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
귓가에 닿은 차가운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기를 띤 검은 눈동자가 프리아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웃기는군.”
곱게 차려입은 채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던 주제에 오만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후궁이다. 마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순결한 처녀라도 되는 양 눈을 감고 몸을 맡긴 작태가 자못 역겨웠다. 알훼니아에서 보내온 후궁이 대공의 여섯 살 난 딸아이가 아니라 스물이 넘은 그의 남동생이라는 보고를 받았을 때 오웬은 코웃음 쳤다.
굳이 어린 대공의 친딸이 오지 않아도 좋았다. 설령 쉰 살이 넘는 촌부村婦가 왔다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사내를 보내다니. 남색으로 유명했던 황태자의 소생이니 그 피가 어디 가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인가. 그리 생각한다니 그리 해 줄 작정이다. 대를 이어 제국을 추문에 휩싸이게 할 남첩의 탄생을 오웬 역시 기다려 왔다. 공국의 조롱 같은 기대가 이제 곧 그 성과를 보게 될 것이다.
눈앞의 후궁이, 사내가 이 정사를 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 눈치챘다. 계집인 제 조카를 제치고 창부로 나선 주제에 이제와 순교자 행세라.
“너희 같은 족속들을 잘 알고 있지.”
눈을 뜬 사내의 얼굴에서 절망을 느낀 순간, 욕망이 융기했다. 고통을 예감한 사내가 그제야 미약한 저항을 시작했다. 사내의 턱을 잡아 옆으로 꺾었다. 가증스러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시트 깊숙이 처박았다.
“읍…….”
괴로운 듯 신음하며 벗어나려 도리질 치는 모습이 가소롭다.
모로 들린 사내의 반신이 물고기처럼 퍼덕였다. 무방비 상태의 발목을 잡아 올리자 다리 사이로 틀림없는 수컷의 상징이 나타났다. 실소를 터트리며 오웬은 사내의 육체 위로 올라탔다. 팽팽하게 저항하는 사내의 육체를 무너뜨리며 오웬은 그의 귓가에 대고 뇌까렸다.
“사내로 태어나 같은 사내의 밑에 깔려 신음하며 부귀영화를 노리는 더러운 것들. 이 밤의 대가는 충분히 치러 줄 것이니 가만히 있도록 해.”
강제적인 힘에 의해 파열되기 시작한 육체가 비명을 질러 댔다. 달군 쇠로 아래를 지지는 것 같은, 벼른 칼로 밑을 쑤시는 것 같은 지독한 아픔이었다. 몸부림치던 프리아가 자신의 얼굴을 누르고 있던 황제의 팔을 붙잡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곧이어 손찌검이 날아왔다. 비릿한 피 내음이 훅하고 끼쳤다. 터진 코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다시금 침투해 왔다.
몸을 빠져나가는 황제의 움직임을 느끼며 정신을 놓았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 나가는 황제의 발소리가 꿈결인 듯 멀어지며 프리아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 * *
“프리아 님, 정신이 드세요?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저 유디스예요.”
간신히 눈을 뜬 프리아의 시선 속으로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한 유디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정신이 들자마자 느껴지는 하반신의 저릿한 통증에 프리아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대답하기 위해 벌렸던 프리아의 입술 끝으로 앓는 신음이 새어 나오자 사색이 된 유디스가 궁정의를 부르기 위해 일어섰다. 그런 유디스의 옷자락을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세운 프리아가 붙잡았다.
“머리 울려, 유디스. 소리 좀 지르지 마.”
저는 프리아 님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어요. 다시금 울음보가 터진 유디스가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긴 많이 놀랐을 것이었다. 찢어진 옷에 엉망으로 더럽혀진 침대, 시트 위로 점점이 수놓아진 핏방울에 이르기까지 어린 소녀에게 보여 주기에 그다지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 들어온 유디스가 목격했을 참상에 프리아의 마음이 애잔하게 저려 왔다.
“제 속이 얼마나 타 들어갔는지 아세요? 궁정의께선 곧 깨어나실 거라고 하셨는데 통 정신을 못 차리시고. 시종장님도 어제부터 몇 번이나 왔다 가셨는지 몰라요.”
“시종장이?”
그 깐깐한 할아버지가 왜?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프리아의 머릿속으로 곧 먹구름 같은 불안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제 저녁 황제에게 행한 사소한 반항들이 물밀듯 프리아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 보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인 양 버티고 허벅지를 안 벌려 주려 노력하다 한 대 얻어맞았고, 아무리 참으려 해도 너무 아파서 그놈 새끼 손목 깨물다 또 한 대 얻어맞았고, 정신없는 경황 중에 입 밖으로 그만 ‘개새끼’라는 엄청난 말을 해 버린 것 같은데……. 설마, 설마 그게 들렸었나!
사색이 된 프리아의 표정을 어찌 해석했는지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진 유디스가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워 계세요. 시종장님 불러올게요.”
“일어나셨군요, 프리아 님.”
이제나저제나 프리아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걸어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시종장의 뒤를 이어 상자를 손에 든 시종들도 일렬로 따라 들어와 프리아의 응접실을 둘러쌌다.
“경하드리옵니다. 첫 승은을 입으시어 오늘부로 신궁 후궁으로 승격되셨습니다. 1만 헤타바에 달하는 영지가 프리아 님께 귀속되며 십만 도르의 세금이 알훼니아 공국의 조세에서 차감됩니다. 또한 현재 받고 계시는 금액 외에 3백 로라의 수당이 품위 유지비로 달마다 제공될 예정이며 그 외에도 철마다 악센다르산 옷감 여섯 필과 함께 황가 전속 재단사의 지명권이 황궁내 열한 번째 순위로 부여되십니다.”
시종장이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자 일렬로 서 있던 시종들이 각자 들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어 프리아의 눈앞에 늘어놓았다.
“투르바니아산 진주로 영롱한 광채가 일품인 특산품입니다. 관례에 따라 프리아 님의 나이와 같은 숫자인 스물네 알을 하사받으셨습니다. 다음으로 모스라티아산 사파이어입니다. 원하실 때 언제든지 황가 전속 장인에게 보내 용도에 맞게 가공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순금 스무 돈이…….”
“저기요, 잠시만요. 할아버지.” 손을 들어 시종장을 제지한 프리아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동작을 멈춘 채 자신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시종들을 향해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프리아는 목욕실을 향해 쏜살같이 뒷걸음쳐 달아났다.
“언제까지 거기 계실 거예요. 옷도 갈아입지 아니하시고. 다들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좀 나오세요.”
물도 담겨 있지 않는 목욕통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린 채 땅을 파고 있는 프리아를 내려다보며 유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디스.”
“네, 프리아 님. 말씀하세요.”
“꿈이겠지? 제발 꿈이라고 말해 줘.”
“꿈이 아니에요, 프리아 님.”
“말도 안 돼. 꿈일 거야.”
“저도 꿈만 같아요, 프리아 님. 이렇게 빨리 승은을 입으시다니요. 프리아 님 덕분에 제 코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몰라요. 신궁 후궁의 수석 시녀라니! 모두들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지금 후궁전 내에서 프리아 님 지위가 제에일! 높답니다.”
“……망했어.”
“망하시다니요? 프리아 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쪽팔려서 이제 형님들 얼굴을 어떻게 봐.”
어디 또 몸이 좋지 않으신가 싶어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유디스의 얼굴 위로 간만에 짜증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욧! 승은 한 번 입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고 그런 말씀 하시는 거예욧!
“조세 감면까지 받았다 하니, 공국에서도 알게 되겠지?”
“당연하죠. 아까 벌써 파발이 떠났어요. 분명 기뻐해 주실 거예요.”
과연 기뻐할까? 스물넷이나 먹은 한량 막냇동생이 황제의 후궁이 되어 쟁쟁한 타국의 공녀들을 제치고 기념할 만한 첫 ‘승은’을 입어 승진했다는데.
도저히 내키지 않는다며 황제의 분노를 감수하고서라도 후궁 간택은 거절하겠다는 요아힘을 설득했던 것은 바로 프리아 자신이었다. 남색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라 하니 굳이 자신보다 나이 든 사내 후궁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라 그리 호언장담을 하고 왔건만. 수도에서 날아올 황당한 소식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을 짓게 될 자신의 큰형님을 생각하며 프리아는 민망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은 안식년을 맞아 성을 떠나 있으나 이제 곧 가을이 오면 은둔 생활을 마치고 복귀할 기르는 또 어떠한가. 부디 자신이 없는 동안에 큰 사고만은 치지 말고 계셔 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던 기르의 엄한 눈동자가 떠올라 프리아는 더욱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스물다섯 해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기르의 발언은 어쩌면 오늘의 사태를 예언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프리아는 쪽팔려 죽을 것만 같았다.
같은 시각, 황궁에선 오웬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시종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관례대로 처리했다는 시종장의 말에 나가 보라 답했던 오웬은 곧 마음을 바꿔 물러가는 시종장을 불러 세웠다.
“예, 폐하.”
“그자의 반응은 어떠했지?”
평소의 황제답지 않은 물음에 시종장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충직한 태도로 그가 본 바를 고하였다.
“그것이……, 갑자기 자리를 뜨시더니 한동안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뜻인가?”
“소신의 생각으로는 기쁨이 큰 탓에 수줍음을 이기지 못하시어 그리하시는 것으로 보이셨습니다.”
“됐다. 그만 나가 보도록.”
오웬이 시종장을 손짓해 내보냈다. 지난밤의 태도로 보아 깨어난 후 끔찍한 소동이나 일으키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시끄러운 신하들의 입을 잠재우게 해 준 대가로 쥐여 준 보상인 줄도 모르고 어리석은 알훼니아 사내는 자신이 정말 총애라도 입은 양 기고만장해 있는 모양이었다.
첫날밤을 보낸 소감이 어떠냐며 아침부터 득달같이 황궁을 방문한 바이런으로 인해 불유쾌했던 밤의 기억을 떠올려야만 했던 오웬은 역시 오후 정무가 시작되자마자 사내 후궁에게 하사품부터 내려야 한다며 자신을 닦달하던 시종장으로 인해 심기가 꽤 불편해 있는 상태였다.
그림처럼 앉아 있던 첫 모습과는 달리 색사에 있어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던 사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웬은 알훼니아에 감해 준 세금만큼의 몫을 다시 징수해 오기 위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공국도 사내도 결국은 자신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