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가 깜박 졸았었나 봐요, 프리아 님.”
깨어난 유디스가 하품이 나오는 입가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기지개를 켜며 웅얼거렸다.
“깜박은 무슨, 코까지 골면서 잘만 자던데.”
그게 무슨 소리에욧! 숙녀는 코를 골지 않아욧!
눈곱도 떼지 않고 눈부터 흘기는 유디스가 귀여워 미소를 지으며 프리아는 거추장스럽게 펼쳐진 옷자락을 한데 모아 쥐었다.
“꺄악! 그게 무슨 짓이에요! 그게 얼마나 비싼 옷인데 그렇게 주름이 막 잡히라고! 아아악!”
유디스의 비명을 무시한 프리아가 유디스에게 다가가 제 머리를 내밀었다.
“벌써 한밤중이야. 이제 놀이 끝. 이걸 풀어 줘야 나도 편안하게 한잠 자지, 안 그래?”
“폐하는요?”
이미 다른 시녀들도 물러가 둘만 남은 응접실을 두리번거리며 유디스가 소심하게 물었다.
“안 왔는데?”
“제가 자는 동안에 다른 궁으로 벌써 가 버리신 건? 설마 그 재수 없는 아스문드 공녀 있는 곳으로 가신 건 아니시겠……. 아아아악! 장미궁 수석 시녀 잘난 척하는 꼴을 또 어떻게 봐요!”
벌써부터 머리를 감싸 쥐고 짜증 나를 외쳐 대고 있는 유디스의 손을 잡아 진정시킨 프리아가 입을 열어 또박또박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안.왔.다.고. 그 황제인지 고자인지 성인인지 하시는 분 아무 데도 안 갔어.”
“예?”
어쩜 저리 의심이 많을꼬. 프리아는 혀를 쯧쯧 차며 갑갑한 혼례복을 한시라도 빨리 벗기 위해 소매 단추부터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되구요오! 레이스 다 망가져요! 요래요래 살살 당겨서 벗기는 거라구요.”
다시 장인 정신을 되찾은 유디스가 인상을 쓰며 프리아의 왼쪽 소매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정말 안 오셨어요?”
“안 왔다니까.”
“아무 데도?”
“아.무.데.도.”
“깃발 안 올라왔어요?”
“안 올라왔어.”
지난 반년 동안 황제의 위치를 알리는 깃발은 내내 본궁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밤 그 깃발이 어느 궁에 걸리게 될 것인가. 모든 관심이 후궁전을 주목하고 있었다.
“못 보신 거 아니에요?”
“아니야.”
“설마 오늘 치장하라고 특별 수당 줬던 거 다시 내놓으라고는 안 하겠죠?”
“얼마나 줬는데?”
“많이는 아니구요. 쬐끔. 하여간 관리 놈들 인정머리하고는.”
내가 알아봐서 장미궁보다 덜 줬으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유디스가 씩씩거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된 거대한 문이 오랜 침묵을 깨고 생경한 소음을 내며 좌우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초로의 노인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
“벌써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던가.”
남자의 시선이 프리아의 반쯤 벗겨진 혼례복에 가 있다는 걸 깨달은 유디스가 히이익,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 폐, 폐하!”
“아니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것을.”
내가 방해한 것이로군. 차갑게 이어지는 남자의 뒷말에 유디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오, 오해이시옵니다. 프리아 님의 밤시중, 아니, 옷시중을 들어 드리고 있던 참이었사옵니다.”
그러니까 밤시중이란 그런 시중이 아니옵고 주무실 잠자리를 봐 드린다거나 침의로 갈아입혀 드린다거나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어요. 사색이 된 유디스가 쩔쩔매며 남자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호들갑을 떠는 시녀 아이에게서 금세 흥미를 잃은 남자가 다시 시선을 프리아에게로 돌렸다.
“예의범절조차 몸에 익히지 못한 것을 보냈군. 최소한 자신의 이름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얼어붙은 자신의 후궁에게로 다가간 오웬이 고개를 기울였다. 계집인지 사내인지 분간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도 무력한 존재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빛 눈동자. 아이처럼 무구한 얼굴 위로 한 박자 늦게 균열이 인다. 알훼니아 대공이 백치를 보낸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상황을 인식한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훼니아의 아들 프리아,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머리를 조아린 후궁에게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째서일까.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면서도 프리아는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이 늦은 시간에 전갈도 없이,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성큼 걸어 들어올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줄곧 닫힌 채였던 황동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 사람. 굶주린 포식자의 표정으로 다가와 제 소유물을 대하듯 이리 함부로 굴 수 있는 자가 오직 한 사람, ‘그’ 말고 또 존재할 수 있겠는가.
황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검은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아는 단 하나의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저 청년이, 저 사내가. 황제가 진심으로 자신을 간姦할 생각이라는 것.
“물러가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와 시종들이 종종걸음으로 내실을 빠져나갔다. 닫힌 문 저편에서 야밤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초야의 시작이었다.
꽃 같은 후궁들을 두고 어째서 이곳으로 왔는가. 프리아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질문을 삼킨 채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고요해진 침실이 심지 타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촛불 빛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황제가 후궁의 침실을 찾는 일에 별다른 이유가 필요할 것인가. 사내가 제 첩의 침실을 찾는 이유 또한 한 가지, ‘색사色事’. 그 이상, 그 이하의 이유도 없을 터였다. 그리하라고 만든 후궁전이며, 그를 위하여 불려온 후궁들이 아닌가. 그러나 황제는 지난 반년간, 그 존재 이유를 무시하며 방문은커녕 후궁전에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군.”
예상이라니.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본래 남색 취향도 아니며 프리아는 황제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알훼니아 출신이 아니던가. 죽는 날까지 적요한 후궁전에 머물며 때 되면 유디스를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것으로 소소한 삶의 보람을 찾으려 했던 프리아의 인생 계획은 갑자기 나타난 황제로 인해 그 뿌리부터 산산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쯤 타 궁의 후궁들은 사내, 그것도 나이가 한참 많은 남첩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는 모욕감과 충격을 견디지 못해 팔이 떨어져라 부채질을 하며 간신히 열을 식히고 있을 터였다.
“그런 것치고는 꽤나 공들인 차림으로 보이는데.”
황제의 비웃음 섞인 시선이 프리아의 전신을 훑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자신이 모시는 이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며 열심히 꾸며 준 유디스의 손길로 인해 오히려 프리아는 사내로서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설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그럴 리가. 프리아가 푸른 눈동자를 치켜올렸다. 곁에 있었다면 고개를 숙이시라 종알 대었을 유디스와 헛기침 소리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을 시종장이 자리를 물린 지금 침실에는 오로지 프리아와 오웬, 두 사람만이 앉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벗어.”
팽팽히 이어지던 침묵을 깨뜨린 건 황제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마디였다.
다섯 살이나 어린 사내 녀석에게 정성스럽게 옷이 벗겨지길 바랐던 적은, 프리아 스물넷 인생에 있어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지만 이렇게 자신을 경멸하듯 내려다보는 연하의 남자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는 첫날밤을 맞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프리아가 손을 들어 첫 번째 싸개 단추를 풀어냈다. 벌벌 떨면서도 빠른 손놀림으로 기껏 반쯤 벗었던 혼례복을 기어코 다시 입혀 주고 나간 유디스 덕분에 첫 단추부터 다시 풀게 된 것이다.
시녀들이 여러 명 달라붙었어도 입기 까다로운 의상이었다. 당연히 벗는 과정 또한 녹록치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풀어낸 두 번째 드레스의 매듭 사이로 세 번째 속 드레스가 나타났을 때는 그만 황제의 앞임을 잊고 육성으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유디스의 소원 한번 들어주고자 시키는 대로 겹겹이 입었던 혼례복이 도리어 장애가 되고 있었다.
드레스의 해체가 끝나자 페티코트가 그 뒤를 이었다. 풀을 먹여 빳빳한 속치마들이 벗겨지며 내는 소리에 프리아의 귓가가 수치로 달아올랐다. 정숙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혼례복에 걸맞게 잠자리 날개와도 같이 투명한, 속살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속옷들이 벗겨도, 벗겨도 끊임없이 프리아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능 없는 광대를 바라보듯 무감동한 시선으로 프리아의 촌극을 감상하고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왔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프리아의 손목을 움켜잡은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그다지 인내심이 많지 않아.
오웬에 의해 끌려와 침대에 내던져진 프리아가 낮은 신음을 토해 냈다. 천개天蓋를 고정시키기 위해 설치된 나무 기둥에 뒷머리를 부딪쳤던 것이다.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프리아의 얼굴을 차갑게 내려다본 황제가 상의를 벗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단련된 상반신이 불빛 아래 드러난다.
하의만 걸친 황제가 가까이 다가왔다. 본능적인 공포에 몸이 절로 뒤로 물러났다. 몸에 걸친 마지막 속옷 한 장, 이것이 마치 자신을 지켜 주기라도 할 것처럼 프리아는 옷자락을 움켜쥐고 숨소리를 죽였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등 뒤로 침대의 상판이 느껴지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아났다. 수없이 전쟁을 치러 낸 병사처럼 황폐한 눈동자로 황제가 프리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현실감 없이 들려왔다. 누군가의 장난이 아닐까, 궁을 잘못 찾은 게 아닐까. 부정을 해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절대 권력을 지닌 폭군 앞에서 프리아는 속절없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