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화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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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전의 아침은 치열한 몸단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숫물이 담긴 대야와 결 고운 모슬린, 은제 화장품 단지를 쟁반에 받쳐 든 시녀들이 궁정의 복도를 바삐 오가는 모습은 이곳 별궁에서는 아침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엄격한 제국의 법도에 따라 후궁들은 아침 일찍 기상하여 몸가짐을 바로 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수석 시녀가 문 앞에 서서 아침 문안을 여쭌 후, 기척이 들려오지 않으면 들어가 은종을 흔들어 후궁의 잠을 깨운다. 일어난 후궁이 예법에 따라 축복을 내리면 시녀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황제와 후궁의 평안을 기원한다. 이후 오전 시간 내내 정성스러운 몸단장이 이어지는 것이 수백 년을 이어 온 궁정의 관례였다.

“프리아 님, 벌써 해가 중천이옵니다.”

치장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제때 일어나기만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올해 열여섯이 된 제비궁의 수석 시녀 유디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머님 말씀대로 사교계에 입문했더라면 지금쯤 연회장의 꽃 중의 꽃이 되어 있었을 것을. 수석 시녀를 시켜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냉대를 받다 못해 조롱거리나 다름없는 사내 후궁의 수발을 들게 되다니. 신이시여, 너무하시나이다. 유디스는 제 운명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늘 그러했듯 오늘도 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후궁의 침실로 들어서는 유디스의 뒤를 중년의 시녀들이 따랐다.

길게 드리워진 휘장 속에서 쌕쌕, 깊이 잠든 숨소리가 들려온다. 은종 따위 제풀에 흔들다 지쳐 버린 유디스에 의해 창문 너머 후원으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오늘도 정녕 천한 상것들처럼 대야를 숟가락으로 두들겨 대야만 일어나 주실 것인가.

미녀들이 많기로 소문난 꽃의 나라 알훼니아에서 오는 후궁이라기에 어떤 인형 같은 공주님이실까 기대를 했더니, 공주님은커녕 혼기를 놓쳐도 너무 놓쳐 버린 사내 귀족님이셨다.

유디스가 절망한 것은 그가 단순히 남성의 성별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꽃처럼 어여쁜 남첩들이 황제의 사랑을 받아 영화榮華를 누렸던 기록이 제국의 역사에 엄연히 존재하고 또, 본판이 별로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경국지색으로 만들어 줄 자신감이 유디스에게는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화장술, 치장술, 장신구 및 옷 고르는 감각, 그 어느 것 하나도 다른 궁의 시녀들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알훼니아 공국 놈들은 제정신이란 말인가. 스물넷이나 먹은 사내를 후궁으로 보내다니! 황제보다도 나이가 무려 다섯 살이나 많다. 게다가 이 공자님, 몸치장엔 관심이 눈곱만치도 없으시다.

다른 국의 공녀들이 바리바리 최신 유행의 화장품과 드레스를 싸안고 입궁했을 때, 이 나이 많은 사내 후궁님이 가져온 것이라고는 수수하다 못해 궁의 시종들도 입지 않을 옷가지들과 보기만 해도 두통이 일 것같이 두꺼운 이야기책 한 묶음뿐이었다. 유행의 선두주자라는 알훼니아에서 저런 하품下品을 출하하다니, 설마 복고풍이 유행인 것인가.

“일어나시어요. 오늘은 다회가 있는 날이옵니다.”

보름에 한 번, 친목 도모를 핑계로 벌어지는 후궁들의 피 튀기는 패션 격전장, 다회. 유디스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오늘도 병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다른 궁 수석 시녀들의 비웃음 섞인 위로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프리아 님!”

인내심이 바닥난 유디스가 휘장을 걷어 올렸다. 정오의 햇살이 일직선으로 사내의 얼굴로 쏟아진다. 졸지에 태양빛의 공격을 받게 된 사내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오늘 다회 장소는 백합궁이라 합니다. 늦지 않으시려면 서두르셔야 해요.”

입궁 이래 제비궁 주인이 다회 참가 의사를 밝힌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상전의 의견조차 묻지 않고 불참을 통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가.”

해를 피해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사내가 오늘도 어김없이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다회에는 가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이젠 정말 일어나셔야 해요. 조반도 거르셨잖아요.”

통 일어날 기미가 없는 사내의 어깨를 유디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흔들었다.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로 천천히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유디스, 나 졸려.”

나 어제 늦게 잤단 말이야. 그렇게 웅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아예 얼굴을 숨겨 버렸다. 시트 위로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유디스는 간신히 상전에게 예의를 갖춘 아침 문안 인사를 건넸다.

“프리아 님,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빌어먹을 제국의 예절이여. 어서 빨리 축복의 말을.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 유디스, 너도 잘 먹고 잘 살아라.”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불을 끌어올린 사내가 그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췄다. 이런 상전 밑에서 일하다가는 황제의 눈길은커녕 평생 별 볼 일 없는 몸종 시녀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판단한 약삭빠른 귀족 소녀들은 일찌감치 모두 사의를 표명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명색이 수석 시녀인지라 그깟 명예가 뭐라고 울며 겨자 먹기로 시중을 들고 있는 유디스만이 유일하게 제비궁에 남은 귀족 시녀였다. 유디스를 제외하고는 궁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사용인 몇 명만이 할당되어 간신히 체면치레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실, 사내라는 성별과 황제보다 나이가 많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제쳐 두고 보면 프리아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경쟁력 있는 후궁이었다. 꿀 흐르듯 달콤한 금발 머리에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선명한 푸른 눈동자, 아치형의 눈썹과 그 아래 그림자를 드리운 숱 많은 속눈썹, 작은 얼굴 가득 들어찬 청초한 이목구비, 매끄러운 우윳빛 피부와 늘씬한 몸매까지 그림 속에서나 볼 법한 절세미인이었다.

프리아가 여인이기만 했어도 황제의 총애를 노려 볼 만했다고 시녀들은 입을 모았다. 아무리 후궁이라고는 하나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사내를 품고 싶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모시는 후궁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리라는, 그리하여 결국은 정식 황후가 될 것이라는 야망을 품지 않는 수석 시녀란 이 별궁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디스도 입궁 초기에는 어떻게든 프리아를 단장시켜 황제의 눈에 들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고, 프리아의 저항은 완강했다.

머리를 빗겨 놓으면 금세 귀찮다고 질끈 묶어 버리고, 황가 전속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지어 낸 고급 의상은 거추장스럽다며 입혀 놓기가 무섭게 평복으로 바꿔 입기 일쑤였다.

기껏 어머니를 통해 수소문해 손에 넣은 사향 주머니를 옷 속에 달아 주었을 때는 너는 정말 황제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며 정색을 해 나름 꿈 많던 소녀 유디스를 울게 만들었다. 입궁 초기 후궁들에게 일괄 지급되었던 화장품과 장신구, 고급 원단들은 방 안 구석 수납장에 넣어진 채 그렇게 잊혀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제가 아직 그 누구의 처소에도 발걸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위 반년이 지나가도록 황제는 후궁전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처소의 다른 시녀들을 안았다는 소문조차 없었다. 황제가 불능이라는 소문이 수도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피붙이를 궁으로 보낸 공국 대공들의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황손의 회임 소식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도록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궁들은 서로에 대한 견제를 늦추지 않았다. 봐주는 이 없어도 정원의 꽃은 피고 각 처소에서는 분내가 끊이지 않았다.

다른 궁의 후궁이 총애를 받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지금처럼 다 같이 냉대받는 것이 낫다고 유디스는 생각했다. 사랑받지 못하는 후궁들은 이유 없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거나 히스테리 증상으로 시녀들을 들볶기 일쑤였다.

그런 면에서 유디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 태평스러운 사내 후궁은 반년이 아니라 반평생을 황제가 찾지 않아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폐하, 각 공국에서의 상소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반년이 넘도록 후궁전을 저리 내버려 두시니 이제는 길거리의 무지몽매한 빈민들까지도 폐하에 대한 망측한 소문을 입에 담고 있는 형편입니다. 태후께서도 근심이 크시옵니다. 지금은 영토 확장보다 황손 생산에 더욱 힘을 쏟으셔야 할 때인 줄로 소신 아뢰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페르마 공작의 잔소리에 오웬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서릿발 같은 황제의 서슬에 제 안위를 내걸고 합궁을 간언할 대신들은 드물었다. 외숙부인 페르마 공작만이 유일하게 집무실까지 찾아와 몇 달째 후궁을 품에 안을 것을 오웬에게 종용하는 상황이었다.

오웬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어미인 태자비는 태후로 격상되었다. 근심이 크다는 말은 거짓일 것이다. 남편에게 평생을 냉대받았던 그녀는 자식들마저 거부하며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남편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들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장남인 아서가 병으로 죽어 가는 와중에도 병문안 한 번 오지 않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비틀린 그녀의 성격을 빼닮은 오웬 역시 모친을 외면한 까닭에 두 사람의 냉전은 아서의 사후 몇 해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

“눈 딱 감고 한 명만 골라 품으면 어때? 그러면 네가 고자라는 소문도 잠잠해질 텐데 말이지.”

불경스럽게도 황제의 옥좌를 차지하고 앉아 문서 날인을 대신하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웬과는 외사촌 관계에 놓여 있는 바이런이었다. 그는 잔소리를 피해 제 아비인 페르마 공작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입궁해 오웬의 업무를 거들고 있었다. 오웬보다 여섯 살이 많은 바이런은 곁을 주지 않기로 유명한 황제가 유일하게 흉중을 털어놓는 상대였다.

“아이 따윈 필요 없어. 레온이 있으니까.”

어린 조카의 이름을 읊조리며 오웬은 눈을 감았다. 형의 죽음 이후 자진하여 유폐된 린드가르트의 슬픈 눈도 함께 떠올랐다. 손위 누이가 따로 없던 그들 형제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린 린드가르트는 친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아이를 만들지 못하는 후궁을 안으면 되잖아? 별궁에는 사내 후궁도 한 명 살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문제의 후궁은 알훼니아 출신이었다. 하필이면 오웬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알훼니아 출신, 그것도 사내다. 평소 남색이라면 치를 떠는 사촌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바이런은 제 입으로 말하고도 아차 싶어 곁눈질로 오웬의 눈치를 살폈다.

“속되긴 하지만 물건을 세울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급한 불은 꺼지지 않겠어? 한 번 했다고 아이가 덜컥 들어서는 기적은 여간해서 발생하지 않거든”

철이 들기도 전부터 숱한 여인들을 안아 왔던 바이런이지만 아직 그를 아비라 부르는 존재는 태어나지 않았다.

레온 외의 후계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망나니로 이름을 떨친 부친과는 달리 형, 아서는 어릴 적부터 영민하고 다방면에 뛰어나 타고난 황제의 재목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그를 덮치지만 않았어도 선조의 뒤를 이어 제국에 또 한 번의 영광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아서의 유일한 소생인 레온이 정당한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오웬은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할 생각이었다.

레온을 위협하는 존재는 살려 둘 수 없다. 설령 오웬 자신의 소생이라도.

누가 황후가 될 것인가. 온 나라의 관심이 후궁전에 쏠려 있었다. 불임이 확실한 여인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황후의 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싹부터 잘라 놓는 것이 좋겠지.”

뭐라고?

공문서에 생긴 얼룩을 신경 쓰느라 오웬의 말을 흘려들은 바이런이 사촌에게 반문했다.

“시종장에게 전해. 오늘 밤 후궁전으로 가겠다고.”

소식은 삽시간에 온 궁정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이 황제의 첫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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