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아자젤이 픽 웃음을 흘렸다.
“뭐, 좋아요. 그간 봐 온 정을 생각해서 좋은 정보를 하나 더 알려 줄게요. 왜 이런 공간을 만들어서 당신들을 초대했는지 궁금하겠죠?”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아자젤은 막힘없이 떠들었다.
“이것도 대답해 주기 쉽네요. 여긴 하나의 무대예요.”
“무대?”
“만났잖아요? 그분을.”
그분. 무심코 어깨가 조금 떨렸다.
“그분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예전부터 말씀하셨거든요. 사마엘 님은 그분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고요.”
“…고작 천사연의 꿈을 통해서 나를 만나기 위해 여길 만들었다고?”
“네, 맞아요.”
되묻는 말에 곧바로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그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요? 제가 지금 당신들을 만나러 온 이유도 목적이 달성됐으니까 온 거예요. 덕분에 이 쓸쓸한 곳에서 한참을 기다렸죠.”
목적이 달성됐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화감에 눈가를 좁혔다.
칼리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해서 사마엘이 손수 이만한 미로를 만들어 냈다는 걸 과연 순순히 믿어도 되는 걸까.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사마엘이 아무리 칼리를 숭배한다지만 고작 그 이유 하나로 이렇게 공들여서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나? 더 간편하고 쉬운 방법이 있을지 모르는데 굳이?
그리고 시간 순서를 보면 사마엘은 이곳을 광화문 테러를 벌이기 직전에 만들었다. 그 당시 우리는 아자젤에게서 고문당한 김우진을 구해 내고 미술관 사건으로 입은 타격을 회복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아무런 반격을 할 수 없던 그 귀중한 타이밍을 고작 칼리와 나를 만나게 해 줄 공간을 만드는 데 썼다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갔다. 무엇하나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사마엘이 워낙에 파악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여 준 탓에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잡담은 여기까지 할까요?”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아자젤이 더 고민하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바꿔 버렸다.
“제가 당신들에게 원하는 건 딱 한 가지예요. 제 목숨의 안전. 하지만 당신과 저 사이에 워낙에 신뢰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 두 명이 필요한 거죠.”
“거래를 하자는 건가?”
“그렇죠. 저라고 당신들을 혼자서 상대하고 싶었겠어요? 사마엘 님의 명령으로 억지로 온 거니까 배려 좀 해 주시면 좋겠네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아자젤이 우리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단 나머지 분들은 뒤로 좀 빠져 주세요. 무서우니까. 제 바로 옆에는 인질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
“이, 이결 씨.”
아자젤의 요구를 들은 팀원들이 저마다 시선을 나눴다. 다들 날 혼자 두고 거리를 벌려야 하는 이 상황을 불안해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민아린을 본 아자젤이 잠깐의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한이결 능력자가 걱정되나요? 흐음, 그럼 딱 한 명만 남도록 허락해 줄게요.”
“뭐?”
“누가 좋으려나.”
당황하는 나를 두고 아자젤이 입가를 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니, ‘고민하는 척’인가?
아자젤은 사마엘만큼이나 눈치가 빠르고 타인의 감정을 이용할 줄 아는 자였다. 우리 앞에 나타나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거짓말을 몇 번을 했을지, 꾸며 낸 행동이 얼마나 많을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 명 더 내 곁에 두는 건 나쁘지 않아.’
한 명만 더 있어 준다면 문제가 터졌을 때 우서혁과 권정한을 더 안전하게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굴 선택하려는 거지? 민아린?’
권정한이 인질로 잡혀 있는 지금, 제일 약한 존재는 민아린이었으니 가장 가능성이 컸다.
만약 민아린을 뽑는다면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머리를 굴리던 그때였다. 아자젤의 손가락이 누군가에게 향했다.
“그쪽이 좋겠네요.”
아자젤이 선택한 사람은 놀랍게도 박건호였다. 지목당한 박건호도 설마 자신을 고를 거라곤 예상 못 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민아린이 아닌 박건호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불길한 예감만 커졌다.
“뭐 해요? 두 사람 제외하고 나머지 분들은 뒤로 물러나세요. 아, 무기는 알아서 바닥에 버리시고.”
“…….”
“설마 제가 바보도 아니고 무기를 내버려 둘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인벤토리에 넣어 둔 무기까지 다 꺼내서 바닥에 던지세요.”
조용히 넘기려고 했던 부분을 아자젤이 정확히 짚어 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팀원들에게 눈짓했다.
철컹, 바닥으로 무기가 떨어졌다. 천사연이 가진 릴리스의 검과 S급 검, 하태헌의 검, 김우진의 총 두 자루와 쇠구슬이 차례대로 버려졌다.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무기들을 찬찬히 훑어본 아자젤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좋네요. 이제 제가 지목한 두 사람 말고는 다 뒤로 물러나세요.”
“어디까지…….”
“당연히 제가 만족할 때까지죠. 미리 말해 두지만 전 인질들을 단숨에 죽일 능력이 있어요. 특히 이쪽 정신계는 제가 숨만 쉬어도 위험해질 텐데.”
아자젤이 보란 듯이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끝을 맞대고 둥근 모양을 만들었다. 그 손 모 양에 나는 아자젤의 능력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손가락으로 만들어 낸 저 둥근 모양에 아자젤이 숨을 뱉어 내면 강한 충격파가 생겨난다.
아자젤은 S급으로 등급이 낮지도 않으니 위력 또한 굉장히 강할 것이다. 권정한을 단숨에 죽일 수 있다는 말은 진짜였다.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아요.”
아자젤의 마지막 경고에 결국 팀원들이 경직된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열 걸음을 넘어 스무 걸음에 가까워질 동안 아자젤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쯤이면 충분하네요.”
그 말에 뒤를 돌아보자 내 예상보다 훨씬 멀어진 팀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을 감싼 어둠이 뒤로 물러선 팀원들을 금방이라도 삼킬 것 같았다.
이 정도 거리면 아무리 SS급인 천사연과 하태헌이라 해도 합류까지 5초는 걸릴 것이다. 그 5초 안에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하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완벽하네요.”
내 옆에 박건호가 나란히 섰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아 왔다.
‘침착하자…….’
지금 이 순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질로 잡혀 있는 우서혁과 권정한의 안전이었다. 저 둘만 돌려받는다면 상황이 우리에게로 넘어온다.
“이제 뭘 시킬 거지?”
“당연히 교환해야겠죠? 거래의 기본이니까.”
아자젤이 손짓하자 여태껏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우서혁과 권정한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아자젤의 인형이라도 된 듯한 모습에 속이 뒤집혔다.
“저는 이제 뒤로 빠질 거예요. 인질을 넘겨 주고 나서 바로 이동 아이템을 쓸 테니까, 인질은 마음대로 하세요. 개입 능력이라고 했든가? 그걸 쓰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테니 제가 더 해 줄 건 없죠?”
딱, 아자젤이 손가락을 튕기자 우서혁과 권정한이 아자젤을 지나쳐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뒤로 물러선 아자젤은 우서혁과 권정한이 내게 다가오는 걸 그저 지켜만 봤다.
‘뭐지?’
정말로 이대로 인질을 돌려준다고? 대체 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아자젤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칠 뿐이었다.
“권정한. 우서혁 씨.”
그사이 막힘없이 내게로 걸어온 우서혁, 권정한과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권정한과 우서혁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한이결. 개입 능력부터 써.”
“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둘에게 걸려 있는 정신 지배부터 당장 풀어야 했다.
비록 눈앞에 있는 아자젤을 붙잡을 절호의 기회긴 했지만, 두 사람이 정신 지배에 걸려 있는 이상 아직은 인질로 잡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자젤의 명령으로 갑자기 자해할 수도 있고,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아자젤을 놓치더라도 두 사람의 안전을 온전히 얻어 내려면 당장 개입 능력으로 기운의 실을 끊어 내야 했다.
이미 권세현으로 변해 있는 상태라 개입 능력을 더 빠르게 쓸 수 있었다. 나는 급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내 몸에서 권세현의 기운이 흘러나온 것을 느낀 아자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역시 기운의 실이 연결되어 있어.’
몇 번이고 봐 온 피가 묻어 있는 기운의 실이 우서혁과 권정한의 머리에 이어져 있었다. 그걸 끊어 내기 위해 막 손을 든 그때였다.
푸욱, 무언가 꿰뚫리는 오싹한 소리와 함께 복부에서 끔찍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강한 고통으로 자연스럽게 능력이 중단됐다.
“……쿨럭!”
배 중앙에 날카로운 검 끝이 불쑥 솟아 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목에서 뜨거운 액체가 울컥 터져 나왔다.
“크윽, 허억…!”
익숙한 검날.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 전에 배에 꽂힌 검이 거칠게 뽑혀 나갔다. 바닥으로 피가 쏟아지며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나는 상체를 숙인 채로 피를 토해 냈다. 입고 있는 옷이 피에 젖어 질척했다.
“왜…….”
힘겹게 고개를 뒤로 돌리자 천사연의 검을 들고 있는 박건호가 보였다. 깨끗했던 검날은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팀, 장님…….”
내게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차가운 눈동자. 그제야 박건호가 먹었던 석류알의 정체를 깨달았다.
‘안 돼.’
쿨럭! 또다시 피가 목 너머로 솟구쳤다. 당장에라도 끊길 것만 같은 정신에 무릎을 꿇은 채로 능력을 사용했다.
“으, 흑…….”
이 상태로 능력을 사용하자 온몸이 과부하에 걸려 비명을 내질렀다. 몸속의 장기가 모조리 끊기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이 번져 갔다.
한계까지 치달은 정신에 눈앞이 흐려졌다. 아슬아슬하게 능력이 써졌는지 사라졌던 기운의 실이 다시 나타났다.
“한이결…!”
물에 잠긴 듯이 멀어지는 감각 속에서 팀원들이 나를 불렀다.
그걸 들으며 기운의 실을 끊어 내자마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쇠구슬이 일제히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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