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형.”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강한 탄내가 맡아졌다.
“정신 차려요.”
나를 깨우는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부터 감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가 보였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주저앉은 채로 힘없이 내린 양손이 붉게 부어 있었다.
“형.”
앞에서 나를 껴안고 있는 이가 속삭였다. 겨우 고개를 들자 내 손처럼 얼굴과 몸이 여기저기 붉게 물든 권정한이 애써 웃었다.
그제야 기절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적에게 조종당한 박건호가 내게 검을 휘두른 것에 그치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든 쇠구슬을 폭파시켰다.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어 입을 조금 열자마자 울컥하고 액체가 쏟아졌다. 피였다.
“의외로 목숨이 질기네요.”
조롱의 말이 들려왔다. 권정한의 어깨 너머로 아자젤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박건호는…….’
입 밖으로 흐르는 피를 내버려 둔 채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다시 한번 나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검날을 누군가가 손으로 붙잡았다.
검날을 움켜쥔 우서혁의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그도 역시나 폭발에 휘말려 온몸이 화상투성이였다.
“쯧!”
박건호의 공격이 막힌 것을 확인한 아자젤이 혀를 차고는 품에서 이동 아이템이 아닌 다른 것을 꺼내 들었다.
삐이익, 그녀가 손에 든 것을 조작하자 귀를 찌르는 소음이 울려 퍼지며 천장에서 새빨간 색의 통로 세 개가 열렸다.
크에엑! 키익! 키아악!
쿠웅, 쿵. 천장에서 생겨난 통로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에게로 달려오던 팀원들이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를 마주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무 마리도 되지 않는 숫자였지만 평소와 달리 빠른 처리가 힘들었다. 아자젤의 요구로 팀원들이 떨어트린 무기가 아직도 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심지어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천사연과 하태헌, 김우진이 다였다.
박건호는 정신 지배에 걸려 있었고, 우서혁은 그런 박건호를 막는 데 급급한 상황이었다.
“허억, 헉…….”
“형, 안 돼요. 정신 차려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의식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내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권정한이 애원하듯 말했지만 대답할 여력조차 없었다.
‘어떡하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생각했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이대로 팀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아니면 박건호에게 개입 능력을 써 보는 것?
하지만 이 몸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건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컸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건…….
툭. 손끝으로 차가운 금속이 닿아 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눈동자를 굴리자 총신이 기다란 총이 내 손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김우진이 싸울 때 사용하는 아이템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총을 쥐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친 채로 총을 들어 올려 흩날리는 연기 너머로 보이는 아자젤을 조준했다.
제게로 향한 총구를 발견한 아자젤의 입술이 불쾌한 듯 비틀렸다.
“정말 지긋지긋한 목숨 줄이네요. 당신들 모두.”
끝까지 무기를 놓지 않은 나를 비웃은 아자젤이 엄지와 검지 끝을 맞붙여 둥근 모양으로 만든 손을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이제 그만 뒤져, 멍청한 새끼야.”
내가 방아쇠를 당긴 동시에 아자젤이 구멍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콰직, 살점과 뼈가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총성과 뒤섞여 귓가에 들려왔다.
최악은 심장이 뚫리고 운이 좋으면 어깨가 날아가리라. 그렇게 각오했던 나는 통증 대신에 목덜미에 닿아 오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각을 느꼈다.
후두둑, 피가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권정한이 입고 있는 상의의 왼쪽 어깨 부근이 빠른 속도로 붉게 물들었다.
“괜찮아요.”
총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자젤이 희미하게 보일 만큼 내 모든 신경이 작게 들려오는 권정한의 목소리에 집중됐다.
“제가…….”
방패가 되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권정한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댔다. 몸을 짓누르는 고통에 뜨겁게 타오르던 머릿속이 덕분에 차갑게 식었다.
내 앞을 막아 주는 권정한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했다. 고통도 혼란도 모두 사라졌다.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눈앞에 아자젤을 노려봤다.
“시발!”
허벅지에 총을 맞은 아자젤이 비틀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대로 서지 못하는 그녀 앞에는 이동 아이템이 금이 간 채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내게는 천운이 내린 기회였다. 금방이라도 총을 놓칠 것처럼 후들거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줘서 총구를 조준했다.
“하아, 하아…….”
내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울려 퍼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현기증이 일어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자신의 실수로 도망갈 때 사용할 아이템을 망가뜨린 아자젤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급히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끈질긴 벌레 새끼들!”
흐릿한 시야에도 내 목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실수하지 않는다. 총이라면 이미 수십 번도 넘게 잡아 봤으니까. 권정한이 제 몸을 방패로 바치면서 겨우 만들어 준 이 기회를 절대 허투루 소모하지 않을 거다.
아자젤과 내가 서로를 겨냥했다.
타앙, 날카로운 총성에 이어서 김우진의 총이 손에서 짧게 흔들렸다. 내 손이 방아쇠를 당긴 직후에 아자젤이 능력을 사용했다.
총에서 빠져나간 총알이 허공을 갈라 내가 노렸던 목표를 정확히 꿰뚫었다.
“끅…….”
아자젤의 미간에 둥근 구멍이 뚫리면서 한줄기 피가 솟구쳤다. 눈을 감싼 가면이 반으로 갈라져 아래로 툭 떨어졌다.
처음으로 아자젤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아자젤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천천히 뒤로 넘어간 아자젤은 그대로 쓰러졌다.
“커헉……!”
내게 안겨 있는 권정한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이번에는 옆구리가 피로 물들었다.
“으…….”
미친 듯이 떨리는 손이 총을 떨어트렸다. 나는 바닥을 구르는 총을 내버려 두고 축 늘어진 권정한을 불렀다.
“헉, 권정한…….”
나처럼 입으로 피를 토해 낸 권정한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급히 권정한을 눕히고 인벤토리에 손을 올렸다.
빨리 움직여서 권정한을 치료해야 하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아…….’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회색빛 바닥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바닥으로 무너지는 몸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겨우 꺼낸 치료 아이템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권정한도 치료해야 하고, 박건호에게 개입 능력도 써 줘야 하는데, 마음과 달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몰려오는 지독한 수마에 눈이 자꾸만 감겼다. 찬 바닥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오한이 밀려와 피부에 소름이 돋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저 멀리에서 박건호를 막아서는 하태헌이 보였다. 그가 박건호가 쥐고 있는 검을 뺏고서 복부를 강하게 때렸다. 그러자 박건호가 검붉은 피와 함께 아까 먹었던 석류알을 뱉었다.
“한이결…!”
누군가가 나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리서 들려왔다. 그걸 끝으로 정신이 툭 끊어졌다.
***
“한이결…!”
천사연이 쓰러진 권세현에게 급히 다가갔다. 그 뒤를 민아린과 김우진이 쫓았다.
“한이결, 안 돼!”
권세현과 권정한에게 다가가자 피 냄새가 짙게 풍겼다.
천사연은 창백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입가에 닿은 손가락에 옅지만 확실하게 숨결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 둘 다 아직 살아 있었다.
“민아린 힐러!”
“네!”
권세현의 주변에 떨어져 있는 치료 아이템을 주운 민아린이 즉시 기운을 끌어 올렸다.
본래라면 의사와 함께 수술을 진행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권세현과 권정한 둘 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입술을 깨문 민아린이 가장 심한 권세현의 복부부터 치료하려고 능력을 사용하려던 그때였다.
쿠구궁!
굉음과 함께 주변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가루에 여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공간이 무너지고 있어.”
권세현을 살피던 여우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무기랑 부상자 챙겨. 바로 여길 빠져나가야 해.”
“길을 아나?”
“균열이 가장 심한 곳으로 갈 거야.”
동물 모습이었을 때처럼 공중을 날아오른 여우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한이결처럼 너희를 바람으로 이끌어 줄 수 없으니 알아서 잘 따라와. 한 명씩 일일이 챙기는 건 불가능하니까.”
천사연이 권세현을 안아 들고 권정한은 김우진이 업었다. 민아린과 석류알을 토해 내면서 그대로 기절한 박건호는 거대한 늑대로 변한 우서혁의 등에 올려졌다.
쿠궁, 쿵!
그사이에 공간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는지 천장에서 커다란 돌 파편이 마구잡이로 떨어졌다.
여우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앞을 가로막는 파편들을 피하며 앞장서서 날아갔다.
“쿨럭…….”
천사연의 품에 안겨 있던 권세현이 정신을 잃은 상태로 입에서 또 피를 쏟아 냈다. 이성이 아득해질 정도로 강한 혈 향에 천사연이 초조한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제발…….’
심장이 조여드는 불안감에 권세현을 안고 있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쿠웅, 바로 앞에 떨어지는 거대한 파편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김우진이 뒤를 돌아봤다. 뿌옇게 일어난 연기와 쏟아지는 파편들 틈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가 보였다.
권세현이 쏜 총에 미간이 정확히 뚫린 아자젤은 그대로 사망했다. 그녀의 시체 옆에는 깨진 가면과 함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신 상태였다. 이제는 그 시체 위로 파편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김우진이 한때 자신을 죽음 가까이 끌고 갔던 적의 말로를 눈동자에 담았다. 아자젤은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지하 미로와 함께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다.
김우진은 어쩐지 복잡해진 기분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이곳을 빠져나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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