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무사히 김우진의 꿈에서 빠져나온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허리를 꽈악 조여 오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여우.”
“늦어!”
여우의 외침을 들은 박건호와 하태헌, 민아린이 자리로 돌아왔다. 안전을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좀 늦긴 했군.”
“얼마나 걸렸습니까?”
“음, 정확히는 모르지만 30분은 넘었을 거예요.”
김우진의 꿈속에서 아침부터 밤이 될 때까지 있었으니 예상했던 시간만큼 걸린 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김우진의 상태를 살폈다.
“으…….”
다른 사람들처럼 김우진도 얼마 가지 않아 속눈썹을 움찔 떨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한이결.”
“괜찮아?”
정신이 든 김우진은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가 곧이어 내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여우를 발견하고 얼굴을 왕창 구겼다.
“저건 뭐야?”
김우진이 여우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겉모습은 그래도 한이결과 비슷한데, 용케 다르다는 걸 알아챘네.
“여우가 잠깐 변한 거야.”
“여우…?”
김우진이 눈가를 좁히고 여우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우는 보란 듯이 내 허리를 껴안은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놔.”
김우진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여우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싫은데?”
자신을 대놓고 도발하는 여우의 행동에 김우진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놓으라고!”
“싫다고.”
“그만해…….”
김우진이 일어난 지 5분도 안 지났는데 벌써 피곤했다. 다른 세 명은 우리를 흥미롭게 지켜볼 뿐, 말리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어서 결국 중재는 내 몫이었다.
“지금 이럴 때야? 김우진이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남은 팀원들도 빨리 찾으러 가야지. 여우, 허리 놔. 걷기 불편해.”
“씨이…….”
“김우진 너도 그만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우한테 무슨 질투야?”
“으응…….”
내게 한 소리 들은 여우와 김우진이 나란히 시무룩해졌다. 달래 줄 때가 아니었으니 적당히 무시하고 여우에게 물었다.
“다음 사람은 어디 있어?”
“근처긴 한데.”
대답하던 여우가 미묘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지?
“근처인데 왜?”
“하…….”
갑자기 깊은 한숨을 푹 내쉰 여우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일 짜증 나는 인간의 것 같아서.”
“엉?”
아까와 비슷한 말이었다. ‘제일 짜증 나는 인간’은 따로 있는 건가?
“누군데?”
“몰라서 물어?”
질문에 질문으로 대꾸한 여우가 또다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김우진이 나 대신에 울분했다.
“저 싸가지…!”
“예전 우진 씨를 보는 것 같네요.”
“…….”
울컥해서 뭐라 하려던 김우진이 이어지는 민아린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팀원들이 모이니까 좀 낫네.’
나와 여우, 단둘이 있었을 때보다 소란스러운 지금이 훨씬 좋았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안내를 시작한 여우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다음 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막힘없이 걸어가 금세 방 입구에 다다른 여우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여우?”
“이 기운…….”
여우가 불쾌한 듯이 눈가를 좁혔다. 지금껏 봐 온 것 중에서 제일 예민해 보이는 여우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어둠에 가려진 정면을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여우가 내게 짧게 시선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설명이 아니라 직접 보여 주는 게 확실하겠지. 따라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여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내리깔린 방 안에 누워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천사연이었다.
여우가 얘기한 제일 짜증 나는 인간은 천사연이구나. 천사연이 지난날 여우에게 했던 막말을 떠올리면 저런 취급을 받는 거야 당연하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방금 전 여우의 반응이었다.
“가까이 와 봐.”
웬일로 성큼성큼 천사연에게 다가간 여우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나를 부른 여우는 손을 천사연의 이마에 올렸다.
여우의 손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오자 천사연에게서 낯선 기운이 확 풍겨 나왔다. 잠깐 느낀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었다.
“칼리의 기운이야.”
여우에게서 칼리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어쩌면 엘로힘과 엘라하처럼 여우와 그의 형제들도 칼리를 아주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칼리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몰라. 지금으로선 꿈속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게 다야.”
“꿈속…….”
지금까지 겪어 온 팀원들의 꿈속은 또 다른 세계와도 같았다. 천사연이 꾸고 있는 꿈에 칼리가 무슨 짓을 한 거라면…….
“한이결.”
굳은 얼굴을 한 내게 여우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번은 쉽지 않을 거야.”
“…….”
“그래도 할 거야?”
“할 거야.”
당연히 할 것이다. 해야만 했다.
천사연이 꿈속에서 칼리에게 고통받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당장 들어가서 도와주고 싶었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천사연에게 그런 꿈까지 꾸게 하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팀원들을 살폈다. 쉽지 않을 거라는 여우의 말을 들은 팀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을 향해 애써 웃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결 씨…….”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하태헌이나 김우진의 꿈처럼 평화롭고 쉬웠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짧게 심호흡을 한 뒤에 능력을 사용했다.
***
피부에 가장 먼저 닿아 온 것은 숨이 막힐 정도로 뜨겁고 갑갑한 공기였다.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살을 태울 것처럼 뜨거운 불이 여기저기에서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눈 앞에 펼쳐진 건 끝도 없이 이어진 폐허와 흩날리는 불티였다. 덜그럭, 한 걸음 내딛자마자 부서진 건물 파편이 밟혔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짧게 기침을 내뱉고 나서야 지금 모습이 정장을 입은 권세현인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책을 통해 과거의 천사연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천사연은 어디 있는 거지?’
얼기설기 쌓여 있는 건물 파편을 밟으며 힘겹게 나아갔다.
이전의 꿈들은 꿈의 주인이 항상 나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니 천사연도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끄아아악!”
그때, 뒤편에서 어떤 남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김우진의 꿈과 달리 지금은 권세현의 모습으로도 바람 능력을 쓸 수 있었다. 급히 바람을 몸에 두르고 비명이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천사연…!”
저 멀리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천사연이 릴리스의 검을 들고 있는 모습과 그 앞에 평범한 사람이 주저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나는 급히 소리쳤다.
“안 돼!”
내 생각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려 주듯, 천사연이 검을 들어 올렸다.
몸에 두른 바람의 세기를 더욱 높여서 천사연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망설이지 않고 날아간 덕분에 검날이 상대에게 내리꽂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천사연!”
천사연의 팔을 붙잡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확 끼쳤다. 피부를 달구는 뜨거운 통증을 견뎌 내며 아직 위로 올라와 있는 천사연의 팔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으윽……!”
그사이에 천사연에게 죽을 뻔한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돌려 천사연을 바라봤다.
“천사연…….”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여전히 뜨거웠다.
혹여라도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 다칠까 봐 매 순간 능력을 조절하던 천사연이었는데. 그의 텅 빈 표정이 가슴 아팠다.
“천사연.”
“…….”
내가 몇 번이고 불러도 천사연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메마른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주변을 가득 채운 폐허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천사연의 모습도. 이제 보니 검날과 검을 쥐고 있는 손이 모조리 피에 한가득 젖어 있었다.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는 천사연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바닥이 아닌 손목에 그어져 있는 상처가 드러났다. 서글픈 감정이 목 끝까지 울컥 치솟았다.
“천사연, 왜 대답을 안 해.”
아직도 피가 새어 나오고 있는 손목을 더는 볼 수 없어서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가려 주며 물었다. 현실이 아닌 꿈속이라서 천사연의 상처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치료해 줄 방법이 없었다.
“나 누군지 몰라?”
“…….”
“아무리 꿈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나를 잊냐…….”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나 천사연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여긴 어떤 세계야? 왜 다른 팀원들은 보이지 않아?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런 끔찍한 세계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어?
입술을 깨물며 그 많은 질문을 삼켜 냈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늦어서 미안해.”
지금 내가 천사연에게 해 줄 수 있는 위로는 이것뿐이었다.
“돌아가자, 천사연.”
처음으로 천사연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그 희미한 반응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때였다.
“글쎄. 그건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걸.”
“……!”
옥구슬 굴러가는 것처럼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나와 천사연 사이를 갈랐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좁히며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얼기설기 쌓여 있는 파편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여자가 나와 천사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화사한 금발과 대비되는 선명한 와인 빛 눈동자에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나는 침음하며 상대의 이름을 속삭였다.
“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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