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97. 각자의 바람
끝내 반항 어린 학생을 연기하지 못하고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버틴 나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김우진! 동아리방 가자!”
“어? 으응.”
책상을 탁 내리치며 비장하게 외치자 김우진이 나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곧장 교실을 뛰쳐나가려던 나를 허겁지겁 붙잡았다.
“기, 기다려!”
“왜!”
“가방은 가져가야지.”
왜 잡느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김우진의 말에 납득했다. 맞다. 학생이 가방은 챙겨야지.
겨우 정신을 잡고서 책상에 걸려 있는 가방을 들었다. 근데 왜 이렇게 가벼운 거야? 의아해서 가방을 열자 아무것도 든 것 없는 텅 빈 내부가 보였다.
‘아니… 왜 아무것도 안 들어 있어?’
이게 정말 내 가방이라고? 요즘 고등학생 가방은 다 이러나?
조금 당황스럽지만 이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대충 한쪽 어깨에 메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는 저마다 하교하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김우진.”
“응?”
“동아리방이 어디야?”
학교라는 장소도 낯선데 이렇게 사람이 우글우글한 상황에서 딱 한 번 가 본 동아리방이 어딘지 떠오를 리가 만무했다.
내 질문에 김우진이 또다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길 안내를 해 주었다.
교실이 많은 2층을 벗어나 4층으로 올라오자 복도에 학생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여긴 동아리방이 모여 있는 층인가?
복도 가장 끝, 영상 시청 동아리 문이 보였다.
민아린을 만나면 바로 꿈 얘기를 꺼내고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지난 세 시간 동안 몇 번이고 했던 다짐을 재차 하며 동아리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벌컥!
“민……!”
문을 거침없이 열며 민아린을 부르려던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고 말문이 막혔다.
“등장 한번 화려하군.”
“이결 후배, 늦었네?”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해 오는 익숙한 얼굴들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아, 아니…….”
천사연과 박건호에 이어서 우서혁, 하태헌, 권정한까지.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사람들이 좁은 동아리방에 꾸역꾸역 모여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기가 막혀서 묻자 천사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동아리에 동아리 활동하러 오지, 뭐 하러 오긴?”
“뭐, 학생회장이 이런 인기 없는 동아리를 하는 거니까 좀 신기하긴 하지.”
기겁하는 내가 웃긴지 킥킥거리던 박건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학생회장? 학생회장이라고?’
그러고 보니 팀원들 모두가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얼굴에 집중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천사연이… 학생회장?”
어이없어서 중얼거리자 그걸 또 귀신같이 들은 천사연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흑흑, 가식적인 소리를 냈다.
“천사연이라니. 이젠 선배 이름도 막 부르고. 우리 이결 후배는 내가 막 우습나 봐.”
“저번엔 나한테도 박건호라고 부르던데? 그냥 포기하자. 우서혁은 어때?”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꼬박꼬박 선배라고 불러 주는데.”
“나도.”
박건호에 질문에 우서혁과 하태헌이 질세라 한마디씩 던졌다. 다들 김우진과 마찬가지로 소름이 끼칠 만큼 행동이 현실과 비슷했다.
네 명 다 3학년인 건가? 그보다 어째서 하태헌이 아니라 천사연이 학생회장인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민아린의 꿈속이라 그런가? 민아린의 상사가 천사연이니까.
“앗, 다들 일찍 왔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는 내 뒤로 동아리방 문을 열고 민아린이 나타났다.
“오늘 볼 건 저번에 얘기했던 다큐멘…….”
“민아린 씨…가 아니라 선배!”
다급히 민아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 같이 다큐멘터리를 볼 생각에 신난 모습이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사실 시간도 문제지만 저 미치도록 현실적인 팀원들과 고등학생인 척 대화를 나눌 정신력이 내겐 남아 있지 않았다.
“으, 응?”
“할 말이 있습니다. 꼭 들어 주셨으면 해요.”
“뭔데?”
눈을 동그랗게 뜬 민아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복도로 나가서 민아린에게만 따로 얘기해야 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사실 여긴 현실이 아닙니다.”
“응?”
“이 모든 건 꿈입니다. 민아린 씨가 만들어 낸 꿈속이에요. 깨어나셔야 합니다.”
“…….”
소소한 잡담이 오가던 동아리방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나와 민아린을 바라봤다.
내게 어깨가 잡힌 채로 설명을 들은 민아린은 표정을 굳혔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이지만 차갑게 빛났다.
‘통한 건가?’
박건호는 나를 보자마자 꿈을 깨달았고 하태헌은 설명을 듣고서 깨달았다. 그러니 민아린도 분명히 제정신으로 돌아올…….
“풋!”
“……?”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민아린의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가볍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당황했다. 웃음을 터뜨린 민아린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아, 미안.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결이 네가 너무 진지해서… 못 참았네.”
“나 같아도 웃었어.”
“요즘 재밌게 보는 드라마라도 있는 건가?”
민아린을 포함한 모두가 그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앞선 두 번의 꿈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예상과 너무나도 다른 상황에 얼빠진 내 손목을 민아린이 붙잡고서 자리로 끌어당겼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영상이나 보자. 오늘 볼 건 저번에 얘기했던 다큐멘터리! 제목은 ‘행복과 가족’이야.”
나와 김우진이 빈자리에 앉자 민아린이 불을 끄고 TV를 켰다. 이윽고 다큐멘터리가 시작됐다.
‘완전히 꼬였는데. 이제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민아린만 따로 불러서 대화를 나눌 걸 그랬다. 설마 민아린이 만들어 낸 팀원들이 방해될 줄이야.
역시 민아린은 만만치 않구나. 어떤 방법으로 민아린에게 여기가 꿈속이라는 걸 깨닫게 해야 할지, 막막함에 두통이 일고 한숨이 나왔다.
“형, 저번에 이거 보고 싶다고 하셨죠? 빌려드릴게요.”
“어, 그래. 고맙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권정한이 빙긋 웃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받고 나니 그건 만화책이었다.
…이 꿈속에서 나는 같은 동아리 부원한테 만화책이나 빌려 읽고 다니는 거야? 가방은 텅 비었으면서? 이거 공부는 제대로 하는 건지 모르겠네.
‘역시 이대로는 안 돼.’
박건호와 하태헌의 꿈속에서도 위기감은 느꼈지만, 앞선 둘보다 심적으로 더 힘든 곳이 여기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민아린에게 얘기라도 한 번 더 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막 말문을 열려던 그때였다.
“2학기 시작하자마자 수능 준비하라고 보는 사람마다 아주 닦달을~ 피곤해 죽겠다.”
“그러게 평소에 공부도 좀 하고 내신도 준비하지 그랬나.”
“여기서 나만 안 했어?”
“너만 안 했어.”
박건호와 천사연이 소리 낮춰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반말하며 학업을 주제로 대화하는 둘은 정말로 친구 같았다.
하태헌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댄 채로 다큐멘터리를 봤고, 우서혁은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아린 선배한테 들은 건데, 오늘 이결 형이 우진 선배 집에 놀러 간다며요? 저도 갈래요.”
“네가 왜 와.”
“너무 야박한 거 아니에요? 전 저번에 집에 형이랑 우진 선배 같이 초대했잖아요.”
권정한의 말에 김우진이 반박할 거리가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우서혁, 내일 점심시간에 축구 시합하자.”
“싫어.”
“이미 너도 온다고 애들한테 말해 놨어.”
“하…….”
박건호가 턱을 괴며 씩 웃자 우서혁이 피곤한 낯으로 이마를 짚었다.
“…….”
그 광경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새롭고 신기한 분위기였다. TV에서 민아린이 튼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행복해지기 위한 첫 단계는 바로 가족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족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 바로 행복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이 된 팀원들이 소소하게 주고받는 대화 소리와 행복에 대해서 알려 주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들으며 민아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다큐멘터리를 다 보자 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부원이 하나둘 떠나가고 남은 건 나와 민아린, 김우진, 권정한이었다.
우리 네 명은 나란히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앞에 펼쳐진 운동장은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붉게 변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민아린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학교 정문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나는 정문을 나서기 직전에 걸음을 멈췄다. 내가 멈춰 서자 앞서 걸어가던 민아린이 뒤를 돌아봤다.
“이결아?”
왜 오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과 의아한 눈동자. 그걸 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민아린 씨.”
“…또 씨라고 부르네. 선배로 충분하다니까.”
“아뇨.”
각오했는데도 다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가슴 속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꿈은 여기서 끝입니다.”
“…….”
“이제 그만해요.”
민아린이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민아린 씨가 원하는 대로 여긴 정말 평화롭고 행복한 장소지만…….”
“…….”
“우린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꿈속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긴 프라우스 신도단도 없고, 몬스터가 나오는 게이트도 없고, 다치고 죽어 가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같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신나게 떠들고 논다. 이 나이대의 아이들처럼.
하지만…….
“전 현실에서 함께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결국 이건 꿈이다. 진짜가 될 수 없었다.
“저랑 같이 돌아가요, 민아린 씨.”
민아린이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이내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옆에 있던 김우진과 권정한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한참을 초점 없이 허공을 보던 민아린의 새하얀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두둑 떨어진 눈물에 민아린의 눈가가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더 지켜보지 못하고 두 팔을 뻗어 민아린을 조심스럽게 안아 줬다.
“으, 윽… 흑… 이결, 씨.”
“네.”
내게 안긴 민아린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쏟아 냈다.
“저는, 흐윽… 그저…….”
“네, 알아요.”
안다. 민아린이 어떤 심정으로 이런 꿈을 만들어 냈는지 우리가 제일 잘 알았다.
우리 모두가 민아린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노을빛이 점점 강해졌다. 모든 공간이 선명한 주홍색으로 잠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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