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따뜻한 손길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고여 있던 마지막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툭 떨어졌다.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로 눈물을 닦아 주고 있는 하태헌이 보였다. 나는 박건호에게 안긴 채로 어깨에 얼굴을 기댄 상태였다. 내가 정신 차린 것을 알아챈 하태헌이 물었다.
“꿈에서 무슨 일 있었나.”
“음, 괜찮습니다. 위험한 건 아니었어요.”
자는 동안 울어서 그런지 목이 잠겨 있었다. 큼, 헛기침하며 박건호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민아린 씨는…….”
“아직 안 일어났다.”
옆에 누워 있는 민아린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별 탈 없이 꿈에서 빠져나온 민아린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민아린 씨, 괜찮으십니까?”
민아린은 나와 마찬가지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어딘가 몽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민아린이 슬픈 표정으로 속삭였다.
“미안해요, 이결 씨.”
“사과하지 마세요. 민아린 씨 잘못이 아닙니다.”
민아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며 고개를 저었다.
민아린이 잘못한 게 아니다. 하태헌도, 박건호도 모두 똑같았다. 나마저도 엘로힘의 도움이 없었다면 팀원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그곳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영원히 잠들어 죽었겠지.
그래서 여기가 무서웠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팀원들도 한시라도 빨리 현실로 데려와야 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은 민아린이 곧 내 뒤에 심드렁히 서 있는 팀원들을 살펴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설마 여우…인가요?”
박건호와 하태헌과 마찬가지로 한이결로 변한 여우를 보고 놀란 민아린은 의외로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느낌이 그렇더라고요.”
자기 정체를 한 번에 알아챈 민아린의 모습에 여우가 팔짱을 끼며 히죽 웃었다.
“역시 인간 여자가 제일 똑똑해.”
고작 이런 거로 좋아하는 여우가 조금 한심해 보였다. 나지막이 한숨을 한 번 쉬고 나서 민아린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 줬다.
“그렇군요. 정신을 지배하는 꿈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다른 분들은 모두 꿈속에 갇혀 있는 건가요?”
“네. 그래서 한 명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민아린도 무사히 구했으니 이제 남은 사람은 천사연과 김우진, 우서혁, 권정한이었다.
그래도 절반 이상 모여서 그런지 나 혼자였을 때보다 훨씬 든든했다. 능력을 써도 현실에서 지켜 주는 팀원들이 있으니까 걱정도 덜하고.
“여우.”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다음 사람도 구하러 가야 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어디 있냐는 질문의 뜻을 담아서 여우를 부르자 녀석이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아, 하필 짜증 나는 인간이 제일 가까워.”
“누군데?”
“몰라!”
여우가 성질을 내면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말과 행동이 완전 따로 노네.
“앗, 귀여워라.”
그런 여우를 민아린이 뺨을 살짝 붉히며 귀여워했다. 여우의 겉모습이 한이결인 터라 괜히 나도 기분이 묘해졌다.
방을 빠져나간 여우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짜증 나는 인간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감정과는 별개로 장난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누구길래 그러지?’
여우가 사람으로 변한 다음부터 계속 보여 준 반응을 생각해 보면…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을 다 싫어하던데. 그중에서도 유독 싫은 사람인 건가?
‘혹시 천사연?’
천사연은 그간 여우한테 쥐새끼라느니, 하얀 먼지라느니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괴롭혔으니까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동안 여우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복도를 이리저리 꺾어 가며 걸어갔다. 방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미로에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미로는 방을 이어 주는 연결선 느낌이군. 여우 친구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겠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여우가 없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하고, 자칫했다간 길을 잃고 팀원도 못 찾았겠지.
‘사마엘이 여길 만든 이유는 뭐지?’
물론 이 장소가 위험한 건 맞다. 나도 꿈을 경험했고, 다른 팀원들도 모두 꿈을 경험했으니까 위험한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를 몰살하기 위해 만들었다기엔 조금 애매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마엘은 내가 가진 개입 능력의 힘을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 쪽에 칼리와 같은 존재인 엘로힘과 엘라하가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래서 더 복잡했다. 우리가 가진 패를 아는 사마엘이 고작 이 정도 공간을 만들었다고?
‘찝찝해…….’
하지만 이렇게 고민해 봤자 답은 알 수 없었다.
최소한 사마엘에 대해서 우리보다 많은 걸 파악하고 있는 천사연과 의견이라도 나눠 봐야 쓸 만한 추측이 나올 듯했다.
“여기야.”
한참 동안 복도를 걷던 여우가 드디어 방에 도착했다.
민아린이 있던 방보다 훨씬 작은 이 방에는 다름 아닌 김우진이 누워 있었다. 짜증 나는 인간은 천사연이 아니라 김우진이었다.
“이런 말 해도 되나 싶지만… 솔직히 우진 씨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음…….”
민아린의 말에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잠들어 있는 김우진의 새하얀 얼굴을 바라봤다.
김우진은 워낙에 나를 좋아하니까 분명 꿈속에서도 내 비중이 꽤 클 텐데. 그런 김우진의 꿈이라면…….
“뭐, 어디 놀러 가거나 여행을 가거나… 그러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우진 씨는 예전부터 집을 사고 싶어 하셨잖아요. 예쁜 집이 나올 수도 있겠어요.”
“그럴싸한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우진 꿈이니까 나도 이번만큼은 긴장을 좀 늦추고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김우진은 워낙에 내 말을 잘 듣다 보니까 걱정되지도 않고.
“우습게 보다간 된통 당할걸.”
내 생각을 꿰뚫어 본 여우가 비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야 아무리 김우진이라 해도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꿈의 영향을 받긴 할 테니 간단하진 않겠지만…….
“일단 다녀올게요.”
직접 겪지 않는 이상은 모르는 일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누워 있는 김우진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서늘한 지하 바닥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체온이 평소보다 살짝 낮았다. 잡담은 이만하고 꿈속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조심하세요, 이결 씨.”
“네. 최대한 빨리 깨우겠습니다.”
개입 능력을 사용해서 김우진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며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
새하얗고 부드러운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무사히 꿈속으로 들어온 걸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서 주위를 둘러봤다.
대충 둘러보기에는 평범한 침실이었다. 이불까지 덮고 있던 거로 보아 이곳에서 나는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김우진의 꿈속에서 나는 한이결이 아닌 권세현이었다. 앞서 박건호, 하태헌, 민아린의 꿈속에서는 한이결이었는데.
옅은 베이지색 커튼 너머로 환한 햇살이 들어왔다. 협탁 위에 놓인 시계로 막 아침 10시가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우진은 어디 있는 거지?’
레퀴엠 길드 23층 방과는 거리가 먼, 낯선 곳에서 눈을 뜬 터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방 밖으로 나가려고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린 그때였다.
절그럭.
오른쪽 발목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과 함께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리자 오른쪽 발목에 채워진 족쇄와 굵은 쇠사슬이 보였다.
“이게 무슨…….”
“아, 일어났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당황하는 사이에 문을 열고 김우진이 나타났다. 손에 트레이를 든 김우진은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아침밥 먹자.”
“음, 김우진…?”
“응?”
혹시나 해서 녀석을 부르자 김우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곧장 대답을 해 왔다. 현실과 똑같은 반응에 조금 안도하며 물었다.
“아침밥보다… 이거 뭐야?”
“이거?”
“족쇄. 왜 해 놨어?”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가 내 발목으로 향했다. 당장에라도 풀어 줄 거라 생각한 내 기대는 이어지는 김우진의 말에 무참히 부서졌다.
“왜 해 놨냐니. 한이결 네가 자꾸 나가려고 하니까.”
“…여기 어딘데?”
“우리 집.”
‘우리’ 집이라고?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눈가를 좁힌 나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내가 집을 나가려고 해서 족쇄를 채웠다는 거야? 나 밖에 나가면 안 돼?”
“왜 나가려고?”
“계속 집에 있을 수는 없잖아. 외출해야 할 일도 생길 거고…….”
“괜찮아. 나갈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테니까.”
“…….”
입을 다물고 내 앞에 서 있는 김우진을 응시했다.
나갈 일 없다고 단언하는 김우진의 모습에서 아까부터 느껴졌던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김우진.”
“응.”
“너, 지금 이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지?”
“응.”
조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나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싫어.”
“싫다고?”
김우진은 정말로 왜 꿈을 깨트리고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내가 왜 그래야 해? 여긴 너도 있고, 우리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집도 있어.”
박건호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각했다.
‘아무래도 좀… 큰일 난 거 같은데.’
박건호의 경우에는 ‘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오래전에 헤어진 어린 동생 리아였다.
리아는 박건호가 꿈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는 존재였지만, 동시에 현실감을 덜어 주는 역할이었다. 박건호는 헤어진 동생을 보면서 계속해서 놀이공원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거다.
그러나 이곳에는 리아의 역할을 해 줄 존재가 없었다. 모든 게 다 꿈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고 현실과 연관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이건 꿈이야. 다 가짜잖아.”
“가짜라도 지금 여기서는 이게 진짜야. 여기만 벗어나지 않으면 계속 진짜일 거고.”
재차 설득을 해 봤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나를 두고 김우진이 협탁에 트레이를 내려놨다.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플 텐데.”
설마 김우진이 이럴 줄은 예상 못했다. 내게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 주는 김우진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이번 꿈은 유난히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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