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83화 (383/394)
  • 383화

    “저기, 하태헌 씨.”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런 끔찍한 꿈을 당장 깨트려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먹고 해라.”

    하지만 하태헌은 내 예상보다 더 단호했다. 케이크를 먹기 전에는 대화를 조금도 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표정에 결국 포크를 들었다.

    그나마 허기가 느껴져서 다행이었다. 배부른 상태로 케이크를 먹어야 하는 거면 지금보다 배로 끔찍했을 거다.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잘라 내서 입에 넣자 적당히 달콤한 맛과 향이 가득 퍼져 나갔다. 꿈에서 먹는 케이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달고 맛있었다.

    ‘이 맛도 꿈이 만들어 낸 가짜겠지.’

    배고픈 상태에서 먹는 케이크였지만 상황이 주는 압박감 때문인지 먹을수록 찝찝함만 커졌다. 그래도 남기지 않고 꾸역꾸역 먹어 치운 내가 포크를 막 내려놓은 그때였다.

    쾅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식탁까지 들려왔다. 혹시 박건호 때처럼 다른 사람이 더 등장하는 건가?

    “찾아올 손님이 있습니까?”

    “그래. 잠깐만 기다려라.”

    순순히 대답한 하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 앉은 채로는 현관이 보이지 않아서 대신 소리에 집중했다.

    끼익, 현관문이 가볍게 열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박건호는 어릴 때 헤어진 여동생이 등장했었으니 하태헌도 분명 머릿속에 깊게 남아 있는 사람이 나타날 텐데… 대체 누굴까.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난 그때, 아주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다행히 늦진 않았나 보군.”

    “……!”

    너무 놀라서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찾아온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악한 나와 시선을 맞춘 상대가 미소 지었다.

    “안녕?”

    “처, 천사연?”

    답지 않게 밝은 인사를 한 천사연이 거침없이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은 어디로 보나 천사연이 확실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천사연이 나타날 줄 몰랐던 터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천사연에게 물었다.

    “네가… 여길 왜… 왔어?”

    “집주인이 초대해서?”

    정말 웃기지도 않은 답변이었다. 그 천사연이 하태헌에게 초대받는다고 냉큼 집으로 놀러 올 리가…….

    ‘……있나?’

    하태헌을 놀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가리지 않는 천사연의 꼬인 성격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혼란에 빠진 나를 두고 하태헌은 시종일관 웃고 있는 천사연과 내 앞에 접시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먹어라.”

    저 말을 벌써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다. 나와 천사연의 고개가 동시에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에 접시에 담긴 음식은 놀랍게도 갓 만든 스테이크였다. 아니, 디저트는 이해하는데 스테이크를 어떻게 이렇게 금방 만들어서 가져온 거지? 꿈속이라서 가능한 건가?

    어이없는 일의 연속으로 넋이 나간 나를 두고 천사연은 아무렇지 않게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자르는 천사연은 현실과 같이 참으로 우아했다.

    ‘하태헌은… 우리 둘한테 이런 식으로 요리를 먹이고 싶었나 봐.’

    하긴, 천사연도 뭐 먹는 꼴을 볼 수가 없으니 이런 꿈을 꿀만 했다. 난 귀찮아서 안 먹는 거고 천사연은 입맛이 예민해서 안 먹는 거지만.

    스테이크를 자르는 시늉을 하며 하태헌을 힐끔 살펴봤다. 그는 나와 천사연이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하태헌 씨.”

    더는 버틸 수 없다. 이 미친 곳에서 벗어나야겠어.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하태헌을 부르자 그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먹고 말해라.”

    “아뇨! 지금 하겠습니다.”

    하태헌이 자꾸 똑같은 얘기만 반복하는 것도 꿈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이 해로운 꿈을 빨리 끝내야 한다.

    “하태헌 씨, 침착하고 제 얘기 잘 들으세요.”

    “뭐지?”

    “사실 여긴 현실이 아닙니다.”

    혹여 하태헌이 충격을 받을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알려 준 건데, 뜻밖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앞에 앉아서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 천사연이 오, 하며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들으셨습니까? 여긴 지금 꿈속입니다. 하태헌 씨가 꾸고 있는 꿈이에요.”

    “꿈?”

    “네. 저는 개입 능력으로 들어온 겁니다.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어지는 설명에 하태헌이 묘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하태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라. 확실히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긴 하군.”

    “잠들기 전에 겪은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는 미로를 헤매고 있었잖아요.”

    잠자코 내 말을 듣던 하태헌이 곧이어 천사연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건 뭐지? 천사연도 같이 들어온 건가?”

    “이쪽 천사연은… 아마… 하태헌 씨가 만들어 낸… 천사연 같은데요.”

    나와 하태헌이 동시에 천사연을 돌아봤다. 얌전히 앉아서 스테이크를 먹고 있던 천사연이 우리의 시선을 알아채고 빙긋 웃었다.

    현실 천사연과 비교해 보면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한 버전의 천사연이었다. 일단 남이 차려 준 스테이크를 까탈 부리지 않고 냉큼 먹는 것부터가 진짜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테이크를 먹으며 예쁘게 웃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천사연을 떨떠름하게 보던 하태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꿈을 빨리 끝내는 게 낫겠군.”

    “예.”

    하태헌의 의견에 마음 깊이 공감하며 하태헌의 집을 완벽하게 구현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꿈을 깨려면 꿈 주인이 끝내야 합니다.”

    박건호의 꿈도 박건호가 스스로 끝을 냈으니 하태헌의 꿈도 같을 것이다. 개입 능력을 써도 꿈속에 들어오는 것만 가능하고 끝내는 건 어디까지나 꿈 주인만이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아십니까?”

    “흠…….”

    나를 따라서 주변을 둘러본 하태헌이 조금도 먹지 않은 채로 놓여 있는 내 스테이크를 발견했다.

    “먹어.”

    “네?”

    “먹어야 나갈 수 있다.”

    “…….”

    진심인가? 진짜로 스테이크를 먹어야 꿈이 끝난다고?

    표정으로 묻는 내게 하태헌이 말했다.

    “진짜다.”

    “…….”

    나는 내려놓았던 나이프를 다시 쥐었다.

    ***

    “으…….”

    “일어났군.”

    미약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박건호가 시야에 보였다. 나는 박건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습니까?”

    “대충 15분 정도인가. 30분은 안 된 것 같은데.”

    “팀장님보단 빠른… 우욱.”

    몸을 일으키다가 매슥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박건호가 놀란 기색으로 내 등을 두드려 줬다.

    “꿈속에서 나쁜 일이라도 겪은 건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닙니다. 그냥 좀 더부룩해서…….”

    꿈속에서 먹은 거라 실제로 배부른 건 아니었지만, 먹었던 경험이 너무 생생한 탓에 속이 갑갑했다.

    “그나마 하태헌 씨 꿈은 비교적 평화… 으억!”

    “한이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박건호에게 애써 웃어 주다가 쏜살같이 달려와 거칠게 안겨 드는 누군가 때문에 바닥으로 장렬히 쓰러졌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여우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칭얼거렸다. 이 자식이, 덩치 생각 안 하고 막 달려드네. 땅바닥에 부딪힌 뒤통수가 아파 죽겠다.

    “뭐가 늦어… 아까보다 빨리 왔는데.”

    “늦어! 나를 저 변태 인간 옆에 두고 갔으면 더 빨리 왔어야지!”

    짜증을 팍팍 내며 내 몸을 힘줘서 안은 여우 때문에 숨이 안 쉬어졌다. 지친 상태로 안겨 있는 나와 여우를 옆에 서서 구경하던 박건호가 본인만 재밌는 농담을 던져 왔다.

    “고생이 많아, 애 아빠.”

    “도와주기나 하시죠…….”

    코알라처럼 내게 붙어 있는 여우를 매단 채로 박건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너 이럴 거면 차라리 여우로 돌아와.”

    “싫어!”

    “…….”

    결국 찰싹 달라붙은 여우를 내버려 두고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하태헌에게 다가갔다. 꿈이 별문제 없이 끝났는지 하태헌도 얼마 가지 않아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괜찮…….”

    상체를 일으키던 하태헌이 여우를 발견하고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복잡한 기색으로 나와 여우를 번갈아 보던 그는 이마를 짚었다.

    “아직 꿈속인가…?”

    “현실입니다. 얘는 여우예요.”

    “푸핫!”

    나와 하태헌의 대화를 들은 박건호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때냐고, 지금.

    어쨌든 이로써 박건호에 이어 하태헌도 무사히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하태헌이 정신을 추스른 대로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 시작했다.

    “남은 다섯 명도 다 이런 식으로 구해야 하는 건가?”

    “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인원수가 많아서 가까운 사람부터 구하는 게 낫겠어.”

    시선을 돌려 여우에게 물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팀원이랑 거리가 어느 정도야?”

    여우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리 멀진 않아. 바로 옆에 있는 방이야.”

    “혹시 누군지도 알 수 있어?”

    “인간 여자.”

    인간 여자라면… 설마 민아린? 옆방에 민아린이 있나 보다. 이번에는 계단을 오르내릴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두 눈을 빛낸 박건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 민아린 힐러의 꿈속이라. 자신 있나, 한이결?”

    “자신…은 없긴 하네요.”

    민아린의 꿈이라니. 박건호, 하태헌과는 다른 의미로 어려울 것 같아서 벌써부터 피곤했다.

    “바로 가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8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