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나는 어디까지나 꿈에 들어올 수 있을 뿐, 꿈을 깨트리는 건 꿈 주인만이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김우진이 꿈을 끝내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이 꿈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현실 시간이 더 느리게 흘러가서 다행이긴 한데.’
박건호의 꿈속에서 온종일 놀이공원에 있었을 때 현실에서는 30분 정도가 흘렀으니까 아직 여유가 있긴 했다. 그렇다고 좋은 상황은 절대 아니지만.
하태헌처럼 꿈 주인이 원하는 바를 모두 충족시켜 주면 꿈이 끝날 수도 있었으니 일단 녀석이 가져다준 아침밥을 다 먹었다. 내가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고 얌전히 밥을 먹자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맛있어?”
“어, 응…….”
식사는 현실과 똑같이 맛있었다.
하태헌의 꿈에서 먹은 음식들도 맛있었지만, 방금 먹은 건 김우진이 만들어 준 음식과 놀랍도록 똑같은 맛이라서 거북함이 덜했다.
트레이에 다시 빈 그릇을 담은 김우진은 침실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지 않는 걸 보고 나도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절그럭.
내 걸음에 따라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긴 쇠사슬이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침실을 나가고도 남을 길이라 우선 김우진을 뒤따라 밖으로 나왔다.
드러난 거실 풍경은 23층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쇠사슬을 질질 끌며 집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본 결과, 이곳은 전체적으로 23층 방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김우진의 꿈이라서 그런가.’
민아린의 말처럼 집을 사고 싶다던 소망과 살면서 가장 편안했던 23층 방 내부가 합쳐진 모양이다. 그럼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뭐가 원인일까.
굳이 따져 보자면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천사연이 내게 채웠던 족쇄 아이템과 닮아 있었다.
내 모습이 권세현인 데다 바람 능력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족쇄 때문인가?
권세현일 때는 한이결보다 등급은 높아도 능력이 전투계가 아닌 정신계라서 신체는 일반인과 똑같았다. 그래서 족쇄를 풀어 낼 수가 없었다.
김우진은 내 모습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했으니 족쇄를 풀 수 없는 권세현이 더 이득일 거다.
생각보다 더 철저하네. 이곳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데, 김우진이 다가와 수줍게 웃었다.
“간식 먹을래? 케이크랑 쿠키 있어. 아이스크림도 있고. 아니면 마카롱이나.”
“……그래.”
여길 나가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했다. 그러려면 김우진의 제안은 그게 무엇이든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집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꿈을 깨트릴 방법도 집 안에 있겠지.
“잠깐 앉아 있어. 가져다줄게.”
김우진이 가리킨 거실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자 마치 23층 방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닌 걸 알면서도 미로를 헤매며 지쳤던 몸과 정신이 조금씩 편해졌다.
김우진이 준비해 준 간식은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고 양도 많았다. 현실에서 내가 스쳐 지나가듯 맛있다고 말한 디저트를 모조리 모아 둔 것 같았다.
간식을 다 먹고 나서는 김우진과 소파에 나란히 누워서 TV를 봤다. 예전에 민아린, 김우진과 함께 봤던 영화였다.
배부른 상태로 소파에 누워서 봤던 영화를 또 보려니 졸음이 밀려왔다. 뒤에서 내 허리를 꽉 껴안은 채로 누워 있는 김우진 때문에 도망도 못 갔다.
내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는 걸 알아챈 김우진이 목소리를 낮춰 물어왔다.
“졸려?”
서늘하고 축축한 지하 미로에 갇힌 현실과 따듯하고 평화로운 꿈속의 간극이 자꾸만 몸의 긴장을 풀게 했다.
“졸리면 좀 자.”
“아니야.”
이대로 잠에 들 수는 없다. 아무리 현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면서 꿈속 시간을 보내는 건 최악이었다.
“놔 봐.”
아쉬워하는 김우진을 억지로 밀쳐 내고 소파를 빠져나왔다. 차라리 좀 씻는 게 낫겠다.
“김우진. 나 씻게 이거 풀어 줘.”
발목에 족쇄를 채운 상태로는 바지를 벗을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김우진도 다른 핑계 대지 못하고 풀어 줘야 할 것이다.
내 짐작대로 김우진은 시무룩한 기색으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바지 주머니에서 새하얗고 작은 열쇠를 꺼내 들었다.
‘저건…….’
열쇠에서 묘한 기운을 느낀 나는 저게 꿈의 매개체라는 것을 눈치챘다. 꿈이 더 강해질 수도 있고, 깨트릴 수도 있는 매개체가 족쇄 열쇠였을 줄이야.
철컥.
열쇠로 족쇄를 풀어 준 김우진은 손수 욕실까지 안내해 줬다.
욕실도 놀랄 만큼 23층 방 욕실과 똑같았다. 옷을 벗고 샤워하면서 어떻게 해야 저 열쇠를 뺏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힘으로는… 절대 안 될 거고.’
한이결로 변할 수 있다면 우리 둘 다 전투계 A급이니까 가능성이야 있지만… 아니, 그렇다고 해도 김우진을 상대로 무력을 쓰고 싶진 않았다. 이 꿈도 김우진이 원해서 꾸는 게 아닌데.
‘욕실 나가자마자 현관으로 도망치는 건 어떨까?’
꿈이 구현해 낸 공간은 이 집이 끝이었으니 집 밖으로 나가면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각오를 마친 나는 머리 위에서 물을 쏟아 내고 있는 샤워기를 껐다. 미리 준비된 여분 옷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린 후에 짧게 심호흡했다.
나가자마자 현관문으로 달려가자. 김우진이 반응하기 전에 집을 탈출해야 한다. 만약 문이 잠겨 있다면… 아,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욕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바깥 기척을 예민하게 살폈다. 일단 김우진의 기운이 가깝게 느껴지긴 하네. 주방 쪽에 있는 건가? 아니면 거실?
뭐가 됐든 문을 열자마자 바로 뛰어야지. 마른침을 삼키고 욕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벌컥!
“……!”
곧장 뛰려던 나는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상대를 발견하고 어깨를 흠칫 굳혔다.
욕실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우진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끝났어?”
이런 미친. 설마 욕실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당황하는 내게 김우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족쇄를 내밀었다.
“발목 줘.”
“…….”
***
집 밖으로 나가려던 계획이 무참히 망한 데다 족쇄를 다시 차게 됐으니 이제 남은 건 김우진의 마음이 바뀌도록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김우진은 자꾸만 나와의 대화를 피하고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사탕 있는데 먹을래?”
“지금 보는 거 재미없어? 다른 영화 틀까?”
내가 김우진, 이름만 불러도 다른 소리를 해 대는 녀석의 행동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돌고 돌아 다시 김우진에게 안긴 채로 소파에 누워서 영화를 보게 됐으니,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새하얀 커튼 너머로 비쳐 오던 햇빛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그만큼 지났다는 증거였다. 낮의 햇살 대신 붉은 노을빛이 졌던 거실은 이내 그마저도 사라지고 밤이 찾아왔다.
벽에 달린 시계의 시침이 7을 지나가 8을 가리키는 동안 마음도 갈수록 초조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김우진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내게 저녁밥을 차려 줬다.
‘내가 너무 무르게 대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김우진을 위한다면 이런 꿈은 당장 깨트릴 수 있도록 강하게 나갔어야 하는데.
나를 보며 순수하게 좋아하는 김우진에게 미안해서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가게 두다니, 참 한심했다.
‘이만하면 끝낼 때도 됐잖아. 그만하라고 하자.’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팀원들도 걱정이고 꿈에 깊게 빠져 가는 김우진도 불안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시선을 들었다. TV 화면에는 아직도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반복되는 영화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전원을 껐다. 그것만으로 거실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이결.”
입술을 잘근거리며 초조해하고 있는 내게 설거지를 마친 김우진이 다가왔다.
“김우진, 이제 그만…….”
“있잖아.”
김우진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
“뭐?”
“괜찮았어?”
괜찮았냐니, 무슨 뜻이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내게 김우진이 재차 말했다.
“네가 오늘 하루 편하게 쉴 수 있기를 바랐어.”
“…….”
“그랬으면 좋겠어.”
말문이 턱 막혔다.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김우진을 마주하자 가슴 속에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다가 순종적인 낯을 하고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김우진의 뺨을 쓸어 만졌다.
“응, 덕분에 편하게 쉬었어.”
“정말?”
“진심이야. 고마워, 김우진.”
내 대답을 들은 김우진이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동시에 김우진의 뒤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꿈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제야 김우진이 꿈에서 내게 무엇을 원했던 건지 깨달았다.
민아린의 꿈과 내용만 다를 뿐, 김우진이 바라던 것은 똑같았다. 아니, 이 둘만이 아니다. 박건호와 하태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라우스 신도단과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지친 만큼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김우진이 내게 족쇄를 채운 건 좀 놀라긴 했지만… 김우진이 원한 건 본인의 휴식도 아닌 내 휴식이었다.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김우진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집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여유를 갖고 구경해 볼 걸 그랬다.
“돌아가자.”
“응.”
고개를 기울여 내 손에 얼굴을 기댄 김우진이 얌전히 대답했다. 김우진이 꿈으로 만들어 낸 집이 하얀빛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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