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6)화 (7/237)

사내의 눈동자 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감정들을 즐겁게 감상하던 오웬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마음대로 머리를 잘라도 좋다고 했지?”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인가. 긴장한 프리아의 목울대가 꿀꺽 소리를 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일어나자마자 이게 웬 시비란 말인가.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단발斷髮 시행의 원인을 제공한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황제가 아닌가. 틀어 올린 머리 곳곳에 꽂힌 장식을 내리지 않고 거친 정사에 돌입한 까닭에 머리카락이 마구 엉키고 장신구는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상처를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가능한 길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고통 없이 장신구를 제거하기 위해, 손을 벌벌 떨며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을 분리해 내던 유디스를 보다 못한 프리아가 가위를 빼앗아 직접 잘라 냈다. 그리고 이어지던 유디스의 비명. 후궁의 신변에 이상이라도 있는가 싶어 부리나케 달려왔던 호위병들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채를 붙들고 곡을 해 대는 수석 시녀의 난리 법석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째서 그런 일로 여자아이들은 이틀씩이나 앓아눕는지 모르겠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황제마저 이러는 것을 보니 제국에서는 그 길이란 것이 남녀를 불문하고 꽤 중요한가 보다.

‘예, 예. 긴 머리가 취향이시라면 길러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페티시즘에 빠졌나 싶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던 프리아는 웃음기 하나 없는 황제의 표정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 내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냐.”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프리아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황제인 자신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해석한 오웬이 더욱 서늘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룻밤 몸뚱이를 놀린 대가로는 이미 충분한 양을 주었다. 그것이 모자라다고 생각한다면.”

다가온 황제가 프리아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얇은 천이 바스락거리며 팽팽하게 당겨 올라간다.

“네가 바라는 것들만큼의 값어치를.”

장력을 견뎌 내지 못한 실들이 투둑 소리를 내며 찢겨 나갔다. 드러난 목덜미 위로 돋아난 솜털이 일제히 기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이 몸뚱이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머물렀던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힘을 주자 아래에 깔린 사내가 숨죽인 신음을 내뱉었다. 엎어 놓은 사내의 다리 사이로 자신이 내보낸 것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엎드린 사내를 버려 둔 채로 오웬은 걸어 나와 내실의 문을 닫았다. 허무한 오후의 정사였다.

손바닥으로 탁자를 짚어 겨우 몸을 일으킨 프리아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어 발걸음을 내디뎠다. 난리통에 바닥으로 떨어진 제국의 고서들이 제 속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삽입의 고통을 참지 못해 움켜쥔 탓에 페이지가 찢겨 나간 책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황실 장서관의 대출 절차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며 유디스가 불평을 터트렸는데 더욱 면목이 없게 되고 말았다.

벽에 붙은 장식장 앞으로 다가가 구석에 꽂힌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입궁 초기, 프리아가 챙겨 왔던 개인물품을 유물이나 되는 양 경악하는 눈길로 바라보던 유디스는 낡은 책 첫 장부터 빼곡하게 적힌 알훼니아 가계도에 진저리를 치며 바로 내려놓았다. 두꺼운 양장을 두른 책의 뒤표지를 벗겨 내자 환약이 담긴 공간이 나타났다.

‘이정도면 1년 거뜬히 버텨 내실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으니 가능한 아껴 드시고 무리하지 마세요.’

한 계절만 버티면 기르가 돌아온다. 자신이 제국에 있는 걸 알면 화를 내며 쫓아올 테니 수확제가 열릴 즈음이면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분노하거나 화내지 말 것,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여 절망하거나 환희하거나 육욕으로 심장 고동을 높이지도 말 것. 저주 같은 병이었으나 크게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모든 일에 초연한 것처럼, 깊은 애정도 증오도 없이 다만 온유하게.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증명이라…….”

흩어진 책들을 한데 모으며 중얼거렸다. 쓸쓸한 울림이 한숨의 뒤를 이었다.

* * *

짧은 교합 후 몸을 떼어낸 오웬이 옷을 걸치기 위해 일어섰다. 후궁이라면 마땅히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옷시중을 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프리아는 오웬에게 등을 돌린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일렁이는 촛불 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극을 하는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옷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황제의 어깨가 셔츠 속으로 사라지고 무거운 망토가 그 위에 얹히는 모습이 얼룩처럼 벽면을 타고 흘러갔다.

마지막 성장기를 치러 내고 있는 사내의 몸이었다. 채 완성되지 못했으나 그것은 온전히 시간의 문제일 뿐, 앞으로 한 차례의 계절이 지나고 나면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강하고 아름다운 제왕의 육체가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황제는 매일 밤 프리아를 찾았다. 달 하나가 차오르고 다시 이지러질 동안의 기간이었다. 황제가 찾아오면 프리아는 말없이 엎드려 몸을 내어 주었다. 그러면 그 역시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삽입과 토정을 끝내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고통은 여전했으나 차츰 익숙해졌다.

궁 안팎으로 황제가 알훼니아 출신 사내 후궁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다회에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방진 사내 후궁에 대한 공녀들의 반감도 커져만 갔다. 노골적인 따돌림에 유디스 역시 타 궁의 시녀들과 어울리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모로 누운 사내의 드러난 어깨를 내려다보면서 오웬은 바이런이 전해 준 소문을 떠올렸다.

타고난 요부에 애교가 넘치는 미동이라더라, 색공이 뛰어나 아랫도리 하나로 남색이라면 질색을 하던 황제를 함락시켰다더라, 질투가 많고 샘이 많아 황제가 다른 공녀에게 가지 못하게 갖은 수를 써서 방해한다더라. 얼굴을 보이지 않는 사내 후궁에 대한 소문은 갈수록 부풀어 점입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들어맞는 것이 없었다. 미동이라기엔 나이가 많았고, 애교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체념한 듯 엎드려 묵묵히 뒤를 내어 주는 저 사내의 어디에서 질투와 샘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완강히 저항하던 첫 정사 이후로는 정말 남창이라도 된 듯 다리만을 벌려 줄 뿐이었다.

제국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고 후계 타령을 해 대던 대신들은 물론이고 각 공국의 대공들까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대신들 쪽에서 먼저 레온을 양자로 삼아 황태자로 올리자는 주청을 해 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린드가르트 역시 어두운 유폐궁에서 풀려나 황태자의 어머니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지금 등을 보인 채 누워 있는 저 사내가 소문 그대로의 애첩이었다면 그의 결심 또한 달라졌을까. 자신의 아비처럼 사내에게 빠져 가족도 나라도 내팽개치고 그 마음 하나 얻는 일에 평생을 허비했을까. 그럴 리 없다. 자신은 아비와 다른 인간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바로 눕자 다리 사이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황제가 내보낸 것이 어느덧 흘러나와 그곳에 고여 있었나 보다. 열과 마찰로 인해 부어오른 곳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남아 있던 점액질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간 익숙해진 탓에 출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관계 후엔 붓고 쓰라려 스치기조차 힘든 부위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뒤처리를 해 놓아야 시녀들의 손을 덜 탈 수가 있었다.

엄청난 정력가였다는 선황제 시절부터 후궁전을 지켰던 시녀들은 정사 후의 흔적이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들어와 침대보를 갈고 알몸의 프리아를 시트에 싸 목욕실로 안고 갔다. 한두 번은 제 발로 걸어가겠다며 소심한 반항을 해 보았으나 가만히 계셔 주시는 것이 도와주시는 것이라는 고참 시녀들의 주장에는 프리아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원래부터 힘이 센 여자들만을 시녀로 뽑았던 것인지 아니면 시녀 일을 하다 보니 힘이 세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내인 자신을 번쩍 들어 안고 가는 궁중 여인들의 기세에 프리아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목욕통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보면 몸이 씻기고 닦여 다시 보송보송해진 침대 위에 놓였다. 혼곤한 중에 들려오는 시녀들의 대화를 통해 프리아는 세간에 자신이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없을 경국지색에 질투의 화신인 색녀, 아니 색남. 기가 찰 노릇이었다.

황제는 결코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쯤 빼먹어도 좋으련만 부득불 찾아와 굳이 고통만을 안겨 주는 정사를 치르고 떠나는 쪽은 저 빌어먹을 황제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황제가 자신의 몸에 빠져 이런 행위를 한다고는 차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기계적인 삽입과 토정 이후 젊은 황제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낮은 신음은 쾌감이 아닌 고통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프리아는 알 수 있었다. 애정도 욕정도 아닌 다른 이유가 황제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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