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7)화 (8/237)

2

알훼니아의 요아힘 대공에게서 편지가 도착한 것은 제국이 마침 길었던 우기에서 벗어나 막 짧은 여름에 돌입하려고 하던 7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조공품을 납품하기 위해 수도를 방문한 공국의 재무관이 아침 일찍부터 후궁전에 알현 신청을 했다. 아침에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프리아가 여전히 눈가에 졸음을 매단 채 응접실에 앉아 그리운 고향의 칙사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리아 님.”

출발했을 무렵에는 몹시 화려했을 재무관 비서의 모자 장식이 긴 여정에 시달려 볼썽사납게 나풀거리는 것을 흥미로운 눈으로 올려다보며 프리아가 손짓으로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님은요, 무슨. 낯간지럽게. 형님들은 모두 잘 지내시죠?”

재무관의 자격으로 제국을 방문한 그는 프리아의 셋째 형 로한이었다.

“이제는 폐하의 후궁이신데 말을 놓을 수는 없지요. 덕분에 큰 형님, 둘째 형님, 넷째까지 모두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후궁이 되어 버린 이복 막냇동생과의 재회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로한이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내리자 닳아 빠진 카펫의 얼룩이 로한의 눈에 띄었다. 프리아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던 응접실 내의 장식물을 바라보면서도 이미 눈치챘지만, 프리아는 그다지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재무관 비서의 자격으로 따라온 철없는 큰조카가 눈치 없이 대변했다.

“뭐가 이렇게 후져? 너 진짜 후궁인지 뭔지 된 거 맞냐?”

사내 주제에 첩살이나 하고,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니까. 올해 나이 방년 19세, 요아힘 대공의 장자 던컨이 불편한 심기를 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고 툴툴거렸다. 전날 알현한 황제에게서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터라 무척이나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던데, 그 건방진 황제 놈은 절은커녕 오후 정무 회의가 끝나기까지 기다리라며 자신과 숙부를 반나절이나 썰렁한 객실에 방치했다. 프리아 저것이 성격은 좀 까칠해도 외모 하나만은 봐줄 만하지 않던가. 저도 좋아서 품었으면서 이제 와 웬 오리발이란 말인가.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구나, 던컨. 어머님은 잘 계시고?”

머리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셋째 형님과 달리 예나 지금이나 막내 삼촌을 개똥으로 아는 장조카의 태도에 프리아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평소 남자 나이 열 살 아래는 다 똑같은 거다. 다섯 살 가지고 어디서 유세냐, 운운하는 장조카의 건방진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황제의 안하무인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어머닌 잘 계셔. 너나 좀 잘 있으라고. 민망하게 신궁 후궁이 다 뭐냐.”

두리번거리던 던컨의 시선이 마침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온 유디스에게로 향했다. 던컨의 시선을 느낀 유디스가 흥 하고 콧바람을 날리며 도도하게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날라리가 어디서 예쁜 건 알아가지고, 흥.

차가운 제국 여자 유디스의 콧대에 홀려 있던 던컨이 흠흠, 헛기침을 연발해 대는 작은 숙부의 수신호에 정신을 차렸다. 숙모님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신 물건들을 꺼내 놓으라는 뜻이었다.

동행했던 시종이 후궁전 출입 허가를 받지 못해 본궁에서 대기 중인 까닭에 모양 빠지게 손수 바리바리 꾸러미를 들고 오느라 이미지가 구겨졌던 던컨이 성의 없는 태도로 가져온 물건들을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물건들을 감싼 화려한 문양에 힐끔힐끔 유디스의 시선이 옮겨 간다.

최신 유행 머리 장식, 목걸이, 반지와 같은 장신구에서부터 알훼니아 특산품인 향수, 향유, 화장품, 사향 주머니 등이 꾸러미마다 가득 들어 있었다. 그간 나이 차가 있는 막내 도련님을 어려워했던 탓에 평소 무엇을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어 그저 자신들이 생각하는 후궁 필수품을 보내온 귀여운 형수님들이셨다.

대공 부인이 넷째 아들을 낳다 사망하자 대공은 홀로 몇 해를 슬퍼하다 나이 어린 자작가의 차녀를 후처로 맞았다.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녀는 프리아를 낳자마자 산욕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다시 겪은 상처喪妻의 고통을 이겨 내지 못했던 대공 또한 몸져누워 자리보전을 하다 저세상으로 향했다.

젊은 나이에 대공의 자리에 오른 요아힘은 물론이고 둘째 셋째 또한 공국의 살림살이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이번에는 늦둥이인 넷째가 비뚤어져 형님들의 애를 태웠다. 넷째의 사춘기를 간신히 치러 내고 한숨 돌리자 이번엔 요아힘의 아내가 중병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투병 끝에 사망한 아내의 장례식에서 요아힘은 그제야 자신들에게 남동생이 하나 더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 냈다. 먼 기억 속의 새어머니를 꼭 빼닮은 미소년이 장례식에 참석해 자신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올해 나이가 몇이냐고 묻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형님들에게 소년은 방긋 웃으며 이제 막 열셋이 되었다고 일러 주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몇 년 전까지 자신의 아들 던컨 외에도 보모 한 명 분의 급료를 더 지출하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언제부턴가 장부에서 사라진 항목이었다. 요아힘이 네 유모는 어디로 갔느냐고 묻자 소년은 이상한 것을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돌아가셨는데요.’라고 대답했다. 나이가 많던 유모인지라 아이를 키우던 중 노환으로 사망해 버린 것이었다.

형제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대체 이 꼬마 녀석은 몇 살 때부터 방치되어 있던 것인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막냇동생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개도 고양이도 염소도 아닌 인간의 자식이 어떻게 홀로 이렇게 자라날 수가 있단 말이냐. 양심에 가책을 느낀 요아힘이 어서 새 유모를 구해다 주겠노라고 말하자 소년은 이제 다 컸기에 유모는 필요 없다며 양손을 내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썽을 부리느라 온 성안을 헤집고 다녔던 넷째 에반만이 막냇동생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름은 프리아로 새어머니의 처소였던 동쪽 탑이 주 출몰지이며 수상쩍은 연금술사와 어울려 다닌다는 것이었다. 언제였던가, 제국 출신의 연금술사가 찾아와 알훼니아의 약초 연구에 관심이 있다며 거처를 내어 주기를 청했던 일 또한 요아힘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때 적당히 지정해 주었던 거처가 그간 비어 있다고 착각했던 동쪽 탑이었던 모양이다.

아들뻘 막냇동생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형제들이 자신들의 기억력을 탓하며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사이, 소년은 꾸벅 묵례와 함께 ‘다음에 봬요.’를 외치며 뛰쳐 나갔다. 그리고는 석 달이 지나고 나서야 성으로 되돌아왔다.

왜 허락 없이 가출을 했냐며 십수 년간 발휘하지 않았던 우애와 꾸지람을 퍼붓는 형제들에게 소년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매년 해 왔던 채집 활동을 하러 떠났던 것뿐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소문의 연금술사가 소중한 막냇동생을 데리고 그간 공국의 야산을 휘젓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간의 세월을 어찌 보상해 줘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아껴 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소년은 어느새 훌쩍 자라 성년이 되었다. 요아힘은 어린 딸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막냇동생의 후궁 자원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새어머니와 아버지께 얼굴을 들 수 없는 짓을 했다며 자책하던 그에게 프리아가 황제의 승은을 입었다는 소식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면죄부가 되어 주었다. 그런 그의 깊은 고뇌가 프리아가 방금 건네받은 편지 한 장에 들어 있었다.

프리아, 몸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느냐? 사자에게서 네가 신궁 후궁으로 승격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기쁜 마음에 펜을 들어 몇 자 적어 보낸다.

지엄하신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니 이 어찌 영광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느냐. 소식 듣고 네 형수도 무척이나 기뻐하며 한참이나 눈물을 보였단다. 어엿이 사내로 태어난 너를 궁으로 보내 놓고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느니 …… 맏형으로서 평소 네게 해 준 것 하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 부디 부군인 황제 폐하에게 순종하여 가정 내, 아니 궁내 평화를 이룩하기를 기원한다.

공국은 늘 무탈하니 걱정 말고 지내도록 해라. 마티아의 편지를 함께 보낸다. 우리는 언제나 널 그리워하고 있단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