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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화 (3/237)

“목욕물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느냐! 가장 좋은 향유를 구해 오라고 내가 몇 번이나 일렀어? 이건 벌써 개봉한 지 보름도 더 지난 물건이잖아! 뭘 하는 거야? 당장 나가서 새것을 구해 오지 않고!”

오늘따라 쟤가 왜 저럴까 싶어 낮잠도 거른 채로 유디스를 지켜보고 있던 프리아는 시녀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놀라 황급히 침실로 달아났다. 뭘 잘못 먹었어? 갑자기 왜들 이러는 거야. 내가 씻을게. 내가 알아서 씻는다고.

“폐하께서 오늘 후궁전으로 드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벌써 다른 궁에선 난리가 났다구요. 어쩜 좋아! 레이스에 곰팡이가 다 피었네! 정말이지 여긴 너무 습하다구요. 필시 프리아 님이 알훼니아 출신이라 업신여기고 제일 후진 궁을 배정한 게 틀림없어요. 프리아 님,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되시면 처소를 장미궁으로 바꿔 달라고 꼭 말씀하셔야 해요. 거긴 신축에 볕도 잘 들고……. 제가 꼭 장미궁 수석 시녀 하는 꼴이 재수 없어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것만은 아니에요. 아스문드 출신이면 다야? 말끝마다 아스문드에서는 이랬고 저랬고…….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제 겨우 반나절밖에 남지 않았다구요. 제대로 치장하려면 한나절은 걸릴 텐데 벌써 오후가 지나가고 있잖아요.”

그제야 유디스가 야단법석을 부리는 이유를 알게 된 프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깜찍한 우리 수석 시녀님은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셨나 보다. 명색이 후궁으로 입궁했지만 프리아는 황제의 총애받는 남첩이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열아홉 피 끓는 청년이 뭐가 부족해 꽃 같은 공녀님들을 내치고 같은 물건 달린 사내놈을 안는단 말인가. 혹여 호기심으로 한 번쯤 방문한다 해도 어리고 애교 넘치는 미동을 상상하고 왔을 테니 자신을 보는 즉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릴 것이었다.

더구나 알훼니아에 대한 황제의 적개심은 지독히도 깊어 타 공국의 배에 달하는 공물을 바치고도 알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공국으로 돌아갔다는 자신의 형님에 대한 비웃음 섞인 소문도 들려오는 터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젊은 황제님은 사내뿐 아니라 여인에게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후궁전에 얼씬도 하지 않는 황제로 인해 어여쁜 공녀들은 눈물과 불안 그리고 후회로 숱한 밤들을 지새워야 했지만 사내인 프리아에게 있어서는 그간의 날들이 그저 하루 세 끼 챙겨 먹고 잠이나 자면 그뿐일 평온한 일상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남겨진 생을 이곳 제국의 별궁에서 조용히 흘려보내는 것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조국에 대한 기여를 하려고 했던 프리아의 결심은 의욕 넘치는 수석 시녀 유디스에 의해 이렇게 깨어지고 있었다.

“저기… 프리아 님, 말씀드리자니 낯 뜨겁고 민망하지만 그래도 알려 드려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뭔데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프리아는 붉게 상기된 유디스의 뺨을 내려다보며 불안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게 그러니까, 합궁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원래는 경험 많은 부인께서 가르침을 주셔야 하는 건데 이미 다른 궁으로 부름을 받아들 가셔서 오실 수 있는 분이 한 분도 아니 계시지 뭐예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알려 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폐하의 귀중한 아기씨를 한 방울도 흘려선 안 된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자세가…….”

자세가……. 꺄악. 자신도 모르게 그 광경을 상상해 버린 유디스다. 수석 시녀는 자신이 모시는 후궁의 은밀한 몸 상태, 즉 달거리를 치르는 날짜라든가 수태 가능한 길일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했다.

황손을 위한 태교법과 솜씨 좋기로 소문난 산파들의 명단은 앞으로 빛 볼 날이 없겠지만 지아비의 쾌락을 높이기 위한 방중술만은 반드시 전해 드려 꼭 요긴하게 쓰이도록 하겠다는 것이 직업 정신 충만한 유디스의 각오였다. 두 눈 꼭 감고 체위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 유디스의 어깨를 프리아가 두드렸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유디스.”

“괜찮습니다, 프리아 님. 제가 이래 봬도 이론만은 빠삭…….”

“황제가 이곳까지 올 일은 없을 거야. 우리 괜히 힘 빼지 말자. 응?”

“그건 모르는 일이옵니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나는 그냥 구색을 맞추기 위한 볼모일 뿐이야. 황제가 이곳을 찾는 일은 영원히 없을 거고. 나를 위해 애써 주는 건 고맙지만 우리 그냥 편하게 지내면 안 될까? 그러니까 나를 후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너도 너를 수석 시녀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그냥 이웃 나라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국 견학 온 유학생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어때?”

“예?”

“우리 포기하자. 포기하면 인생이 편해.”

이런 성의 없는 후궁을 다 보았나. 시집도 안 간 처녀의 몸으로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은밀한 서적까지 수소문하며 성심성의껏 연구했더니 하시는 말씀 좀 보게.

“그냥 한 번만 제 뜻대로 따라 주시면 안 되세요? 프리아 님을 치장해 드리려고 제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수를 놓았는지 아시냐구요! 자그마치 반년이에요! 폐하께서 발걸음해 주시기를 반년이나 기다렸다구요! 폐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매일 저만 이렇게 애를 태우고, 프리아 님은 태평하게 낮잠이나 주무시고! 프리아 님은! 프리아 님은! 정말이지! 제 성의를 봐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시는 거라구요!”

무섭다, 유디스. 프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쳐 아까부터 시녀들이 물을 데워 붓고 있던 목욕통 속으로 들어갔다. 그뿐인가, 서슬 퍼런 유디스의 기에 눌려 평소에는 질색하던 장미 목욕까지 해야 했다. 갓 피어난 장미를 이리도 뜨거운 물에 데쳐 죽게 하다니 도대체 이런 악취미는 누가 먼저 생각해 낸 것이란 말이냐.

순식간에 몸에 향유가 발리고 머리가 빗겨지고 보기만 해도 갑갑한 혼례복이 입혀졌다. 선대 황제가 사내 후궁을 두지 않아 정해진 남성용 혼례복이 없었던 까닭에 프리아에게도 다른 궁과 동일한 여성용 혼례복이 지급되었다.

이걸 입으라고? 끝까지 거부할 생각이었지만 간만에 제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왔다며 기대에 부푼 유디스를 마냥 외면하기란 불가능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한 시간째 혼례복을 만지작거리는 유디스를 보다 못한 프리아가 단 한 번뿐이라며 인형 놀이를 허락해 주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짙은 화장에 한숨을 쉬는 동안 유디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장식된 금속 세공품과 함께 엮어 올렸다.

“사파이어 장식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호호호.”

입궁 이래로 유디스가 이렇게 흥겨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른 궁에 들어갔다면 매일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상전 하나 잘못 만난 죄로 그동안 애꿎은 책장의 먼지나 털어야 했던 그녀의 불행에 프리아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가끔씩은 유디스의 장단에 맞춰 인형 놀이를 해 주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프리아 님. 폐하께서 보시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실 거예요.”

제 솜씨에 감탄하며 손뼉까지 치고 있는 유디스와는 달리 프리아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공들여 치장을 한들 사내는 사내. 흥에 겨운 나머지 손을 맞잡고 방 안을 빙빙 돌고 있는 유디스의 열여섯 소녀다운 싱그러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정없이 당겨 올린 머리카락으로 인해 느껴지는 두피의 통증에 프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젊은 애가 어쩜 이렇게 금붙이를 좋아하니?”

유행이에욧! 자신의 미적 감각을 무시당한 유디스가 도끼눈을 한 채로 프리아에게 쏘아붙였다.

별궁의 하늘 위로 밤이 내렸다.

저녁상을 물린 뒤 카드놀이를 함께 하던 유디스가 깜빡 졸음에 빠진 사이, 프리아는 내실을 빠져나와 창문 앞에 섰다. 바람이 열린 창을 타고 들어와 프리아의 귓가에 매달린 귀걸이 장식을 흔들었다. 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 위로 그리운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진다.

지금의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형의 아내가 되어 버린 소녀. 한때 그녀의 귓가에서 흔들리며 맑은 종소리를 내던 어머니의 유품은 지금은 조카 마티아의 앙증맞은 귓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안 됩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인데, 한창 즐겁게 뛰어놀아야 할 어린아이일 뿐인데……. 후궁이라니요. 새로 황제 되신 분은 성정이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다 들었습니다. 냉대받을 것이 뻔한 자리입니다. 아직 어미 품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어찌 저리도 먼 북국으로 보내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말려 줘, 프리아. 네 말이라면 들을 거야.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마티아를 위해서라도 제발 네가 나서 줘.’

열여섯 여름, 소꿉친구가 여인으로 개화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자신보다 열다섯이나 어린 소녀의 연심에 난색을 표하던 요아힘은 한동안 그녀를 외면했으나 실연에 몸져누운 그녀가 먹고 싶다던 야생 딸기를 찾기 위해 수행원도 없이 산속에 들어갔다가 늑골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딸기 바구니와 함께 큰형의 본심을 전해 주자 소녀는 나는 듯 달려가 그대로 대공 부인이 되었다.

‘너밖에 없어, 프리아.’

매달려 오는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프리아가 고성이 오가는 홀hall로 뛰어들었다. 뒤늦게야 그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그녀가 혼절했지만 프리아는 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우아한 대공 부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속은 여전히 고집 센 말괄량이 그대로인 그녀를 달래기 위해 제국에서 보내온 입궁 날짜를 일주일이나 늦추고서야 프리아는 공국을 떠나올 수 있었다.

‘꼭 행복해져야 해! 프리아!’

드레스 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 뒤를 따라오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유치한 아이들의 언약에 불과했기에 그녀는 프리아의 신부가 되어 주지 못했지만 소중한 가족으로 남아 그의 곁을 지켜 주었다.

언젠가 신부를 맞게 될 줄로만 알았지 스스로가 신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자서는 벗을 수도 없이 복잡한 혼례복 자락을 내려다보며 프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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