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98. 어떤 의도
뒤늦게 천사연이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급히 천사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 나를 잠자코 지켜보던 칼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실제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반갑네.”
“…실제?”
“슬슬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좀 빌렸어.”
다정한 음성으로 건네는 말에 입매가 절로 비틀렸다.
장소를 빌려? 그 빌렸다는 장소가 천사연의 꿈속이고? 마치 천사연이 본인의 소유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말하는 태도가 굉장히 불쾌했다.
“음,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진 알겠는데… 그렇게 나쁘게 듣진 않아도 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는 기색으로 턱을 괸 칼리가 설명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꿈을 이용해서 인간을 만날 수 있어. 너도 네 꿈을 통해서 엘로힘이나 엘을 여러 번 만났잖아? 그거랑 같은 거야.”
“…….”
엘로힘과 엘. 엘은 엘라하의 애칭이었다.
엘라하가 칼리에게만 허락했다던 그 애칭. 그걸 칼리에게 직접 듣게 되자 입 안이 굉장히 썼다.
“나를 왜 만나려고 한 거지?”
“너무 궁금했거든. 물론 내 아이들을 통해서 여러 번 지켜보긴 했지만, 그건 한계가 있고…….”
아이들을 통해서 지켜봤다는 건… 프라우스 신도단과 우리가 충돌할 때마다 봤다는 건가.
엘로힘과 엘라하가 나를 지켜보듯, 칼리도 사마엘이나 아자젤을 지켜봤겠지. 그 이전의 아벨과 닥터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너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겐 네 존재가 가장 재밌어. 멀리서 지켜봤을 때도 좋았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 보니까 더 흥미롭네.”
칼리는 나와 마주한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즐거워 보였다. 아까부터 느껴 온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채고 눈가를 좁혔다.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네.”
“다른가?”
다르냐고? 마치 날씨 이야기하듯 가벼운 태도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이고 잔인할 수 있을까. 천사연의 시간을 뺏어 가 놓고, 당사자가 듣고 있는 앞에서 저딴 말을 한다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사연의 손목을 잡은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침착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순간 눈앞이 붉게 물들 정도로 감정이 크게 흔들렸다.
‘정신 차리자.’
지금 내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이 빌어먹을 꿈을 깨트리고 천사연을 현실로 데려가는 거다. 세계가 무너지지 않고, 나와 팀원들이 살아 있으며, 당장 눈앞에 칼리가 보이지 않는 현실로.
목 끝까지 올라온 울분을 삼켜 내며 작게 심호흡을 한 뒤에 물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이 뭐야.”
“목적이라…….”
눈을 내리깔고 잠시 고민하던 칼리가 이내 빙긋 웃었다.
“널 실제로 만나 보고 싶었다는 건 진심이야. 하지만… 그래. 그게 다가 아니긴 하지. 한이결. 아니, 권세현이라고 해야 하나?”
“…….”
“네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참 좋아. 이것도 진심이야. 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좋더라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끼리 부딪히면 결국 한쪽만 살아남잖아.”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였다. 칼리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허공을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열심히 사는 이유는 내게서 천사연을 구하고 싶어서겠지. 내가 가져간 천사연의 시간을 돌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겠고.”
“……그래.”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해.”
일렁이는 흙먼지 사이로 와인색 눈동자가 빛났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눈이다.
“권세현, 천사연의 과거가 담긴 책을 봤겠지? 그 형제들이 보여 주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분명 봤겠지. 그럼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천사연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대가를 치른 거야. 오롯이 천사연의 선택이었어. 이건 정당한 거래야.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죽은 인간들을 외면하고 내 제안을 거절했어야지.
귓가에 들려오는 칼리의 잔잔한 말이 독처럼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했다.
“천사연의 시간을 되돌리는 건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쉬워. 내가 아직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새로 나타난 권세현, 너라는 존재 때문이야.”
알고 있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천사연도 알고 있을 거다.
언제든 과거로 돌아가 천사연을 절망에 빠트릴 수 있는 칼리가 여태껏 행동하지 않은 건 나라는 존재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섣불리 되돌리고 나서 또 내가 나타나면… 본인들도 일이 복잡해질 테니까.’
칼리도 기회가 이제 몇 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세계가 무너지면 본인이 지금까지 공들인 계획도 무너지는 셈이니 조심하는 거겠지.
칼리와 프라우스 신도단은 이번 시간대에서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아낸 다음에 시간을 되돌릴 거다. 내가 권세현의 모습과 개입 능력을 숨긴 이유도 그래서였다.
“네가 천사연을 소중히 아끼는 마음은 이해해. 그러니 생각을 좀 달리해 보면 어때?”
“무슨 뜻이지?”
“더 쉽고 성공 가능성이 큰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뜻이야.”
과한 긴장으로 흐려지는 시야에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내 곁에 조용히 서 있는 천사연만이 나를 지탱해 줄 유일한 힘이었다.
“천사연이 편해졌으면 좋겠지?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잖아.”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백지 같은 천사연의 얼굴이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그럼 천사연을 포기해.”
“뭐?”
“포기해. 도와주지 마. 그게 천사연이 지옥을 벗어나서 편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묻자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넋을 놓은 내게 칼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천사연이 시간을 되돌려받을 방법은, 나를 위해서 약한 존재들을 죽이고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걸 무너뜨리는 것 말고는 없어.”
“…….”
“계획이 끝나면 천사연에게 시간을 돌려주고 미련 없이 보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음, 그때 되면 남은 게 없을 테니 결국 죽겠지만… 그런 결말도 괜찮겠지. 천사연은 줄곧 진심으로 죽고 싶어 했으니.”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갔다. 칼리의 말이 조각조각 나뉘어서 머리에 박혀 들었다.
“재앙이 된다는 게 언뜻 들으면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할 만할 거야. 천사연은 그저 계속 검을 휘두르고 능력을 쓰기만 하면…….”
“입 다물어.”
더는 들으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기이한 감각에 이성까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천사연, 듣지 마.”
끔찍했다. 칼리가 내뱉은 말도, 천사연의 희생을 유일한 답이라고 여기는 저 신념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끔찍했다.
“흠, 그래. 어차피 이번 한 번으로 납득할 거라고 기대 안 했어.”
한숨을 내쉰 칼리가 이윽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와인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다름 아닌 동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칼리는 지금 나를 불쌍하게 보고 있었다. 그 사실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번 만남은 여기까지 할까? 아쉽지만 더 이상 나랑 대화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이네.”
칼리가 앉아 있던 파편 위에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왔다. 먼지와 피로 잔뜩 더럽혀지고 불이 일렁거리는 바닥을 맨발로 디딘 칼리는 내게 인사를 보내왔다.
“다음에 또 봐, 권세현.”
등을 돌려 떠나가는 칼리를 붙잡지 못했다. 칼리도 내가 붙잡지 못할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지, 미련 없이 사라졌다.
텅 빈 앞을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 무엇도 뱉어 낼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천사연.”
천사연이 내 부름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검은 눈동자에 드디어 내가 담겼다.
칼리가 이 꿈을 떠나가서… 그래서 반응이 돌아온 걸까? 궁금했지만 이제는 아무런 소용없는 질문이었다. 천사연의 창백하게 질린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아닌 척 애써 봐도 목소리에서 지친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돌아가자…….”
나처럼 지쳐 있는 천사연을 끌어안았다. 코끝으로 평소 천사연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이 아닌, 피 냄새가 짙게 스쳐 지나갔다.
꿈이 끝나 가고 있었다. 나와 천사연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
“금방 왔네.”
내가 눈을 떴다는 걸 제일 먼저 알아챈 여우가 한마디 했다. 그 뒤로 김우진을 포함한 다른 팀원들도 보였다.
“한이결, 일어났어?”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긴 했는데, 안색이 영 좋지 않군.”
“이결 씨, 별일 없었어요?”
여우가 아까 있는 대로 겁을 줘서 그런지 잠에서 깨어난 나를 챙겨 주는 팀원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염려가 담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꿈이 금방 끝났습니다.”
상체를 일으켜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천사연을 살폈다.
다른 팀원들처럼 천사연도 꿈에서 있었던 일을 다 기억할 텐데. 얼마나 긴 시간을 그런 폐허 속에서 보냈을지, 칼리가 한 말을 듣고 어땠을지.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불안했다.
“천사연.”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천사연이 화답하듯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옅게 웃었다.
“천사연… 괜찮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묻자 천사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따라 상체를 일으켰다.
“기분 더러워.”
천사연이 중얼거리며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로 이마를 꾹 눌렀다. 꿈의 여파로 두통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 보이십니다.”
예상보다 멀쩡한 천사연의 모습에 박건호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팔짱을 낀 채로 천사연을 보던 하태헌도 끼어들었다.
“듣자 하니 꿈속에서 칼리를 만났다고 하던데.”
거침없이 묻는 하태헌의 말에 괜히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나를 두고 천사연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이런 곳에서 처넣을 꿈이라고 해 봤자 뻔하지. 딱히 대단한 것도 없었어.”
“만나긴 했다는 겁니까?”
“그래. 만나서 정신 나간 대화 좀 한 게 다야.”
“…….”
나는 천사연을 멍하니 바라봤다.
대단한 것도 없었다… 아픔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천사연은 진심으로 방금 그 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칼리를 이번에 처음 만났지만…….’
천사연은 아닐 거다.
200번을 넘는 시간 동안 이런 식으로 칼리와 마주친 적이 얼마나 많았을지, 그리고 자신이 재앙이 되어서 세계를 무너뜨리는 꿈을 얼마나 많이 꿨을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다.
“한이결 능력자의 개입 능력으로 팀원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미로 어딘가에 아직 잠들어 있고요.”
“개입 능력?”
박건호에게 상황 설명을 들은 천사연이 혀를 찼다. 꿈속에서 만난 내가 진짜 나라는 것을 방금 막 이해한 모양이다.
“한이결, 그 꿈은…….”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린 천사연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천사연 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놀란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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