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관심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드디어 오웬의 고개가 바이런 쪽으로 돌아섰다. 날이 선 표정에 바이런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는 시늉을 해 보였다.
“품에 안은 지도 꽤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몸 정이라도 들 만한 시간이었다 그 말이지요. 내 말은.”
“천박하군.”
경멸스럽다는 듯 내뱉으며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린다. 정력왕으로 소문난 선대 황제와 세기의 사랑꾼으로 유명했던 황태자의 피를 이은 것치고는 담백하다 못해 결벽증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황궁에서 암암리에 행해지곤 하는 경험 많은 귀부인에 의한 성교육 역시 거부해 왔다고 들었다. 그러기에 더욱 불능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었다.
“아무리 박색이라도 내 것을 품고 있는 순간에는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아?”
“전혀.”
“그렇게 못생겼어?”
프리아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실물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이런이 떠보듯 슬쩍 입을 다시 놀렸다.
“하긴 밤일에 있어서 외모가 그리 중요하진 않지. 결국엔 목석같은 미인보다는 박색이어도 명기인 계집이 사내의 마음을 훔치는 법이야.”
소문난 카사노바답게 음탕한 말을 내뱉은 바이런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초콜릿 한 개의 포장을 더 벗겨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런 단순한 농에 얼굴을 굳히다니. 이래서야 어디 아홉 명이나 되는 후궁을 만족이나 시켜 줄 수 있겠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사는커녕 온전히 자신을 위해 감각을 내던져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이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사촌 동생은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진정한 색사의 쾌감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하루빨리 그의 마음을 앗아 가 줄 존재가 나타나 주기를 바이런은 간절히 바랐다.
* * *
“그렇게 틀어박혀 책만 보고 계시지 마시고 바깥에 나가서 바람도 좀 쐬세요. 후원에 꽃들이 얼마나 예쁘게 피었는지 아세요? 절경이라구요, 절경. 그렇게 방 안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다가는 좋은 구경 다 놓칩니다. 자, 자, 앉아 계시지만 말고 나가서 걸으세요. 보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고국 사신들의 방문 이후 표정이 부쩍 우울해진 프리아를 유디스가 내몰았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정원 어딘가에는 알훼니아 공국의 국화인 수레국화 또한 활짝 피어 있을 것이다.
프리아가 산책을 다녀올 동안 대청소를 야무지게 하려고 마음먹은 유디스가 먼지떨이를 손에 든 채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친정 식구들의 방문이 새댁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기혼자 시녀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유디스, 이제는 막 혼자 내보내고. 애정이 식었어.”
비가 그친 후 조성된 청신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프리아가 투덜거렸다. 사람 키만 한 월계수가 미로처럼 조성된 정원을 지나면 오수의 뜰이라 불리는 후원이 시작된다. 본궁 앞에 조성된 대정원에 비하면 뒷마당이라 부르는 것이 어울릴 정도로 규모가 작은 정원이지만 대대로 후궁들의 산책로이자 여흥을 즐기기 위한 피크닉이 자주 펼쳐졌던 곳이라 한때는 지체 높은 귀족들이 앞다투어 견학을 청해 왔던 곳이기도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프리아의 눈앞으로 화려한 꽃무더기가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꽃망울을 자랑하는 금꿩의다리와 키다리 시네라리아가 한데 모이고 붉은 아네모네와 푸른 아가판투스가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다. 작은 못 건너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또한 내려다보였다. 소년 시절 기르와 함께 다니던 들꽃 동산을 다시 보는 듯해 프리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프리아가 꽃길을 따라 정신없이 걷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앵앵거리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싶어, 보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보고 싶단 말이야!”
온 힘을 다해 지르는 투정 섞인 울음소리였다. 뒤를 이어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고 다그치는 미성숙한 소녀의 음성 또한 들려왔다. 울타리를 이룬 관목 숲 안쪽에서였다.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어, 엄마! 엄마아!”
마가렛은 미칠 지경이었다. 망할 계집애. 비올레타 출신의 공녀 로잔나가 벌써 한 시간째 발버둥 치며 울음을 쏟아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식을 가져오겠다며 궁으로 돌아간 수석 시녀 알벳과 루리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돌아오는 길에 삼천포로 빠져 어디선가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먼저 소꿉놀이를 하자고 불러낸 주제에 엄마 보고 싶다고 울어 대면 어쩌자는 건가. 나도 보고 싶다고! 정말이지 울음이 나올 것만 같다. 엄마, 나 집에 갈래.
“뚝 그쳐! 안 그치면 여기다 버리고 갈 거야?”
짐짓 무섭게 협박을 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오늘도 제풀에 지쳐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나 싶다. 도망쳐 자신만이라도 궁에 돌아가고 싶지만 숙녀 체면에 코찔찔이 어린아이를 버리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버리고 간다는 마가렛의 말에 로잔나의 울음소리가 더욱 찢어질 듯 높아진다. 내가 못 살아. 정말이지 수준 낮아서 못 어울리겠다.
“마음대로 해!”
일단 움직이면 따라오겠지, 마음먹은 마가렛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쿵, 무언가에 부딪친 몸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땅에 부딪히면 얼마나 아플까. 눈을 꼭 감은 마가렛의 등 뒤로 강한 팔 힘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을 넘어가지 않게 받쳐 주고 있었다. 살며시 눈을 뜬 마가렛의 눈동자로 눈부시게 강한 햇살과 함께 가을 하늘만큼이나 파란 눈동자와 금사金絲만큼이나 고운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다정한 음성.
“괜찮니?”
왕자님!
왕자님이다! 왕자님이 나타났다. 매일 밤 자기 전 기도하며 소원했던 그대로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아름다운 왕자님이 마가렛을 구하러 나타난 것이다.
“괘, 괘, 괜찮사와요!”
당황한 나머지 이상한 말투를 써 버리고 말았다. 이건 다 촌뜨기 시녀 알벳 탓이다. 촌스러운 말투에 나까지 전염되어 버리고 말았지 않은가.
왕자님에 의해 땅에 내려진 마가렛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어떻게 하지? 이건 운명이야. 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이제야 나타나시면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요?
“엄마 보고 싶어.”
마가렛이 잠시 고민에 휩싸인 사이 이번엔 로잔나가 뛰쳐나와 프리아의 품에 안겼다. 아직 한참은 부모 품에 있어야 할 어린아이다. 프리아는 서럽게 울어 대는 여자아이를 품에 안아 토닥거려 주었다. 순식간에 왕자님의 품을 빼앗긴 마가렛의 충격은 그 후 프리아가 울음을 그친 로잔나와 마가렛의 머리를 공평하게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가라앉을 수 있었다. 이 손 빠른 계집애! 왕자님은 이 언니 거야!
“내 이름은 프리아야. 너희들은?”
“로잔나!”
“마가렛이에요.”
씩씩하게 소리 지르는 로잔나와 간격을 벌리며 마가렛이 수줍은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로잔나랑 마가렛이구나.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니?”
“저어기!”
로잔나가 짧고 통통한 손가락을 뻗어 후궁전 쪽을 가리켰다. 저기서 왔어!
“트루바니아에서 왔어요. 지금은 후궁전에 있구요.”
마가렛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잔나가 “나는 비올레타! 비올레타 아라여?”라며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자신도 역시 후궁전 사람이며 알훼니아에서 왔다고 말해 주었다.
“황제 폐하예요?”
멍청한 계집! 저걸 말이라고 하고 앉아 있다. 그럼 궁마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는 대체 누구란 말이더냐.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외우다시피 초상화를 들여다본 덕에 마가렛은 눈 감아도 황제의 외모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에 밤하늘처럼 깊은 눈동자를 지녔다는 황제와 대면하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렇게 이상형이 바뀌게 될 줄이야.
“아닌데? 나는 그냥 프리아야. 그런 놈하고 헷갈리지 말아 주겠니?”
것 봐. 멍청한 질문에 왕자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지 않았는가. 정색한 표정마저도 천사처럼 아름답다.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
잠시 후, 미소를 되찾은 왕자님이 다정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다시 물어 왔다.
“다섯 살!”
당당하게 로잔나가 손가락을 펼쳐 들고 왕자님에게 소리쳤다. 어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코흘리개에게 마음을 빼앗길 그런 파렴치한 왕자님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지난달에 열 번째 생일을 넘겼답니다.”
그래요, 왕자님. 제가 바로 10대, 한창 여인의 청초함이 무르익기 시작할 나이죠.
“둘이 친구야?”
“응!”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잔나와 거리를 벌리려 애쓰며 마가렛은 체통도 잊고 격렬하게 소리쳤다.
“친구 아니에요! 쟤는 다섯 살이고 전 열 살이라고요.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무슨 친구!”
마가렛의 말에 로잔나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저 멍청이는 셋까지밖에 셀 줄 모른다. 그러니 한참 언니인 저를 맞먹자고 들 수밖에.
“다섯 살이 얼마나 큰 차이인 줄 아세요? 쟤가 한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저는 무려 여섯 살이었다구요.”
다섯 살이란 말에 왕자님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그래. 다섯 살 차이란 큰 거지. 어린놈이 기어오르면 정말 기분이 나빠.”
그렇다. 왕자님은 어쩜 이리도 이해력이 좋단 말인가.
꼬맹이는 다섯 살이고 자신은 열 살이니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난다는 여자아이의 말에 프리아는 울컥 감동을 느꼈다.
그렇다. 자신은 20대, 그놈은 10대. 5년간 먹은 스프 그릇 개수만 따져 봐도 얼마나 될 것인가. 녀석이 막 태어났을 무렵 자신은 이미 다섯 살이나 먹은 어엿한 어린이였다. 그런 핏덩이를 남편으로 맞아야 한다니. 밤이면 다시 찾아올 황제 생각에 프리아의 기분이 급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