”

“형은 심술쟁이. 바보 멍청이!”

“형이 바보 멍청이라서 누구는 참 좋겠다, 그치?”

목탄을 내려놓은 소년이 손가락에 묻어 있는 검댕을 묻히는 시늉을 하며 다가가자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시종장! 도와줘! 아서가 나한테 이상한 거 묻히려고 그래!”

도자기를 받쳐 들고 중정을 건너가던 시종장을 발견한 아이가 노인의 바짓단을 잡고 매달렸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황손 저하. 이러다 다치세요.”

이국에서 건너온 귀한 도자기와 어린 황손 그 어느 쪽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는 시종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소년에게 구호 요청을 했다. 긴 다리로 걸어온 소년이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간지러움을 태운다.

“아, 항복! 항복! 항복!”

“그럼 퍼시의 소유권을 나에게 넘길 테냐?”

“그건 안 돼!”

동생이 마음에 들어 하는 망아지의 이름을 대며 장난을 걸자 아이가 정색하며 고개를 흔든다.

“시종장! 살려 줘! 시종장!”

결국 제 형의 어깨에 거꾸로 업힌 아이가 과장스럽게 자신을 부르며 퇴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장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올해로 다섯 살과 아홉 살의 나이를 맞이한 어린 황손들이었다. 조부인 황제가 아직 정정한 까닭에 황손의 아비인 아론 역시 황태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성혼한 지 수 해가 지나도록 아이가 없어 폐태자비의 위기에까지 처했던 태자비가 회임하자 제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황가의 혼인이었기에 부부간 애정이 없는 것은 흠이 될 것도 아니었으나 사내의 몸이 아니면 흥분조차 하지 않는 황태자로 인해 부부간의 결합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곤 했다. 남색의 성벽을 가진 황태자에게 후손 생산을 위한 잠자리는 끔찍한 의무에 불과했다.

태자비에게서 도망치듯 공국 시찰을 떠났던 황태자가 먼 이국에서 데려온 것은 열대의 꽃만큼이나 화려하게 아름다운 열여덟의 청년이었다. 태자비의 침실에까지 대동한 청년의 덕으로 태자비가 회임할 수 있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아들 둘을 낳고 나서야 태자비는 자신의 끔찍한 의무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부와 모, 어느 쪽의 살뜰한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자랐음에도 두 황손은 반듯하게 자라났다. 저 어린 황손들이 황제가 되는 모습까지 보고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던 시종장이 주책없는 눈물을 떨궜다.

부쩍 운동량이 늘어난 강아지의 뒤를 쫓아 평소보다 먼 곳까지 온 날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 미로 정원에 들어온 탓에 걸어도, 걸어도 키를 훌쩍 넘는 월계수만이 앞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강아지의 짖는 소리에 아이의 마음이 급해졌다.

한참 헤매다 빠져나온 출구는 황손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넘어져 깨진 무릎을 한 채 별궁의 뜰을 서성거리던 아이를 불러세운 이가 있었다.

“아프니?”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낯선 음성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야외인데도 불구하고 침의만을 걸친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신기한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을 의식한 사내의 입매가 비웃듯 비틀렸다.

“왜 여자 옷을 입고 있어? 할아버지 손님이야?”

이국의 사신들이 종종 본궁을 방문했던 것을 기억해 낸 아이가 천진한 질문을 던졌다.

“네 아버지가 그러라고 하니까. 난 네 할아버지 손님 아니야.”

사내의 입에서 나온 부친의 얘기에 눈을 빛낸 아이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우리 아버지 알아? 아버지 친구야?”

“친구는 더더욱 아니지.”

“그럼 누구야?”

계속되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사내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도록 해.”

아버지는 바쁘셔서 나랑 놀아 줄 수 없으시대. 그래서 나는 맨날 형이랑 놀아. 우리 형 알아? 키가 이만큼 크구.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쏴. 나도 크면 잘하게 될 거라고 형이 그랬어.

제 형 자랑에 신이 난 아이가 발돋움을 해 보이며 힘껏 팔을 뻗었다. 제 아비와 어미를 반씩 빼닮은 얼굴이다. 죽일 듯이 노려보던 태자비의 얼굴이 아이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잉태된 아이가 다섯, 그중 두 아이가 유산되고 한 아이가 사산되었다.

“죽지 않고 태어나서 다행이구나.”

“죽어?”

사내의 말에 두려움을 느낀 아이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한 손에 들어올 만큼 가는 목덜미다.

“하지만 또 누가 아니? 죽는 게 나았을지도.”

체온이 높은 아이의 손목을 잡았을 때 등 뒤에서 날 선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웬!”

재빠르게 등 뒤로 아이를 숨긴 소년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더러운 몸으로 감히 누굴 만지느냐!”

이쪽은 태자비의 기상을 빼닮았군.

“여긴 내 처소야. 너희 아버지가 준.”

사내의 말에 키 큰 소년의 얼굴이 분노로 얼룩졌다.

“수치도 모르느냐?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다니.”

“너희 아버지가 차려입게 두질 않는걸. 지금 자고 있는데 인사드리고 갈래?”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힌 소년이 동생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오웬. 혼자서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돼. 저런  천박한 자와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어.”

형의 손에 끌려가며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또 보자꾸나. 사내가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아이가 사내를 알아보고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혼자 왔니?”

“아파?”

여전히 묻는 말에 답하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우선시하는 꼬맹이였다. 어느새 키가 훌쩍 자란 아이가 전보다 높아진 눈높이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아파.”

아이의 까만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동정하는 아이의 순진함에 고소苦笑가 절로 흘러나왔다.

“다쳤어?”

“맞았어.”

맞았다는 말에 더욱 커지는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내는 한 박자 늦게 뒷말을 덧붙였다.

“너희 어머니에게.”

정확히는 너희 어머니‘의 시녀들에게’다. 고고하던 태자비의 자존심은 세월 앞에 녹아 오수가 되어 버렸다. 열여덟, 처음 궁에 끌려오던 시절부터 시작된 손찌검은 이제 정도를 넘어 학대로 발전해 있었다. 뭐 하는 짓이냐며 말리던 태자비 역시 이제는 뼈를 부러뜨리는 고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구경을 놓쳤구나. 티타임 여흥을 마침 끝낸 참인데. 전통적으로 첩 몰이는 본부인의 취미이자 의무 같은 거라서 빼먹고 지나가면 섭섭하거든.”

아이의 큰 눈이 사내의 부러진 팔목을 고정한 지지대와 찢어진 눈꺼풀을 감싼 붕대 사이를 오갔다. 혼란과 불신 그리고 죄책감이 섞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쩐지 고통마저 줄어드는 것 같다.

“사실이야. 너희 아버지도 알고 있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지. 이런 식으로 정비에 대한 죄책감을 상쇄시킨단다. 본부인이 첩에게 질투쯤 할 수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도? 알고 있어?”

“형이 알았으면 좋겠어?”

“아니.”

아이의 작은 머리가 거세게 흔들렸다.

“나 대신 안부를 전해 줘. 황손 말대로 정말 활을 잘 쏘더라. 하마터면 내가 탄 말을 쏘아 죽일 뻔했지 뭐야.”

미안해. 아이의 큰 눈이 기어코 눈물을 떨어뜨렸다. 자기 잘못도 아니면서 사과하는 황손의 천진함에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미안해. 아프게 해서.”

“네가 왜 미안하지? 너희 가족이 한 짓이라서?”

아이가 고개를 떨군다.

“너하고는 상관없어. 벌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받을 테니까.”

“안 돼!”

아이가 소리쳤다. 잔혹한 계책이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그리하면 네가 그 벌을 대신 받겠느냐?

너는 착한 아이니까 손가락 하나로 감해 줄게. 어느 손가락이 좋아? 엄지? 검지? 아니면 약지?

다른 사람에게는 넘어져서 다쳤다고 하렴. 누구에게든 말을 하면 네 가족 모두에게 천벌이 내릴 거야.

생전 처음 경험하는 고통이었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은 사내의 손바닥에서 독한 꽃향기가 풍겨 왔다. 참지 못해 흘러내린 눈물이 사내의 손을 흠뻑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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