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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5)화 (6/237)

그런 황제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프리아는 차차 수치심을 극복하고 사태를 긍정적으로 보기 위한 정신 수양에 들어가기 위해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목욕실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싶었더니 이제는 창문 앞에 의자를 붙여 놓고 앉아 몇 시간째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프리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유디스 또한 제 나름대로의 엄청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앓아 내느라 수척해진 프리아의 얼굴 위로 저녁노을이 깃든다. 희망찬 눈빛으로 어딘가 응시하나 싶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어 쉬는 저 허무하기 그지없는 모습. 그렇다. 어디선가 많이 보아 왔던 광경이었다. 결혼 첫날밤을 보내고 난 뒤 사촌 언니들이 선보이곤 했던 저 표정, 몸짓, 눈빛.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언니들이 슬퍼 보인다며 어머니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트렸던 유디스에게 어머니는 뭐라 말씀하셨던가.

‘한 남자를 알게 된 여인의 마음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자리 잡는 법이랍니다. 유디스, 가서 언니들을 축복해 주세요. 그녀들은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된 것이랍니다.’

첫날밤의 위력은 과연 대단했다. 결혼 전날까지만 해도 자신과 함께 뛰놀며 숨바꼭질을 해서 이모님을 걱정시키던 말괄량이 사촌 카밀라마저도 하룻밤 만에 어엿한 요조숙녀로 변신하여 귀족 부인네들의 야릇한 농담에 볼을 붉게 물들이며 눈빛을 조신하게 내리깔지 않았던가.

황제가 떠난 뒤 처음으로 그 광경을 목격했던 유디스는 너무 놀라 심장이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뒤이어 따라 들어온 시녀들이 진정시켜 주지 않았다면 유디스는 그 새벽에 궁정의를 부르러 본궁에 쳐들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프리아 님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냐며 울어 대는 유디스와 달리 시녀들은 젊음이 뻗쳤다는 둥, 후궁 잡아 대는 버릇은 할애비나 손자나 빼다 박았다는 둥의 말을 하며 일사분란하게 더럽혀진 시트를 갈고 물을 데워 정신을 잃은 프리아의 몸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난폭했지만 잊지 않고 하사품을 보내고 제비궁 예산 증액에 이어, 자신의 연봉까지 올려 준 황제의 씀씀이에 유디스는 이웃 나라 손님의 순결을 빼앗아 간 황제에 대한 미움을 그만 누그러뜨리기로 했다.

‘프리아 님, 어른이 되셨군요.’

그래도 왠지 모르게 아쉽고 섭섭한 감정만은 쉬이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수석 시녀가 보내오는 복잡 미묘하고도 수줍은 시선을 느낀 프리아 역시 불길한 예감에 야릇한 미소를 짓는 유디스를 힐끔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볼까 말까, 고민에 휩싸이고 있었다.

* * *

황제의 재방문은 수일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국경을 이웃하고 있는 국가와의 끊임없는 외교 분쟁에 통 시간을 낼 수가 없던 탓이었다. 칙서를 받아 든 사자가 국경을 향해 떠나자 이제야 머리를 비우고 한숨 쉴 수 있게 된 오웬의 집무실로 바이런이 찾아들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대충은.”

피로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사촌동생을 향해 바이런은 생각난 듯 사내 후궁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슬슬 다시 가 볼 때도 되지 않았어?”

“어딜 말이지?”

“후궁전.”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잠시 고개를 돌렸던 오웬이 다시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뉘었다.

“밤의 기쁨을 알게 된 새신랑치고는 지나치게 담백하단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고자라는 소문은 사라졌는데 어쩐지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신 것 같거든?”

바이런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오웬의 다리 사이를 손가락질했다.

황제가 다음 ‘승은’을 내리는 이는 누가 될 것인가. 궁은 물론이거니와 온 나라가 모두 시끌시끌했다. 황제의 첫 승은을 알훼니아 출신 사내가 가져간 탓에 체면을 구기게 된 공국의 대공들은 즉시 특사를 파견해 토라진 공녀들을 달래며 독려했다.

“동생님이 아시다시피 내가 그 방면엔 전문가잖아? 정석대로라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꽃을 들고 찾아갔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이미 날짜가 지나 버렸고.”

“시종장을 보낸 걸로 충분해.”

일말의 열정도, 성의도 보이지 않는 황제의 연극에 바이런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지금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어도 모자라는 시기야. 허니문은커녕 제비궁 주인이 소박을 맞은 게 분명하다고 떠들어 대는데 놓치려 하겠어?”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명째의 특사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접견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오던 길에 이미 붙들려 황제의 취향에 대한 질문 공세에 시달렸던 바이런이 무정한 사촌 동생을 바라보았다.

제 여식을 황후로 올리려는 대공들의 뒷공작이 겨우 그깟 합방 한 번에 수그러들 리가 없었다. 어차피 다시 찾아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일 터였다. 연심이건 욕정이건 간에 사내는 행동으로 말하는 법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잖아. 얼른 가 보라고.”

시종장이 가져온 따끈한 스콘에 잼을 바르기 시작하며 바이런이 떠밀듯 오웬의 등을 두드렸다. 내일쯤 또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꽤나 태평한 후궁과 그 시녀들이로군.’

오웬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수午睡에 휩싸인 내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켜보고 있었을까, 수가 반쯤 놓인 자수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시녀 아이가 먼저 눈을 떠 멍한 눈으로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기 시작한 시녀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기 시작한다.

“폐!”

하, 라는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오웬은 고갯짓으로 시녀에게 자리를 비킬 것을 명했다. 떨어뜨린 수틀에 제 발이 걸려 넘어지고 굴러가는 실 꾸러미를 잡으려 허둥대던 시녀가 난리 법석을 피우며 자리를 물린 후에도, 후궁은 팔베개를 한 자세 그대로 엎드렸던 탁자 위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밤 촛불 아래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후궁은 꽤 소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영락없이 계집의 흉내를 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내 복식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치장을 벗어 버린 탓일까. 햇살 아래서 보는 후궁의 얼굴은 요부라기보다는 무해한 청년에 가까워 보였다.

이리 다른 모습에도 그가 자신의 후궁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은 사내 후궁 특유의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에 있었다. 어두운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지닌 이가 대부분인 황궁에서 밝은 머리색을 하고 있는 사내 후궁은 유독 눈에 뜨였다. 다만 그 길이는 전과 달리 형편없이 잘려있었다.

‘이건 무슨 의미지? 내가 내린 장신구를 쓰지 않겠다는 시위인가.’

후궁을 내려다보는 오웬의 미간에 한일자가 내렸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탁자 위에 펼쳐진 책장을 제멋대로 넘기기 시작했다. 오웬은 펼쳐진 몇 장만으로도 그 책이 어떤 내용이었던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지금처럼 제국이 거대한 수도와 크고 작은 아홉 개의 공국으로 갈라지기 전에 생겨났던 고대 국가에 관한 설화를 다룬 책이었다. 그 책에 의하면 영광된 신의 후손에게만 전해지는 영약이 있어 죽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살려 다오, 아가.’

죽어 가던 황제가 오웬의 손에 쥐여 주었던 것. 한때 애타게 원했던 영약의 출현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형이 죽던 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자신에게 조부는 무어라 했던가.

‘허황된 전설에 미혹되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 이 비통한 날 황손의 미욱함마저 보여 주려 하는 게냐.’

황제의 일생 중 단 한 번. 황후를 포함한 직계 혈족에게만 쓸 수 있다는 영약. 황후와 황태자, 황손의 죽음 앞에서도 침묵을 지키던 노인의 입이 그 자신의 임종 직전에서야 열렸다.

이제 더는 그런 전설을 믿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난 오웬이 손에 쥐어진 약병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되살리고 싶은 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오직 한 사람뿐. 이미 흙으로 화한 형의 묘비 아래 함께 묻어 두었다. 대관식 날 밤의 일이었다.

지난밤, 자신은 눈앞의 사내를 안았다. 그토록 경멸하던 사내의 몸속은 무척이나 비좁고 뜨거웠으며 토정의 순간, 일말의 쾌락을 오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저 일순간의 허무한 쾌감. 내실을 빠져나오며 오웬은 남첩의 색공에 빠져 아내와 자식을 외면하고 황태자로서의 권리와 의무까지 방기했던 자신의 아비를 다시금 떠올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런 것이었나.

오히려 그 밤 이후 가끔씩 떠올렸던 것은 사내의 몸이 아닌 눈동자였다. 푸른 눈동자가 맹렬하게 자신을 거부하는 모습에 일순 분노가 치솟았다. 지금도 감긴 저 눈꺼풀 속에 그 푸른 눈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오웬의 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사내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이 부신 듯, 통 제 앞의 물체를 가늠해 내지 못하던 눈동자는 몇 번이고 느리게 깜박이고 나서야 자신 앞의 형체를 식별해 내고 순식간에 파랗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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