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99. 밝혀진 운명
눈을 뜨자 낯선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안개가 한가득 끼어 있는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여긴 어디지.’
시선을 내리자 검은 정장 소매와 흉터로 가득한 손이 보였다. 난 권세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일단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어디인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일단 움직여 보는 수밖에.
그렇게 몇 걸음 옮긴 그때였다. 하늘거리는 안개 너머로 인영이 보였다.
‘…연선우?’
뒤돌아서 있는 상대의 모습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잠깐…….”
“기다려.”
다급히 상대를 따라가려던 내 손목을 뒤에서 누군가가 강하게 붙잡아 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는 어깨를 흠칫 좁혔다.
손목이 잡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얼굴이 흐릿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안개 때문인가? 아니, 하지만 이 묘한 기운은…….
“왜 반대로 가?”
“…반대?”
“출구는 여기야.”
남자가 몸을 비켜서자 어깨 너머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아치형의 문이 보였다.
저기가… 출구라고? 그럼 방금 내가 본 사람은? 연선우가 아닌 건가?
미련이 남아서 자꾸만 뒤를 힐끔거리는 내 모습에 손목을 잡은 남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거야?”
“아니, 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가 이내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이런 수상쩍은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봤자 그리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남자가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날 믿어.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여기로 나가야 해. 여기 말고는 없어.”
“그쪽은 이곳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난 항상 여기 있으니까.”
나를 손수 문 앞까지 안내해 준 남자는 까칠한 태도로 말했다.
“이곳에서 뭘 봤든 그건 다 가짜야. 네가 해야 할 건 이 문을 열고 나가는 것뿐이고.”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 어서.”
남자가 내 손을 문손잡이 위에 올려 줬다.
이곳에서 뭘 봤든 그건 다 가짜라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말이었지만 왠지 의심은 들지 않았다.
천천히 손에 힘을 줘서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남자가 미소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개 때문에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자 찬란한 빛과 함께 따스하고 부드러운 순풍이 불어왔다. 나는 그제야 새하얀 안개가 가뜩 끼어 있는 이곳이 얼마나 이질적이고 소름 끼치는 장소인지 깨달았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출구로 안내해 준 상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지?”
“도와주면 안 돼?”
내게서 한걸음 물러선 상대가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도와주잖아.”
“뭐?”
“잘 가, 권세현. 여기 다시는 오지 마.”
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상대의 모습을 가렸던 안개가 조금 옅어졌다.
빛에 시야가 모두 잠기기 직전, 나는 흩날리는 상대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갈색인 것을 깨달았다.
***
삐이, 삐. 의식이 점차 선명해졌다.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심장 박동 측정기에서 나는 일정한 기계음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천막으로 이뤄진 천장이 보였다. 시선을 내려 몸을 살펴봤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몸은 어디 하나 불편한 구석 없이 멀쩡했다. 권세현이었던 신체도 한이결로 돌아와 있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하지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괜히 이마만 긁적이다가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천막 입구로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정신이 드나?”
“천사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조금 놀랐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 가까이 걸어온 천사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수척한 얼굴을 마주하자 기절하기 전에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권정한은? 괜찮은 거야?”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난 주제에 남 걱정이나 하고.”
침대 옆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천사연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정한은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치료받고 지금은 멀쩡해.”
“치료… 혹시 아테나 길드에서?”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클로에가 베이스캠프에 의료팀과 지원팀을 대기시켜 놓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천사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테나 길드가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거다. 너도, 권정한도, 그리고 박건호도.”
나지막이 덧붙인 이름에 가슴 속이 무거워졌다.
“박건호 팀장님은…….”
“계단에서 먹었던 석류알이 내장을 녹여 버렸더군. 하태헌이 조금이라도 늦게 움직였으면 너와는 다른 의미로 배에 구멍이 뚫렸겠지.”
기절하기 직전에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박건호의 명치를 때려서 석류알을 토해 내게 한 하태헌의 행동이 박건호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심한 화상을 입었던 우서혁도 치료가 끝났으니 더 걱정할 필요 없다. 팀원들 모두 다른 치료실에서 자고 있고.”
“다행이네.”
다들 무사하다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됐다.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는 나를 조용히 응시하던 천사연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그가 곧이어 입을 열었다.
“네가 제일 위험했어.”
“…….”
“네가… 제일 위험했다고, 한이결.”
아주 작게 중얼거린 천사연의 목소리에는 원망의 감정이 짙게 서려 있었다.
“권정한도 심하게 다쳤지만 목숨이 위험하진 않았어. 아자젤의 공격으로 어깨와 옆구리가 뚫렸어도 그건 결국 S급의 공격이니 뚫린 살점을 채우고 회복시키기만 하면 되니까.”
“…….”
“그런데 너는…….”
천사연이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렸다. 그가 보여 주는 불안정한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 SS급 검에 찔려서, 힐러 여럿이 능력을 써도 쉽게 낫지 않는 너를 보고 내가…….”
“천사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 못했어. 내가 가진 무기가 결국 너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천사연, 고개 들어 봐.”
나를 피하는 천사연의 얼굴을 붙잡아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손으로 가렸던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에는 불안과 죄책감이 가득 차 있었다.
“쓸데없는 상상하지 마. 나 안 죽었어. 멀쩡히 살아서 너랑 대화하고 있잖아.”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어쩔 수 없는 상황?”
천사연이 입술을 비틀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내 손길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무너지는 게이트에서 조금만 더 늦게 빠져나왔거나, 대기 중이던 힐러가 한 명이라도 부족했다면… 네가 조금이라도 버티지 못했으면…….”
“…….”
“그중 하나라도 안 됐으면 너는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었을 거다. 한이결, 너도 알고 있잖아.”
“아자젤을 죽이고 우리가 그곳을 벗어나려면 그게 최선이었어.”
나라고 권정한을 방패로 세워 놓고 총을 들고 싶었을까. 박건호가 석류알을 먹은 시점에서 모두가 안전한 길 따위는 이미 없었다.
내 정체와 개입 능력을 알아낸 프라우스 신도단 입장에서 처리해야 할 1순위 인물은 무조건 나였다. 그러니까, 박건호의 공격에 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 실수고 내 문제였다. 나도 안다.
‘이제 와서 그걸 자책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자칫하다간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다. 그 결과 아자젤은 죽었고 우리는 위험하긴 했지만 무사히 밖으로 나와서 치료받을 수 있었다.
잘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그걸 천사연이 모를 리가 없는데.
‘설마…….’
내가 자신의 무기에 찔려 죽을 뻔했던 탓에 정신적으로 흔들린 건 이해한다. 그러나 천사연의 말에 담긴 뜻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런 대화는 예전에도 했었다. 그때 느꼈던 서늘한 기분과 위화감을 또다시 느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천사연에게 물었다.
“천사연.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설령 내가 죽더라도 아자젤을 공격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던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근데 왜 이런 식으로 얘기해. 이러니까 마치…….”
마치 나보고 프라우스 신도단과의 전투에서 빠지라는 것 같잖아. 미국에는 혼자 갈 테니 나는 족쇄를 채우고 한국에 남아 있으라고 했던 예전처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천사연의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정말로 그런 의도로 한 얘기라면… 내가 받게 될 상처가 정말 클 것 같아서.
병실의 공기가 딱딱하게 경직됐다. 싸한 침묵 속에서 천사연이 먼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하려던 말이 뭔지 뻔히 알면서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직 밤이야. 일어나지 말고 더 쉬도록.”
대화를 회피한 채로 천막을 나가는 천사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천사연이 어떤 심정인지 공감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자젤이 죽은 지금, 남은 건 사마엘과 칼리였다. 가장 중요한 만큼 위험한 두 존재와의 전투를 앞두고서 개입 능력을 가진 내가 빠지면 승산이 없다.
그걸 알면서도 저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걱정스러운 거겠지. 특히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뻔했으니 더 두려울 거고. 그 마음을 생각하면 나도 천사연이 원하는 건 들어주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어려웠다.
‘나를 조금만 더 믿어 주면 좋겠는데.’
저지른 일이 있으니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했다. 쓰게 웃으며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매만졌다. 붉은 보석이 조명에 반짝였다.
미안, 천사연. 나도 이제는 물러설 수 없어.
‘칼리.’
천사연의 꿈속에서 봤던 선명한 와인 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아자젤을 이용해서 나를 죽이려고 했겠지. 천사연이 절망하고 모든 걸 포기하도록. 아쉽지만 그 계획은 실패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건 너로부터 천사연과 세계를 지킨 다음이다. 다른 결말은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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