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마차 안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흘려들으며 프리아가 시선을 창밖으로 보냈다. 지난겨울 궁에 든 이래, 처음으로 후궁전 이외의 풍경이 프리아의 눈 속을 스쳐 간다.
“유디스! 사슴이야.”
숲속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한 프리아가 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유디스를 돌아보았다.
“선태후께서 기르시는 거예요. 저기 보이는 궁에 기거하시거든요.”
“본궁에 함께 있는 게 아니었어?”
“본궁에는 폐하와 레온 저하만 살고 계세요.”
“아, 그 돌아가셨다던 황손의?”
“네. 형님의 유일한 소생이신지라 폐하께서 무척이나 아끼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그 아이의 어머니는?”
“린드가르트 님은 유폐궁에 계세요.”
“유폐궁? 그런 곳도 있었어?”
“원래는 후궁전의 일부였는데 워낙 시설이 낡고 규모가 작은 소궁인지라 다들 꺼려하셔서 유폐궁이 되었답니다.”
“황손비가 왜 그런 곳에 있어?”
“아서 저하 생전에 워낙 폐하와 사이가 각별하셨던지라 저하가 돌아가신 후 항간의 망측한 소문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고요.”
“망측한 소문이라니?”
호기심을 보이는 프리아에게로 몸을 숙인 유디스가 주위에 들릴세라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온 저하가 실은 황제 폐하의 소생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었어요.”
“뭐? 진짜?”
“물론 헛소문이죠. 그게 사실이라면 레온 저하는 폐하께서 열네 살 때 보신 아드님이 되는걸요?”
“그게 가능해?”
“헛소문이라니까요! 뭐, 워낙 폐하께서 여인을 멀리하셨으니까요. 폐하에게 있어 여인은 오직 한 분, 린드가르트 님뿐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랍니다.”
“오오.”
흥미롭다는 듯 감탄사까지 날리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프리아의 태도에 그간 수집했던 소문을 신나게 중계해 나가던 유디스는 속도를 내기 시작한 마차가 돌부리에 걸려 크게 흔들리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프리아 님은 질투도 안 나세요? 어쩜 그리 남의 이야기라는 양.”
“질투를 왜 해? 내가?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린드가르트라는 분은 유폐궁에서 영영 못 나오는 거야?”
“몰라욧. 지금 프리아 님이 다른 분 걱정하실 때예요?”
“얘기는 유디스가 먼저 꺼냈잖아.”
그렇게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본궁에 도착한 마차가 시종들을 내려놓았다. 마차의 디딤 계단을 제대로 딛지도 않고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프리아를 보며 유디스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프리아 님! 그러시다 귀하신 몸에 상처라도 나면 제가 경을 친다고요!”
드디어 마주한 본궁의 규모에 압도된 프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이룬 성채 위로 깎아지른 듯 경사가 급한 첨탑이 솟았고 그 사이를 화강암 벽돌이 메우고 있었다. 모퉁이에 자리한 종탑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 님, 어서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수백 년을 이어 온 성의 웅장한 외관에 시선을 빼앗긴 프리아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이 궁을 설계한 건축가라도 되는 양 유디스가 거들먹거렸다.
“침실이 350개, 응접실이 180개나 된답니다. 대연회장도 일곱 개나 되구요. 사용인들 방의 숫자는 뭐 헤아릴 수도 없죠.”
“장서관은 어디야?”
“중정 건너편에 있어요.”
회랑回廊 한쪽 면을 장식한 거대한 벽화에 정신이 팔린 프리아를 단속하며 유디스가 궁의 계단을 올랐다. 환히 촛불을 밝힌 대리석 복도 위로 긴 망토 자락이 총총거리며 미끄러진다.
시종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멈칫하던 프리아가 그의 정중한 인사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오셨군요, 프리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더욱 불길한 미소를 띤 시종장이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남색 제복을 갖춰 입은 시종이 섬세하게 장식된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잠시 망설이던 프리아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온통 금빛으로 장식된 화려하고도 웅장한 내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방에 장식된 금붙이만 모아도 장정 한둘의 무게는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뭘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리던 프리아에게 시종장이 연결된 다른 통로의 문을 열어 보였다. 벽지로 위장되어 있어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서는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비밀의 문이었다. 프리아의 뒤를 따라 문앞으로 다가선 유디스를 향해 시종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가 계신 곳에는 프리아 님만이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시녀께서는 잠시 이곳에서 대기해 주시지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유디스가 울상을 지었다.
“그럼 다녀오셔요.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불안한 표정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던 프리아가 시종장과 함께 문 안쪽으로 사라지자 유디스 또한 초조함에 두 손을 모았다. 설마 신변에 위험은 없으시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호신 무기라도 하나 손에 쥐여 드리는 거였는데.
시종장의 뒤를 따라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간 곳에서 다시 문을 맞닥뜨렸다. 지나온 방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나 여전히 화려한 내실이었다.
“늦은 시간에 기별을 드려 당황하셨지요?”
“아, 예, 아니, 아니요.”
당황한 프리아가 어물거리며 대답하자 시종장이 피붙이를 보듯 따뜻한 눈길로 미소 지었다.
“오늘 이렇게 프리아 님을 모신 것은 폐하를 돌봐 주십사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예? 제가요? 왜요…….
“폐하께서는 현재 몸이 편찮으십니다. 매년 이때쯤이면 앓아눕곤 하시는데 올해는 유난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아프다고? 그 도끼로 찍어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녀석이? 이제야 황제가 며칠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프리아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시종장의 시선을 피했다.
“돌아가신 아서 저하를 그리는 마음이 사무쳐 병환이 되신 것이랍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애틋한 형제였지요. 비통해하시던 어린 폐하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갑자기 눈물, 콧물 짜내기 시작한 시종장을 프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여리시던 폐하가아. 폐하께서, 아서 저하가 그리 가신 후에 통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셨는데.”
어느새 눈물을 멈춘 시종장이 초롱초롱한 시선을 프리아에게 보내 왔다.
“이리도 어여쁘신 프리아 님을 만나 흠뻑 빠지셨으니.”
예? 걔가요? 설마요…….
“프리아 님께서 직접 간호해 주신다면 폐하께서도 씻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실 것이옵니다.”
아니요, 장담하건대 악화될 겁니다. 필시.
“아아, 마음씨도 고우셔라. 그럼 프리아 님만 믿겠습니다.”
이보세요! 할아버지!
그럼 소신은 물러가옵니다. 멋들어진 손동작으로 흡사 춤추듯 작별 인사를 해낸 시종장이 선반에 놓인 시계를 움직이자 소리도 없이 맞은편 벽이 움직였다. 갑자기 나타난 밀실에 몸이 굳은 프리아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여보낸 시종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등 뒤에서 빠르게 벽이 닫혔다. 벽 곳곳을 더듬어 보았으나 어디에도 숨겨진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꼼짝없이 갇혔구나. 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조금씩 실내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까지 오며 보았던 화려한 방들과는 다르게 장식이 적은 가구로 채워진 소박한 내실이었다. 장식품이라고는 벽에 걸린 그림 두 점과 벽난로 위에 놓인 금제 시계뿐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지 벽면을 채우고 있던 벨벳 커튼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텐 자락이 크게 부풀 적마다 그 너머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제법 넓은 공간이 그 뒤에 숨겨져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왼편으로는 서류 뭉치가 놓인 탁상이, 오른편으로는 누군가가 누워 있는 침대가 내려다보인다.
간호를 부탁받았으니 좋든 싫든 환자의 상태는 살펴봐야 할 것이다. 갑자기 깨어 화를 내지만 않는다면 좋을 텐데. 긴장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장의 말대로 상태가 그리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구름이 걷히자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머문 창 아래, 젊은 황제가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이마 위로 드리운 채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 감긴 눈두덩 아래로 드리워진 속눈썹 그림자가 빛을 따라 섬세하게 흔들린다.
달이 비춰내는 청년의 아름다움에 홀려 한참을 바라보던 프리아가 결심한 듯 걸음을 옮겼다.
침대 옆 협탁에 곱게 접힌 마른 수건이 여러 장 놓여 있었다. 찬물이 담긴 대야는 침대 아래 이미 준비되어 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판을 깔아 주셨으니 좋든 싫든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수건 한 장을 집어 들어 물을 적셨다. 적막한 가운데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요란하다. 부디, 아침까지 눈뜨는 일 없이 푹 주무시기를. 프리아는 그렇게 빌며 떨리는 손길로 황제의 땀을 닦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