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 비키지 못하니? 로잔나 너 때문에 프리아 님이 힘들어하시잖아.”
“싫어!”
투닥투닥 또 시작이다. 몸은 하나일진대 좌 마가렛, 우 로잔나, 양쪽에서 당겨 대는 공녀들 사이에서 프리아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간식을 먹은 뒤 화관을 만들겠다고 풀밭을 뛰어다닐 때까지만 해도 분명 사이가 좋았다. 이번엔 또 무엇이 문제일까.
조카 마티아 덕분에 아이와 놀아 주는 일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아이 하나가 더 늘었났을 뿐인데 몇 곱절의 힘이 들었다. 토라진 기색이 역력한 유디스까지 틈틈이 달래 줘야 하니 몸이 셋이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놀아 주다 보면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차라리 황제의 나이가 이토록 어렸더라면 남동생처럼 보살펴 줄 수 있었을 텐데. 황궁에서는 대체 황손에게 어떤 교육을 시켰기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세상 다 산 눈을 하고 이리 광폭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자신보다는 차라리 마가렛이 황제에게 어울리는 후궁일 것이다. 여자아이란 금방 자라는 법이니 몇 년만 지나면 눈부신 미인이 되어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마가렛의 얼굴 위로 성장한 여인의 모습을 덧그리고 그 옆에 황제의 형체를 놓아 보았다. 우아한 귀부인으로 자라난 마가렛의 곁으로 다가오며 황제가 말한다.
‘벗어.’
아니, 그런 거 말고.
‘눈 떠.’
아니야. 조금 더 다정하게, 다정한 대사를 해 보라고.
‘지금 내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냐.’
다정한 말을 들어 봤어야지. 그간 들은 것이라곤 명령에 협박, 으름장뿐이었으니 제대로 상상이 될 리가 없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풀이 죽은 프리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녀들이 토끼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햇살이 따스한 오후의 정경이었다.
* * *
“어디 몸이라도 아프신 걸까요?”
풀 먹여 다린 시트 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유디스가 입을 열었다. 시녀들이 침대 시트를 교체하는 동안 소파에 누워 책을 뒤적거리고 있던 프리아가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누가?”
“누구긴 누구예요. 폐하 말씀이죠. 요즘 통 오지 않으시잖아요.”
“바쁜 거 아냐? 황제잖아.”
“아무리 바빠도 매일 들르셨던 분이잖아요. 꼬박꼬박.”
“흐응. 질렸나 보지,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고개를 책장으로 숙이려던 프리아는 어느새 다가와 책을 빼앗아 든 유디스로 인해 고개를 소파에 처박아야 했다.
“유디스, 너무해.”
얼굴이 묻힌 소파에서 웅얼웅얼 프리아의 불평이 새어 나온다.
“프리아 님은 걱정도 안 되세요? 벌써 나흘째 폐하께서 발걸음하지 않고 계시는데.”
“다른 궁으로 갔다든지?”
신이 나서 대답하던 프리아의 입술이 야차처럼 변한 유디스의 서슬에 다물렸다. 폭풍처럼 유디스의 잔소리가 프리아를 향해 쏟아진다.
“어쩜, 프리아 님은 그렇게 철이 없으세요? 폐하가 정말로 다른 궁으로 가셨다면 그건 그거대로 정말 큰일이구요. 가지 않으셨다면 그건 그거대로 무슨 일이 생기신 거라구욧!”
프리아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못에 뛰어들어 주전자를 건져 주었던 일로 인해 행여 고뿔에 걸리신 것은 아닐까 근심하던 유디스였다. 폐하께선 프리아 님이 더러운 물을 드시지 않도록 친히 정한 샘물을 알려 주시기까지 했는데 정작 프리아 님은 황제가 오건 말건, 아니 오지 않으니 희희낙락하여 이야기책이나 읽고 있으니 답답해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깃발이 걸리지 않았으니 다른 궁으로 가시지는 않은 것 같구요. 본궁 시녀들에게 물어본 바로는 어디 다른 곳으로 외출하신 것도 아닌 것 같다 했어요. 분명 궁에 계신데, 요 며칠간 알현도 받지 않으셨다 하시니 어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쉬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구요.”
“그거 쌤통이다.”
책이 어디 그거 한 권이야? 약 올리듯 바닥에 쌓아 두었던 책 더미에서 다른 책을 꺼내 펼쳐 든 프리아가 얄밉게 말을 받았다.
“프리아 님!”
“그렇다 하더라도 태의가 붙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 이거 본 거다. 유디스, 장서관엔 언제 갔다 올 거야? 나 이거 뒤에 마저 읽고 싶은데.
후궁의 신분인지라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프리아 대신 장서관에 가 책을 빌려 오는 임무도 맡고 있는 유디스였다. 이야기책이 다 뭐냐. 다음에 가면 정숙한 부인의 의무와 도리가 적힌 예법서만을 잔뜩 대출해 오겠다 마음먹은 유디스가 드레스 룸에서 침의를 꺼내 왔다.
“늦었으니 주무시기나 하세요.”
“해 떨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해 떨어졌으면 자는 거예요, 원래. 프리아 님은 하나도 안 피곤하시겠지만 저희들은 하루 종일 일하느라 머리가 땅에만 닿아도 코를 골 지경이라구요.”
자신이 침실에 든 후에야 처소로 갈 수 있는 아랫것들의 사정에 생각이 미친 프리아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유디스가 내미는 침의를 받아 들었다. 찬바람 쌩쌩 부는 수석 시녀의 태도에 기가 죽은 프리아가 단추를 여며 주는 유디스의 동그란 정수리를 곁눈질한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프리아 자신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발걸음이 끊긴 지 나흘, 첫날은 기뻤고 둘째 날은 의아했으며 셋째 날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신경이 쓰여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몸뚱이로 증명 운운하며 사람 괴롭히더니 갑자기 발을 끊다니. 질렸으면 질렸다고 말이라도 해 주면 앞으로 발 뻗고 잘 수 있을 텐데. 최소한 이제 오지 않겠다 통보는 해 주는 것이 그간 몸을 겹쳐 온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이러다가도 또 갑자기 들이닥쳐 사람 진을 빼 놓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등이 완료된 내실에 정적이 밀려왔다. 프리아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신 베개만 뒤척이고 있었다. 밤 산책이라도 할까. 무료를 견디지 못한 프리아가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일어선 순간이었다.
“프리아 님!”
문을 열고 들어온 유디스가 프리아를 소리쳐 불렀다.
“황궁에서 전갈이 내려왔어요. 지금 급히 본궁으로 드시라고, 시종장님께서 사람을 보내셨다 합니다.”
지금?
되묻는 프리아에게로 유디스 역시 당혹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네, 지금 당장.
3
급하게 몇 벌의 외출복을 꺼내 온 유디스가 가져온 의상을 프리아의 얼굴에 번갈아 가져다 대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제가 진작 쓸 만한 여름옷 하나만 맞춰 놓자고 그렇게 말씀드렸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더니.”
이건 너무 평범하고, 이건 계절에 맞지 않고, 이건 너무 유행이 지났어!
자신이 보기엔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옷 몇 벌을 들고 한탄해 대는 유디스의 눈치를 살피며 프리아가 드레스 룸 구석에 걸려 있는 평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 입고 가면 안 돼? 난 저게 좋던데. 편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본궁에 가시는 건데! 아, 폐하는 부르실 거면 진작 좀 기별해 주시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설령 잠자리 상대로 부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침의만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 황제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기에 더욱 드레스 선택에 난항을 겪고 있는 유디스가 다시금 드레스 룸 속으로 뛰어들었다.
“악! 프리아 님! 실크 블라우스에 좀벌레가!”
“급히 오라고 했다며, 안 갈 거야?
유디스가 구멍 난 블라우스 소매를 붙잡고 절규하고 있는 사이, 걸려 있던 평복을 꺼내 빠르게 갈아입은 프리아가 내실 문 앞에 섰다. 그제야 프리아가 손수 채비를 마쳤음을 깨달은 유디스가 경악하며 급히 뒤를 쫓았다.
“프리아 님, 그게 무슨 옷차림이에요! 초대받은 레이디는 품격에 어울리게 차려입어야 하는 법이라구요!”
“나는 레이디가 아니잖아.”
“레이디보다 더하시죠. 폐하의 후궁이신데.”
네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이렇게 다루기 힘들어서야. 씩씩거리며 프리아를 따라잡은 유디스가 챙겨 온 붉은 망토의 후드를 프리아의 머리 위로 덮어씌웠다.
“뭐야, 유디스. 답답하게.”
“가만히 쓰고 계시어요. 밖으로 나오셨으니 이렇게라도 좀 가리셔야죠.”
“왜 가려야 하는 건데?”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세요? 세상 어느 후궁이 맨얼굴을 척 드러내고 후궁전 밖을 활보하신답니까. 외간 사내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쟤는 내간 사내냐?”
길잡이 등불을 들고 앞서가는 시종관의 등을 손가락질하며 프리아가 불만을 제기했다. 호명된 시종관이 멈춰 선 채 뒤돌아 정중하게 고개를 수그린다.
“시종관님이야, 시종관님이시니까요.”
응답하듯 시종관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인 유디스가 재촉하듯 프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오르세요. 다들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얼굴을 깊숙이 가리는 후드 덕분에 시야가 좁아진 프리아가 답답해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이게. 가다가 넘어지겠다.”
“그럼 다시 가서 레이스 베일이라도 갖다 드려요? 그건 더 쓰기 싫으실 것 아니에요?”
“어차피 가릴 거면 옷 고를 필요도 없었잖아.”
“폐하 한 분만 보시면 되는 거지요.”
마차 앞에서 일렬로 대기 중인 시종들 들으라는 듯 야무지게 대답한 유디스가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망토의 여밈 끈을 당겨 더욱 야무지게 묶어 놓는다. 장식이 화려한 사륜마차의 문이 닫히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나뉘어 앞뒤로 올라탔다. 가벼운 채찍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