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0)화 (11/237)

수국의 계절이 돌아왔다.

형이 좋아하던 꽃이다. 여름이면 후원의 못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수국 군락에 아서는 늘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기일은 겨울이라 맞출 수 없으나 우기의 끝과 함께 찾아오는 형의 생일에는 무덤 앞에 만개한 수국 한 다발을 바치는 것이 오웬 나름의 여름을 맞이하는 방식이었다.

눈치 빠른 시종장이 오후 일정을 비워 둔 덕에 오웬은 홀가분하게 집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뒤따르는 시종들을 물린 채 홀로 후원으로 향했다.

오수午睡의 뜰, 사랑하는 후궁을 품에 안고 선황제가 달콤한 낮잠에 빠졌다 하여 붙여진 별칭이었다. 노년에 접어들며 거동이 불편해진 조부가 발걸음을 끊자 후원의 명성은 삽시간에 퇴락했다. 보는 이가 없어도 꽃들은 피고 어린 나무들은 장대처럼 자라났다. 누구도 관심 두는 이가 없는 궁의 구석에서 소리 없이 커 가던 아서와 오웬처럼.

멀리 못이 보였다. 멈춰선 오웬의 어깨 끝으로 오키드 줄기가 다가와 부딪혔다. 독초처럼 강한 향내가 물씬 풍겨 온다. 그자, 요난나의 처소 주위를 늘 장식하고 있던 꽃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난잡한 향이 늘 그자 곁을 맴돌고 있었다.

밀쳐 내자 힘없이 안쪽으로 쓰러진다. 꺾인 꽃줄기를 오웬이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아이들의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꽃들이 무성한 들판 한가운데, 요난나가 서 있었다. 바람에 출렁이는 붉은 머리, 초록 눈동자.

“요…….”

어째서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바람결에 나부끼는 부드러운 금발 머리. 푸른 눈동자. 요난나가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오웬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풀밭 위로 그의 후궁이 서 있었다. 팔을 잡아끌며 말을 걸어오는 어린 여자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가 환하게 웃었다.

프리아.

지난밤 역시 품에 안았던 사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 사이에서, 함께 흔들리면서 다만, 아름답다고. 오웬은 생각했다.

“얘, 너 가서 물 좀 떠 와.”

열 살 주제에, 저도 후궁이라고 고개를 까딱하며 명령을 한다. 유디스는 분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다 프리아 님 때문이다. 산책하라고 내보냈지, 애들 돌보라고 내보냈는가. 매일 산책을 한다는 핑계로 낮잠도 덜 주무시고 빠져나가시기에 뒤를 따라와 봤더니 꼬꼬마들과 모여 앉아 소꿉장난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프리아 곁에 찰싹 붙어 있는 꼬맹이들의 정체를 알게 된 유디스는 더욱 기함을 하고 말았다. 트루바니아의 마가렛 공녀와 비올레타의 로잔나 공녀라니. 다른 시녀들이 안다면 경을 쳐도 수십 번은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공녀들의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프리아 님은 사내이지 않은가.

후궁전의 공녀들은 모두 황제 폐하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꽃이었다. 소문의 사내 후궁이 다른 궁의 공녀들을 꼬여 후원에 불러다 놓고 몰래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프리아 님은 물론이고 두 공녀들까지 유폐궁에 끌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상전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햇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는 지하 감방에 갇혀 죽을 때까지 곰팡이 핀 빵 한 조각으로 하루를 연명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못으로 물을 뜨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던 유디스는 고개를 돌려 이런 심각한 사태와 그에 당면한 충성스러운 수석 시녀의 심정 따위는 개코만큼도 알아주지 않는 무정한 상전을 노려보았다. 꼬맹이 공녀들이 고사리손으로 얼기설기 만든 풀꽃 화관을 좋아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상자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장신구들이 아까워 프리아 님의 몸에 한번 걸쳐 보기라도 하기 위해 그 얼마나 공을 들여야 했던가. 수석 시녀인 자신조차도 브로치 하나 달아 드리기 위해서는 갖은 아부와 회유를 동원해야 하건만. 어리다고 다 들어줄 것 같으면 유디스도 이제부터 열여섯이 아닌 여섯 살이라 우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프리아 님, 저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요. 오늘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아, 어지러워!”

“괜찮니, 마가렛? 그늘로 자리를 옮겨야겠다. 힘들면 나한테 기대.”

“네, 그렇게 해 주시면 괜찮을 것도 같…….”

마가렛이 과장스럽게 속눈썹을 깜박이며 프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에 질세라 로잔나가 달려와 프리아의 무릎에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얹으며 슬금슬금 품 안을 파고든다.

이런 불륜! 묵과할 수 없어!

조직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부 고발자만큼이나 비장한 결심을 한 유디스가 소꿉놀이용 주전자의 손잡이를 바스러지도록 세게 쥐었다. 황제 폐하를 뵙게 되면, 뵙기만 한다면 고자질해 버리고 말 테다!

못에 도착한 유디스는 그때까지도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흥, 하고 격한 콧김을 내뿜었다. 임자 있는 후궁들끼리 저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물을 뜨는 유디스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청개구리 무리가 구경한다. 고요하던 물가에 파장을 그리며 소금쟁이가 건너편으로 널을 뛰었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진한 수국 향기에 유디스가 고개를 들었다. 못 가장자리를 따라 수국이 눈이 부실 만큼 푸르게 만개해 있었다.

“어머, 예뻐라.”

감탄한 유디스가 마저 물을 뜨기 위해 고개를 수그리려던 순간이었다. 기묘한 위화감에 다시 고개를 든 유디스의 시선 속으로 키가 큰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라니. 이곳은 후궁들만을 위한 화원이며 허가받은 황족과 정원사를 제외하고는 남성의 출입이 일절 허가되지 않는 곳이다.

“누! 누구시어요!”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유디스의 외침에 사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날려 흐트러진 검은 머리,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깊고 검은 눈동자, 깎아 놓은 듯 수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아름다운 청년이 차가운 표정으로 유디스를 내려다보았다.

“폐, 폐하!”

평복 차림을 하고 있어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늘 지척을 따르던 시종장도 오늘따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유디스의 손에서 주전자가 떨어져 나와 둥둥, 반쯤 잠긴 채 못 한가운데를 향해 흘러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는 유디스에게로 황제가 질문을 던졌다.

“무얼 하고 있었지? 저건 무엇이냐?”

“주, 주전자이옵니다. 공녀, 아니 프리아 님께서 소꿉놀이에 쓰신다 하여……. 아니 그것이 아니옵고 목이 마르다 하시어.”

두 손을 맞잡은 유디스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사이, 서 있던 황제가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종아리에서 시작된 물이 허리선에 닿을 때까지 걸어간 황제가 방황하던 주전자를 집어 다시 못가로 돌아왔다.

“가져가거라.”

패닉 상태에 휩싸인 유디스가 주전자를 받아들지도 못하고 자신만 부르고 있자 답답해진 오웬이 직접 유디스의 손을 잡아끌어 주전자를 쥐여 주었다. 폐, 폐, 폐하,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마실 수준은 되지 못하는 못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정한 물이 흐르는 곳이 있으니 그대의 주인에게는 그곳의 물을 떠 주도록 해.”

“예에.”

귀까지 얼굴이 빨개진 유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 물에 젖어 드러난 황제의 하반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늘 저렇게 웃는가.

독백하듯 황제가 수풀 건너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제의 시선 끝에 프리아와 공녀들의 모습이 걸려 있는 것을 깨달은 유디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옵니다! 폐하! 프리아 님께서 바람을 피우시는 것이 결코 아니오라!”

바람? 저런 꼬마 녀석들과 말이지.

허둥대는 유디스와는 다르게 무심하게 서 있던 황제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대 상전의 취향은 별나군. 각 공국의 미인들이 모여 있는 궁에서 골라도 하필이면 저런 어린아이들이라니.”

황제의 농을 진담으로 들은 유디스가 사색이 되어 더욱 요란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오해이십니다! 프리아 님께서는 다만, 외로우셔서, 고국에 있는 조카님 생각이 나셔서 또래의 공녀님들을 돌봐 주시는 것뿐입니다. 결단코 삿된 마음을 품으셔서가 아닙니다. 그저 어린 동생들로만 보고 계시는 것뿐이어요.”

“외롭다고?”

“옛?”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유디스의 얼굴이 사색을 넘어 하얗게 질려 갔다. 황제의 머리카락 한 올 실물로 보지 못한 다른 후궁들이 여섯이나 존재하거늘 매일 밤 황제의 승은을 입고 있는 사내 후궁이 외로워한다는 소리는 호강에 겨운 투정이요, 분수를 넘어선 오만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옵니다! 폐하! 폐하가 계시거늘 어찌 외로우실 수가 있으시겠어요. 프리아 님이 아니라 제, 제가 외로워서, 제가 외롭다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그만 가거라.”

갓 꺾은 듯 싱싱한 수국 한 다발을 몸을 숙여 집어 든 황제가 유디스를 스쳐 지나 풀숲으로 올라섰다.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 떨고 있던 유디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멀어져 가는 황제의 넓은 등이 오늘따라 무섭지 않고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자신보다 고작 세 살 위의 청년일 뿐이었다. 일국을 짊어진 그 심정이 어떨지 유디스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프리아 님이 공녀들에게 보이는 미소의 반만큼이라도 폐하께 지어 드리면 좋을 텐데. 유디스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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