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있는 말을 전하다가는 형님들의 폭풍 걱정을 사게 될 것이 자명하기에 프리아는 그저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런 무례한 녀석, 이 무슨 망발이냐.”
던컨의 입에서 나온 불경스러운 말에 혹여나 막냇동생이 피해라도 입지 않을까 염려한 로한이 조카의 입단속을 했다. 친형제인 자신들보다도 돌팔이 연금술사를 더 따라 내심 형제들을 섭섭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린 조카를 대신해 황제의 후궁이 되기를 자처하고, 또 후궁이 된 이후엔 쟁쟁한 다른 공국의 공녀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승은을 입어 공국에 감세의 혜택을 가져다준 자랑스러운, 그러면서도 안쓰러운 동생이기도 했다.
딸 가진 죄인이라더니 후궁을 배출한 공국의 심정이 딱 그 짝이었다. 차라리 여인이었다면 후계자를 낳아 제 위치나마 돈독히 할 수 있었을 것을, 사내의 몸인지라 황제의 흥미가 다른 곳으로 향한다면 죽어서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후궁전에서 외로이 평생을 늙어 가야 할 팔자였다. 걱정되어 달려왔으나 막상 마주하고 나니 더욱 염려가 되는 셋째 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리아가 잠시 자리를 물러 달라며 조카와 시녀를 내보냈다.
“큰형님께 전해 주세요. 저는 가지고 있어도 쓸모도 없고, 또 황궁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다 지급되니까요. 형수님들이 주신 선물에 대한 답례라 생각하고 받아 주셨으면 해요.”
프리아가 품 안에서 꾸러미를 꺼내 로한에게 내밀었다. 유디스 몰래 하사품의 일부를 빼돌려 고국으로 보내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프리아 님.”
“저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사코 거절하는 로한의 손을 프리아가 맞잡았다. 한때는 자신이 성 한구석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심했으나 알게 된 후에는 프리아 쪽이 오히려 미안하게 느낄 정도로 잘해 주려 애쓰던 형님들이었다. 늘 버릇없이 굴던 장조카 또한 장거리 이동에 옷맵시가 흐트러지는 것조차 불사하고 이곳까지 달려와 주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지금은 알 수 없는 황제의 계획이 성공해 더는 이곳으로 발걸음하지 않게 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이 먼 땅에서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그저 행복하게 살다 갔다고 고국에 기억되고 싶었다.
무슨 비밀 이야기를 이토록 오래 하는 것인지, 다른 객실로 안내된 던컨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의 앞으로 ‘우리, 프리아 님 굶기는 거 아니거든? 우리 먹을 거 완전 쌓여 있거든?’이라고 항변하듯 파이와 케이크, 구운 과자가 산더미처럼 얹힌 쟁반을 든 시녀들이 탕 소리를 내며 던컨이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다과를 내려놓았다.
“그럼 많.이. 드시죠.”
유디스가 찬바람을 내뿜으며 돌아서려는 찰나 던컨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유디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지.”
물어보시죠, 흥.
“그 새끼, 아니 황제랑 프리아랑.”
얻다 대고 새끼냐, 이놈아. 넌 프리아 님 조카만 아니었으면 황실 모독죄로 즉결 처형감이야. 알기나 해?
“폐하랑 프리아 님이랑 뭐요?”
대체 뭘 물어보려는 것인지. 어울리지 않게 쑥스럽다는 듯 말까지 더듬는다.
“아, 아니 그, 그러니까, 하, 하는 거야? 정말로?”
“뭘요?”
“그거 말이야, 그거. 첫날밤에 하는, 그거, 그러니까 아이 만드는 거. 프리아는 못 낳겠지만.”
미처 알아듣지 못하는 유디스가 답답한지 던컨이 직접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예에?”
“진짜 해? 했어?”
드디어 던컨이 물어오는 것의 의미를 깨달은 유디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니 이런 개념 없는 도련님을 보았나.
“그럼 신궁 후궁이 아무에게나 내려지는 신분인 줄 알아요? 폐하의 손이 닿은 후궁들에게만 내려지는 영광스러운 호칭이라고요.”
“아니, 난 그냥 그놈이 사내를 싫어한다고 그렇게 들은 거 같아서. 아니었어?”
유디스의 서슬에 놀란 던컨이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니면 아닌 거지, 승질은.
“폐하가 얼마나 프리아 님을 총애하시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매일 찾으셔서 프리아 님 몸 축날까 걱정되는 판에 그게 무슨 망발이세요.”
일만 치르고 나가 버리는 황제라 총애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황제가 매일 밤 찾아오는 것은 맞다. 그러니 이건 거짓말은 아닌 거다.
“매일?”
“그렇다니깐요! 하루에 두 번이나 들르신다구욧!”
저번에 분명히 하루 두 번 다녀 가셨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다. 한 번 일어났던 일은 두 번도 일어날 수 있는 일.
“두 번?”
짐승 새끼. 머릿속으로 프리아와 황제의 잠자리를 상상해 낸 던컨이 빨개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하루 두 번씩 해 대니 몸이 남아날 턱이 있나. 프리아가 저리도 수척해진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기다. 얼굴만 봐서는 전혀 안 밝히게 생겨 놓고서는.
처음 프리아가 후궁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는 코웃음을 쳤었다. 제까짓 게 가 봤자 별수 있나, 알훼니아도, 남색도 싫어한다는 황제의 후궁으로 가 뭘 어쩌겠단 말인가. 가서 늘 하던 대로 책이나 읽고 시간 죽이다 뒷방 늙은이 되는 거지.
프리아가 신궁 후궁이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이 날아왔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다른 공국으로 가야 할 사자가 잘못 왔거나 황제가 술에 취해 궁을 잘못 찾아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각 공국을 오가는 상인들은 여우 같은 남첩에 흠뻑 빠져 있다는 황제에 대한 소문을 교역품과 함께 나라 이곳저곳으로 흘렸다. 여우? 그 프리아가? 던컨은 제 눈으로 확인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막내 삼촌이 사내에게 몸을 내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던컨이었다.
그 뻣뻣한 삼촌이 무슨. 제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는 생글생글 잘도 웃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웃음 한 번 보이지 않는 싸가지가 아니던가. 고집이 센 데다 뒤끝도 있어 한번 마음 상한 대상한테는 면전에 대고 고개를 팩 돌려 버리는 천생 어린애이기도 했다.
자신도 속마음과는 달리 그 앞에만 서면 퉁명스럽게 나와 버리는 말 때문에 한동안 프리아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실은 그것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장조카를 귀여워하는 프리아의 장난이었음을 여전히 그는 모르고 있었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무성해지는 소문에 황제가 실은 다정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 까탈스러운 프리아의 마음을 녹였고 프리아 역시 황제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 생각도 해 보았던 던컨은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다시 한번 가설을 재정립해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소문대로 황제가 프리아를 총애한다면 자신과 숙부를 그리 푸대접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상대인 황제의 얼굴을 알지 못해 늘 미수 단계에 그쳤던 은밀한 상상이 이제는 얼굴을 알게 된 탓에 생생하게 던컨의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정녕 어제 보았던 새파랗게 젊은놈이 우리 막내 삼촌을 잡아 드셨단 말이더냐. 그것도 매일, 두 번씩이나.
어제 황궁에서 직접 바친 공물 중에는 숙모님들이 준비한 보양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귀족 부인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한 남자 몸에 좋다는 자양 강장제였다. 과연 이것을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리 맞대고 고민하던 숙모님들은 결국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결론을 내린 채 귀한 것이라며 던컨의 손에 직접 꾸러미를 들려 주었다.
큰일 났다. 그거 먹고 이제는 하루 세 번씩 막내 삼촌을 잡아 대면 어쩌란 말인가. 죽을지도 몰라!
* * *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화려한 문양의 상자를 가리키며 바이런이 하는 말에 오웬은 무심한 눈길을 보냈다. 얼마 전 궁을 방문했던 알훼니아의 재무관이 바친 선물이었으나 존재조차 잊힌 채 집무실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바이런이 발견해 탁자 위로 올려놓은 것이다. 상자를 감싼 포장지에는 알훼니아 공국을 상징하는 금박 물떼새 문양이 빼곡하게 찍혀 있었다.
연실 굽실거리던 중년의 재무관과는 달리 형식적으로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내던 화려한 차림의 청년이 기억에 남았다. 후한 대접을 기대하고 찾아왔을 사내 후궁의 혈족이었다. 뻔뻔스러운 자들이다. 설령 황손을 생산한 황후의 친가라 할지라도 오웬은 결코 특정 공국의 편의를 봐줄 마음이 없었다.
“가져가. 필요 없으니까.”
“뭐가 들어 있는 줄 알고 막 주십니까? 제비궁 주인이 섭섭해하시면 어쩌려고.”
“기미를 거쳐 올라왔으니 먹고 죽지야 않겠지.”
시종장의 보고를 통해 이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고급 초콜릿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오웬이 흥미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성의가 있는데 한 개라도 입에 넣어 보지 그래?”
“단건 질색이야.”
“그럼 내가 다 먹는다?”
과장된 동작으로 초콜릿의 포장을 벗겨 입 안에 넣는 시늉을 해 보였던 바이런은 오웬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상자를 다시 내려놓았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진귀한 식재료라 할지라도 구하지 못할 것이 없는 곳이 바로 황궁이었다. 애써 준비한 최상품이라고는 하나 황제가 어디 이런 것들 하나 마련하지 못할까.
요는 물건이 아니라 성의의 문제였다. 그러나 프리아의 형수들이 제 피붙이를 좀 더 어여삐 봐주십사 하고 준비한 공물은 황제의 눈에 그저 가치 없는 것들로만 보일 뿐이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의 젊은 황제, 오웬의 심장에는 실상 그 누구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거지?”
서류 검토에 여념이 없는 사촌의 등을 향해 바이런이 질문을 던졌다.
“알훼니아 사내 말인가?”
“정 없이도 부른다. 그래, 제비궁 주인 말이야.”
아홉 명이나 되는 후궁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저 역시도 다섯이나 되는 정인들의 이름을 헷갈리곤 해 잠자리에서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그러나 알면서 헷갈리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모르고 있는 것과는 엄연히 그 시작부터 달랐다. 사랑이 많아서 탈인 사내와 사랑이 없어도 너무 없는 사내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가.
“알고 있어.”
여전히 시선을 서류 위로 고정한 황제에게서 의외의 답이 들려왔다. 대답과 동시에 찌푸려지는 사촌의 미간을 바이런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