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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실내였다. 높은 천장에서 시작해 바닥까지 점령한 벨벳 커튼이 외부의 냉기와 함께 겨울 해가 뿜어내는 미약한 빛마저도 차단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유리창을 흔들 때마다 덜컥거리는 창틀의 비명이 들려왔다. 뒤이어 노인의 왜소한 몸 역시 흔들리며 밭은기침 소리를 토해 냈다. 병마에 시달린 가여운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태의太醫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한때 태산과 같았던 육체가 스러진 자리, 웅덩이처럼 고여 일어서지 못하는 제왕의 주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늙수그레한 시종장과 궁정의宮廷醫 무리, 그리고 황가 유일의 적통 후계자 오웬뿐이었다. 투병이 길어지며 의심과 두려움이 많아진 노인은 제 손자의 입과 귀, 손을 통하지 않고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찍어 내면서 앞다투어 몰려왔던 후궁들을 냉정하게 내치고 진귀한 약재들을 구해 바친 가신을 유배지로 내몬 이후에는 그 누구도 섣불리 황제에게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황제의 목숨이 이제 곧 끊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기나긴 겨울밤을 연회 없이 보내느라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던 귀족들은 새 황제의 대관식에 입고 나갈 예복을 맞추느라 내로라하는 몸값을 자랑하는 재단사들을 경쟁하듯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금사와 은사를 실은 궤짝이 노새의 등에 실려 쉴 새 없이 공방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교체될 황제의 초상화를 복제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화포를 주문한 상인들 역시 연신 궁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시장의 화덕에서는 새 시대의 선포와 함께 공중으로 뿌려질 사탕 과자가 번들거리는 빛을 내며 구워지고 있었다.
“――.”
노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열에 들떠 갈라진 노인의 입술을 물에 적신 천으로 축여 주며 오웬은 어쩌면 유언이 될지 모를 조부의 속삭임을 듣기 위해 고개를 수그렸다.
연로한 황제의 입술 끝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그 이름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아비의 것이었다. 노인의 치세가 길었던 탓일까. 오웬의 아비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평생을 황태자의 신분으로 지상에 머물렀다. 생애 최초의 추락이었을 자진自盡. 절벽 아래 몸을 던진 아비의 시체가 발견되던 순간부터 오웬은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언제부터 그리 애틋한 부자지간이었단 말인가. 독선적인 성격으로 인해 손안에 쥔 권력, 그 부스러기 하나 제 아들에게 나눠 주지 않아 아비를 더욱 떠돌게 했던 사람이었음을 오웬은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의 시선은 단 한곳만을 향해 있다.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벽,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부유하는 먼지와 이따금씩 튀어 올라 곧 바닥으로 내려앉고 마는 벽난로의 재뿐이었다.
늙고 주름진 손마디가 허공으로 떠올라 이미 죽고 없는 자의 윤곽을 매만진다. 마중이라도 온 것일까. 부친을 데려가기 위해, 먼 저승의 입구까지 안내하기 위해 유령이 되어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일말의 정, 육친애, 그런 것 따위 본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애첩의 뒤를 따라가기 위한 자진이었으니 지금도 그 곁에 머물러 한시도 주위를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조부의 흐린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것은 허상,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을 위한 강령降靈일 따름이었다.
눈물 맺힌 노인의 눈에 어룽거리는 촛불 빛이 떠올랐다. 진물처럼 흘러내리는 조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몸을 돌린 오웬의 손목을 노인이 붙들었다. 쉭쉭거리며 새어 나오는 거친 숨결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몇 마디 음절이 발작처럼 오웬에게로 터져 나왔다.
“폐하!”
황급히 다가온 태의가 노인의 가는 팔목에 날카로운 대롱을 찔러 넣었다. 관을 타고 내려온 붉은 피가 빠르게 놋쇠 그릇의 바닥에 고였다.
“나쁜 피와 함께 몸속의 독소 역시 제거될 것입니다.”
발병 초기 자신감을 내보였던 태의는 황제의 병색이 짙어 감에 따라 그 자신도 병을 앓듯 수척하게 야위었다. 사발 가득 붉은 피를 쏟아 낸 노인이 몸을 뒤틀며 경련했다. 핏발이 선 흰자위가 천장으로 향했다. 제 주인의 임종을 직감한 사냥개들이 목 놓아 울며 문설주를 긁어 댔다. 문 저편에서 접견을 허락받지 못한 친족들이 초조하게 복도를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고개가 침몰하는 선박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경련이 잦아들며 힘이 빠진 노인의 손이 비썩 말라 버린 기생 식물처럼 오웬의 손목에 감겨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호흡하고 있는 노인의 숨을 확인한 태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오웬이 제 손목에 감긴 노인의 손아귀를 풀어냈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던지 그 짧은 사이에 벌써 푸릇한 멍이 올라와 있었다. 젊은 시절 험난한 지형에 겁을 먹고 뒷걸음치는 애마愛馬의 미간을 일격에 내리쳐 죽게 했다는 황제의 손이었다. 흙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처럼 굵은 힘줄이 앙상한 뼈마디를 에워싸고 있다.
힘없이 침상 위로 떨어진 노인의 손가락에서 제왕을 상징하는 푸른 보석이 반짝였다. 살이 빠진 덕에 흘러내리기 일쑤인 반지를 노인은 생명 줄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엄지로 옮겨 끼우곤 했다.
‘――.’
불가해한 조부의 음성이 귓전을 맴돌았다. 지난밤 잠시 이지가 돌아왔던 노인은 오웬을 제외한 모두를 물러나게 한 뒤, 흔들리는 손가락을 치켜들어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 금고를 가리켰다. 성인 남자의 주먹 쥔 손이 겨우 통과할 만한 좁은 공간에 숨겨져 있던 것은 코르크 마개 위로 밀랍을 씌워 봉인한 작은 유리병이었다.
꺼낸 유리병을 침상으로 가져가자 전에 없이 나약하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노인이 오웬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애원하듯, 달래듯 애끓는 표정으로 흐린 초점을 맞추며 노인이 꺼내 놓은 이야기에 오웬의 얼굴 위로 비소가 내려앉았다.
‘미쳤군.’
천하를 호령하던 절대 군주로 시대를 풍미했던 그 역시도 죽음 앞에선 판단력이 흐려지는 모양이었다. 자식과 손자를 앞세우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황제였다. 울면서 그를 찾아갔던 어린 밤, 자신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허황된 전설에 미혹되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
그랬던 그가 오웬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영원한 부와 명예를 나누리라 약속하는 목소리는 헛된 희망에 젖어 달큰한 악취를 풍겼다. 노인이 자신의 손에 쥐여 준 유리병을 오웬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없이 응시했다.
* * *
투병은 길었으되 죽음은 순간이었다.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는 노인의 동공을 확인한 태의가 통곡하며 침상 아래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태의의 지위를 물려받게 될 궁정의가 허둥대며 황제의 승하를 알리기 위해 뒷걸음쳐 사라졌다.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연호하는 시종장의 외침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몰려온 시종들이 소란을 떨며 두꺼운 커튼을 걷어 내고 창틀을 밀어 올렸다. 찬바람에 밀려온 먼지들이 빛 속에서 춤을 추며 제왕의 주검 위로 내려앉았다.
흥분에 찬 귀족들이 궁의 계단을 바삐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란을 보아하니 악화된 조부의 병세로 인해 미뤄 두었던 서류 처리의 재개는 한동안 요원할 듯싶다. 오웬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영면하셨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가 올가의 귀를 꿰뚫었다. 지난 가을, 쇠약해진 황제의 기를 북돋우기 위해 아비에 의해 침실로 던져진 그녀였다. 정식 지위는커녕 앞날에 대한 그 어떤 보장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황제의 상태가 급작스럽게 악화되었다. 충격으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눈앞에서 접견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층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귀족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밀치며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모두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쳐 대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만이 홀로 복도에 남겨졌다. 매일 밤, 꽁꽁 언 노인의 몸을 녹이기 위해 침소로 향하며 그녀는 문안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는 오웬의 뒷모습과 마주치곤 했다. 하다못해 반신이 마비가 된 늙은 황제의 정부가 아니라 황태손의 침실 담당 시녀라도 되었더라면, 하고 바랐던 게 몇 번이었던가.
사방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 끝없이 이어지는 만세 삼창, 귀를 멀게 할 정도로 정신없이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밀쳐진 그대로 붉은 카펫 위에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값나가는 물건을 챙겨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시가 바쁜 후궁들과 달리 그녀는 고작 잊혀진 어린 정부에 불과했다.
변변찮은 재물 한 점 손에 쥐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달갑지 않은 군식구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에 팔려 아이 여럿 딸린 홀아비의 부인으로, 혹은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뒷방 노인의 첩으로 일생을 마감하게 되리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귀에 익은 발걸음이 들려왔다. 늘 멀어져 가던 소리. 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으나 그녀는 오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몸을 돌린 채 바라보곤 했다.
고귀한 이여, 아름다운 이여.
이제는 황제가 된 청년이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새 시대의 영광 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으리라.
* * *
황제의 서거는 발 빠른 파발에 의해 각 공국으로 전해졌다. 제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남부에 위치했기에 알훼니아의 요아힘 대공은 선황제의 장례식이 끝나고도 한 달이 지난 후에야 사신으로부터 새 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칙서를 받을 수 있었다. 문서에는 금과 은, 피륙, 각종 향신료와 같은 물품에서부터 화공, 악공의 인신 조공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조공품의 명단이 제국의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중 하나의 항목이 대공의 얼굴에 깊은 시름을 드리웠다. 제국과 공국 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각 공국의 통치자는 제 피붙이 중 혼인하지 않은 자를 골라 황제의 후궁으로 바쳐야 했다.
오랜 세월 각 공국에서 바쳐진 후궁 중에서 황제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이 황후의 자리에 올라 고국에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들은 인질이자 밀정이 되어 궁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였다. 선황제 시절 후궁으로 갔다던 알훼니아의 공녀는 차가운 제국의 기후를 견뎌 내지 못한 채로 향수병에 걸려 서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현재 요아힘의 가계 내에서 혼인하지 않은 공녀는 단 한 명, 이제 막 여섯 살의 생일을 맞이한 대공의 딸, 마티아뿐이었다. 공녀를 후궁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제국파 수장들과 공국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젊은 관료들 간에 격정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된 회의 끝에 황제의 후궁으로 보낼 적임자가 결정되었다. 스물넷이 되도록 성혼하지 않아 대공의 속을 썩이던 사내 귀족, 요아힘의 막냇동생 프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