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포기해. 도와주지 마. 그게 천사연이 지옥을 벗어나서 편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칼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때 되면 남은 게 없을 테니 결국 죽겠지만… 그런 결말도 괜찮겠지. 천사연은 줄곧 진심으로 죽고 싶어 했으니.
고개를 숙이자 피투성이였던 꿈속과 달리 깨끗한 천사연의 손목이 보였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무시한 채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천사연.”
“…….”
“내가 약속했잖아.”
칼리의 뜻대로 되도록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방금 꿈속에서 봤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아무도 살지 못하는 미래가 정말로 칼리가 원하는 거라면… 천사연과 세계가 함께 고통받는 그런 결말은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게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분했다.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도 칼리를 이길 수 없어서. 칼리가 뱉어 낸 잔인한 말로부터 천사연을 온전히 지켜 주지 못해서.
“만약 이번에 실패한다 해도 내가 어떻게든 다시 찾아갈 테니까…….”
애써 희망을 품고 이야기해 봤지만 결국 끝을 맺지는 못했다.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가능성이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을 다르게 왔었다면…….’
내가 죽지 않았다면, 멀쩡히 살아서 개입 능력으로 이곳에 왔었다면, 시간이 돌아가도 내가 살 수 있다면.
모두 다 의미 없는 바람이었다.
***
심적으로 많이 지친 권세현을 위해서 잠깐이라도 쉬고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아직 우서혁과 권정한을 만나지 못했지만, 직접 꿈에 들어가서 팀원들을 깨울 권세현의 정신이 저렇게 흔들렸으니 당장은 휴식이 필요했다.
“금방 깨어나길래 큰일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하태헌이 소리 낮춰 한 말에 천사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꿈에서 만난 권세현이… 실제라고는 예상 못 했어.”
천사연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고 앉아 있는 권세현을 살폈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여우를 품에 안고 있는 권세현의 곁에는 민아린과 김우진이 진땀을 빼며 달래 주고 있었다.
‘내 꿈이 만들어 낸 권세현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칼리가 원하는 대로 재앙이 되어서 세계를 무너뜨리는 꿈은 셀 수 없이 꿨다. 그 속에서 칼리가 찾아온 경우도 많았다.
저마다 욕망을 구현한 꿈을 꾸게 하는 이 미로에서 어찌 보면 가장 평탄한 꿈을 꾼 걸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칼리가 권세현에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그 꿈을 꾸게 한 것 같다.
“그 여자가 하는 말이야 언제나 똑같으니 나는 이젠 별 감흥이 없다만, 권세현은 그러지 못했겠지.”
제 실수였다. 권세현이 받을 충격을 고려했어야 하는데.
“꿈에서 칼리라는 그 존재를 직접 만난 건가.”
“그래. 내 꿈을 통해서 권세현을 만나고 싶었다더군. 둘이 대화도 했으니.”
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하태헌이 짜증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목적을 따져 보면 무슨 소리를 지껄였을지 안 봐도 뻔하군.”
눈치 빠른 하태헌은 뒷얘기를 듣지 않고도 단번에 상황 파악을 끝냈다. 천사연은 부정하는 대신에 빙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권세현이 나 대신 한 소리 해 줬으니 우리 하태헌 부마스터까지 화내 줄 필요는 없는데.”
하태헌이 질색하며 천사연을 노려보고는 자리를 떴다. 권세현에게로 걸어가는 하태헌의 등을 바라보며 천사연은 꿈을 다시 떠올렸다.
-천사연.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돌아가자…….
알아. 그딴 폐허가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현실일 리가 없다.
꿈속에서 자신은 칼리에게 정신이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곳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권세현도 그 꿈의 일부라고 생각한 건 부끄럽지만, 그가 자신에게 해 준 위로를 듣고 마음이 흔들려서 어쩔 수 없었다.
칼리에게서 제 편을 들어 주고, 대신 화내 주고… 현실로 돌아가자고 안아 주던 권세현이 진짜였다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미안하면서도 행복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기 위해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며 권세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좀 진정됐어요, 이결 씨?”
“네, 죄송합니다…….”
권세현이 머쓱한 기색으로 사과했다. 한참 울어서 그런지 아직도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 얼굴을 하고서 눈가만 붉으니 굉장히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좀 처연해 보이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게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권세현은 마치 그림 같았다.
이때의 기억은 아마 평생을 가겠지. 자신뿐만 아니라 권세현이 우는 모습을 본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천사연은 씁쓸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우린 정말 너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돼, 이결아.’
***
30분 정도 쉬는 김에 우리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공유했다.
한 명씩 차례대로 만나고, 숨 돌릴 틈 없이 미로를 헤매고 다닌 탓에 한 번쯤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박건호 팀장은 이상한 거 주워 먹었고 그 하얀 먼지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가?”
“맞긴 한데 그걸 꼭 그런 식으로 요약을…….”
“박건호 팀장은 그 나이가 되고도 아무거나 입에 넣으면 안 되는 걸 모르는 건가?”
중재하려는 내 노력에도 천사연은 박건호에게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박건호는 적나라한 비난에도 기분 상한 기색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이결 능력자를 울린 마스터보다야 쓸데없는 거 주워 먹은 제가 더 낫지 않을까요?”
“…….”
“…….”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나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피해 죽겠네, 진짜…….’
겨우 화제를 돌려놨더니 박건호 저 자식이 원상 복귀 시켜 놨다.
한바탕 울고 난 뒤에 나를 자꾸만 힐끔거리고 신경 쓰는 팀원들, 특히 민아린과 김우진 때문에 안 그래도 불편한데 박건호 때문에 더 불편해졌다.
“그만하시죠. 일단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그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 쉬었으니까 이제 우서혁 씨와 권정한을 찾으러 가죠. 두 사람도 꿈에 갇혀 있을 테니까.”
“더 쉬어도 괜찮아요, 이결 씨.”
“아뇨. 쉴 만큼 쉬었습니다.”
운 거야 그럴 수 있지만, 팀원들이 이렇게 내 눈치만 보는 건 별로였다. 일부러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여우에게 물었다.
“남은 사람은 어디 있어?”
피익!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 좋게 울던 여우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황급히 내 품에서 벗어났다.
“여우?”
새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여우는 순식간에 사람으로 변했다. 여우가 눈가를 찌푸린 채로 외쳤다.
“한이결, 능력 써! 바람…….”
여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싹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
여우가 알려 준 대로 급히 바람을 끌어 올려 팀원들의 몸을 감쌌다. 여러 명의 무게를 감당한 탓에 한이결의 기운이 확 줄어들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새까만 어둠이 잠시 스쳐 지나가고 이제까지 봤던 것과 똑같은 벽으로 이뤄진 방이 나타났다. 내 바람 능력 덕분에 팀원들 모두 다친 곳 없이 안전하게 착지했다.
깊이 떨어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어서 와요.”
느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고개를 들자 눈 부근만 가려지는 가면을 쓴 아자젤이 보였다.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에 내가 느낀 기운의 주인은 아자젤이었다.
“예상보다 오래 걸렸네요. 소풍 온 거라고 착각이라도 했어요?”
손톱을 매만지며 심드렁히 중얼거리는 아자젤의 뒤로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우서혁과 권정한이었다.
‘둘 다 상태가…….’
초점 없는 눈과 무표정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정신 지배라도 걸린 상태인 건가?
개입을 써서 둘에게 걸린 능력을 없애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자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내가 개입으로 기운을 끊어 내기 전에 아자젤이 둘을 공격할 가능성이 컸다.
우리들의 시선이 제 뒤편으로 향한 것을 알아챈 아자젤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미소 지으며 권정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참, 친구분들은 제가 좀 빌렸어요. 이해하죠? 저 혼자 당신들을 상대하려면 저도 보험이 좀 필요하니까.”
“…왜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지?”
이성을 잃은 권정한과 우서혁을 마네킹처럼 세워 두고 우리를 홀로 상대하고 있는 아자젤은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아니, 사실 따져 보면 이 공간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사마엘이 직접 만들었다는 이 지하 미로는 위험하긴 했지만, 우리를 몰살시킬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우리에겐 도움을 줄 엘로힘과 엘라하가 있고 내 개입 능력도 있다. 기운에 예민한 여우의 존재는 프라우스 신도단도 알지 못했겠지만, 만약 여우가 없었다고 해도 여길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질문의 뜻을 모르겠네요. 제가 당신들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건가요? 오히려 기회일 텐데.”
짙은 미소를 지은 아자젤이 이어서 말했다.
“제 뒤에 서 있는 두 명이 어떻게 되든 무시하고 저를 공격하면 되잖아요? 만약 저를 여기서 죽일 수 있다면 당신들에게도 아주 작은 희망이 생기니까.”
“…….”
“하지만 그러지 않겠죠. 그걸 아니까 온 거예요.”
이 타이밍에 우리 앞에 나타난 것 자체가 계획이라는 의미인가. 처음부터 두 명을 인질로 잡을 생각이었을 수도 있고.
‘좋지 않아.’
에드워드에게 미리 받아 둔 치료 아이템도 있고 민아린도 있으니 크게 다치더라도 우서혁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권정한은 아니었다.
만약 아자젤이 당장에라도 무기를 꺼내서 우서혁과 권정한에게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목덜미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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