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84화 (384/394)
  • 384화

    앞장서서 걸어가는 여우의 뒤를 따라 민아린을 찾아 나섰다.

    하태헌이 있던 방을 빠져나오자 또다시 좁고 긴 복도가 나왔는데,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뭐지?”

    “위험한 기운은 아니야.”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미약한 기운까지 감지한 여우가 설명했다. 이윽고 여우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됐지?”

    “대단하다. 할 줄 아는 게 많네.”

    주변이 환해질 정도의 빛이라 놀라서 칭찬해 주자 여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 꼴을 재밌다는 기색으로 지켜보던 박건호가 한마디 했다.

    “이거 참 홀리하군.”

    온몸에서 하얀빛을 내뿜으며 잘난 체를 하는 여우의 모습은 좀 웃기긴 했다. 그래도 괜히 동조했다가 여우가 삐쳐서 빛을 끄면 안 되기 때문에 모른 척했다.

    복도를 조금 걷자 여우의 말대로 방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박건호, 하태헌과 마찬가지로 혼자 쓰러져 있는 민아린이 있었다.

    “세 명이 함께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민아린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며 말하자 하태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별걸 다 걱정하는군.”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빨리 갔다 와.”

    하태헌의 뒤로 박건호와 여우가 대답을 이었다. 서로에게 별다른 관심 없이 나만 집요하게 쳐다보는 셋의 모습에 머리가 좀 아팠다.

    걱정을 안 하려고 해도 걱정된다고. 한 명이 늘어난 건 좋은데… 이 조합은 대체 뭐야. 민아린 깨우는 동안 셋이 싸우기라도 하는 거 아냐?

    “…다녀오겠습니다.”

    불안해도 다른 방도가 없으니 믿고 꿈속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삼켜 내며 개입 능력을 사용했다.

    ***

    물에 빠진 듯이 희미했던 감각이 금방 선명해졌다.

    나는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개입 능력을 써서 꿈속으로 들어온 것도 벌써 세 번째라 그런지 처음보다는 더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이결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밝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민아린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예상대로 민아린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민아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졸았어?”

    “아뇨. 그…….”

    꿈을 깨트리기 위해선 꿈의 주인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건 앞선 두 번의 경험으로 확실해진 정보였다.

    이번에는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꿈속이라는 설명부터 하려다가 민아린의 복장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민아린 씨?”

    “씨?”

    설마 하는 마음으로 평소처럼 부르자 민아린이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뭐야? 민아린 씨? 무슨 회사 같잖아. 원래대로 선배라고 불러.”

    “…….”

    역시 그런가. 민아린이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발견한 순간 어느 정도 각오했지만, 막상 선배라는 단어를 듣게 되니까 심정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민아린 뿐만 아니라 나 또한 비슷한 디자인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꿈은 같은 학교 학생인 모양이다.

    “음, 점심시간에 보기엔 조금 졸린 영상이긴 했지?”

    민아린이 머쓱하게 웃으며 켜져 있던 TV를 껐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꽤 생소한 장소라는 걸 알아챘다.

    커다란 책상 하나가 놓여 있고 TV가 설치된 작은 방이었다. 여기가 교실은 아닐 테고. 뭐지? 감을 잡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릴 때였다. 정면에 있는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한이결.”

    “김우진?”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우진이었다.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김우진은 들어오자마자 내 품으로 직행했다.

    “뭐 하고 있었어?”

    “음, 어…….”

    아주 당연하게 안긴 김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나도 방금까지 내가 뭐 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는 터라 당황하자 민아린이 대신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나온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어. 점심시간 끝나 가니까 이제 반으로 가자.”

    책상에 놓인 노트를 챙겨 든 민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결에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복도를 나오고 나서야 방금까지 있던 장소가 어딘지 깨달았다.

    ‘동아리방…이었구나.’

    영상 시청 동아리라고 이름이 적힌 종이가 문 중앙에 붙어 있었다. 우리 셋이 같은 동아리 부원인 것 같다.

    ‘신기하네.’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과 복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운동장, 저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까지.

    박건호 꿈속에서 본 놀이공원도 꽤 생생했지만, 여기는 그보다 더 현실감이 넘쳐서 도저히 꿈 같지가 않았다.

    “한이결.”

    “엉?”

    주위를 구경하며 넋이 나간 내 허리를 팔로 감은 채로 가까이 붙어 있던 김우진이 내 눈치를 보며 제안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집 놀러 올래?”

    “어, 뭐? 집?”

    “으응. 네가 저번에 맛있게 먹은 쿠키 또 구워 놨어.”

    김우진이 뺨을 붉히며 수줍게 쿠키 어필을 해 왔다.

    ‘여기 민아린 꿈속 맞지?’

    진짜와 너무 비슷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자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에 기쁜 감정이 차올랐다.

    미소를 짓고서 나와 김우진의 대화를 지켜보던 민아린이 말했다.

    “둘이 친한 건 나도 잘 알지만, 오늘 수업 끝나고 동아리 모임 있는 건 잊지 마.”

    “회의요?”

    “응. 다른 부원들도 다 참여하는 모임이니까 둘 다 꼭 와.”

    심지어 부원이 우리 셋 말고 더 있어? 어이없어서 대답을 잊은 나를 두고 민아린은 이따 보자며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자, 잠깐만…….”

    “한이결, 우린 이쪽이야.”

    멀어지는 민아린을 붙잡으려는 나를 김우진이 막았다. 큰일 났다. 꿈속에 들어와서 꿈 주인과 멀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떡하지?

    “김우진, 나는 민아린 씨… 아니, 민아린 선배한테 가야 해.”

    “수업 시작까지 5분밖에 안 남았는데 어딜 가. 수업 안 듣게?”

    “그건 아닌데.”

    학생이 수업을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대답하자 김우진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질질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김우진이 나를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교실이었다. 2학년 3반. 2학년이라니. 그럼 몇 살인 거지? 18살인가?

    김우진과 나란히 교실로 들어가 내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앉았다. 김우진 바로 옆자리였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짝꿍?

    “그만 떠들고 수업하자!”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처음 보는 남자가 들어오자 어수선하던 교실이 나름 정리가 됐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는 학생들과 옆에서 필기구를 꺼내 드는 김우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커튼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연녹색 나뭇잎이 매달린 나무와 후덥지근한 날씨를 보아하니 한여름인 것 같다.

    교과서를 펼쳐 놓고 수업을 듣고 있으려니 정말로 학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고 있어도 되나. 꿈에서 나가려면 민아린을 어떻게든 다시 만나야 하는데.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김우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민아린이 꿈으로 만들어 낸 가짜 김우진이지만 실제와 놀랄 만큼 똑같으니까 도와주겠지.

    수업 중에 떠드는 건 너무 예의 없는 것 같아서 김우진의 교과서 끄트머리에 펜으로 할 말을 적었다.

    「쉬는시간에 민아린 선배 반으로 찾아가자 용건이 있어」

    음. 대충 이렇게 적으면 알아보겠지?

    자기 교과서에 적힌 글을 본 김우진이 귀 끝을 붉게 물들이고는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내 교과서 끄트머리에 무언가를 끄적끄적 적었다. 김우진의 어깨와 내 어깨가 맞닿았다.

    「3학년이라서 쉬는시간에 가도 못만나」

    「수능 얼마 안 남았잖아」

    “엥……?”

    수, 수능? 상상도 못 한 이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내가 글을 읽고 미간을 찌푸리자 김우진이 이어 적었다.

    「급한거면 이따 메시지나 전화라도 해봐」

    “…….”

    핸드폰이 있구나. 예전에 듣기로 학생들은 핸드폰 걷는다고 하던데… 여긴 아닌가 보다.

    하지만 이건 그리 좋은 해답이 아니었다. 민아린을 만나서 여기가 꿈속이라고 설명해 줘야 하는데, 그걸 문자 메시지나 전화로 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었다.

    ‘수업 끝나고 동아리방에서 회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김우진의 교과서에 한 번 더 글을 썼다.

    「수업 다 끝나려면 얼마나 걸려?」

    김우진이 묘한 표정으로 글을 읽었다. 너무 기본적인 걸 물어봤나? 내가 고등학교 관련된 건 잘 몰라서…….

    다행히 김우진은 달리 따지지 않고 바로 답장을 적어 줬다.

    「7교시에 종례까지 하면 대충 4시 반쯤?」

    4시 30분? 나는 교실 벽에 붙어 있는 시계로 시선을 돌려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지금이 1시 35분이니까… 3시간이나 남았잖아? 망했군.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3시간 동안 꼼짝없이 고등학생 노릇을 해야 할 상황에 눈앞이 막막해졌다. 놀이공원을 돌아다닐 때보다 더 어려웠다.

    민아린을 다시 만날 때까지 웬만하면 조용히 버텨야 할 텐데. 이러다가 아저씨인 거 티 다 나게 생겼다.

    ‘수업 시간에 친구랑 필담 나누기도 했으니까 아슬아슬하게 합격인가?’

    아니면 쉬는 시간에 김우진이랑 매점이라도 갈까. 내 주변에서 가장 어린 사람은 권정한이 최대라서 요즘 학생들은 뭐 하고 지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는 교과서를 뚫어질 듯 노려보다가 슬쩍 옆을 바라봤다. 턱을 괸 채로 샤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김우진은 어디로 보나 완벽한 고등학생이었다.

    빨리 민아린을 만나서 현실로 돌아가자고 설득해야 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수업이나 들으려니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냥 수업이고 나발이고 벌떡 일어나서 교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솟았다.

    ‘어차피 이건 다 꿈이니까 상관없지 않나?’

    머리로는 꿈이라는 걸 알아도 주변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한심함에 자책하며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 쓰여 있는 교과서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아, 진짜 힘들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8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