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자신의 한심함에 치가 떨렸다.
너무 미안해서 차마 박건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선을 내린 채로 다급하게 사과했다.
“제가 알고 있었는데… 설명하는 걸 잊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한이결!”
박건호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과하지 마. 이걸 왜 네가 사과하는 거지?”
“제가 알려 드렸어야…….”
“네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런 곳에서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위험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아.”
박건호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차갑게 일갈했다.
“내가 먹은 게 뭔진 몰라도 그걸 먹지 않으면 계단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게 여길 만들어 낸 놈이 원하는 거겠지. 계단을 빠져나가지 못하거나, 앞에 놓인 것을 먹거나.”
“…….”
“애초에 이곳이 함정이라는 걸 알고도 온 거잖아. 프라우스 신도단이 우리 좋으라고 여길 만들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얘기였다. 내가 반박하지 않고 얌전히 듣자 박건호가 조금은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이었고, 그걸 먹더라도 계단을 빠져나가는 걸 선택했을 뿐이야. 한이결, 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박건호의 손이 얼굴에 닿아 왔다. 부드러운 손길로 내 턱을 붙잡아 얼굴을 들게 한 그가 쓰게 미소 지었다.
“나는 네가 보호할 대상이 아니라 같이 싸워 나가는 팀원이지 않나? 내게 주는 관심은 달갑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져야 할 책임까지 네가 지는 건 그리 기쁘진 않군.”
“…죄송합니다.”
방금과는 다른 의미의 사과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팀장님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알아.”
“그래도… 걱정됩니다. 팀장님이 먹은 게 뭔지는 모르지만… 길을 막으면서까지 강제로 먹인 거니까요. 불안합니다.”
“그럼 그만큼 내 옆에 붙어 있으면 되겠군.”
“장난치지 말고요.”
“장난 아닌데.”
평소처럼 씩 웃는 박건호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박건호가 먹은 게 석류알처럼 생겼다면… 그건 결국 붉은색이라는 뜻이니 칼리의 피가 들어간 아이템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 박건호가 말한 대로 내가 가진 개입 능력으로 그 아이템을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박건호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내가 빠르게 알아채고 막아야 한다.
‘제발 통해야 할 텐데.’
생각과 다르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박건호가 먹었다는 석류알을 난 보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내가 봤다면 상황은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는 게 최선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여차하면 개입 능력을 쓰겠습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명령 중에서 제일 쉬운 명령이야.”
끝까지 능청을 떠는 박건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경직된 몸이 조금은 풀렸다.
“가장 좋은 건 아무 문제 없이 팀원들을 찾아서 여길 벗어나는 거고요.”
“그렇지. 그래서 팀원을 찾아 위로 올라왔는데 느껴지는 기운이 좀 있나? 일단 나는 모르겠군.”
나도 박건호를 따라 감각에 집중했다. 그러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오른편에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S급인 박건호는 느낄 수 없으면서 익숙한 기운. 그 주인은 한 명뿐이었다.
“하태헌 씨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피익!
여우가 정답이라는 듯이 밝게 울며 앞발로 오른쪽 정면을 가리켰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어가자 처음 박건호를 발견했을 때처럼 정신을 잃은 채로 바닥에 누워 있는 하태헌을 발견했다.
혹시 모르니 하태헌이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입술 가까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다행히도 옅은 숨결이 손끝에 닿아 왔다.
“나처럼 꿈에 갇혀 있는 상태인가 보군.”
“네. 제가 직접 깨워 줘야 합니다.”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음…….”
장난처럼 나온 얘기에 하태헌을 내려다봤다.
두 눈을 감고 있는 하태헌은 조각 같은 미모를 뽐냈지만, 날렵한 눈썹과 굳게 닫힌 입매에서 숨길 수 없는 고집이 풍겼다.
“뭐, 노력해 봐야죠.”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고 말을 슬쩍 돌리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개입 능력을 쓰면 나도 잠이 들 텐데…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든 아이템을 먹은 박건호를 두고 가도 괜찮을지 확신을 들지 않았다.
“여우.”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여우에게 부탁했다.
“아까처럼 사람으로 다시 변해 줄 수 있어? 팀장님을 도와줘.”
피익…….
검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꼬리를 휙휙 돌리던 여우가 대놓고 숨을 푹 내쉬었다. 귀찮긴 하지만 거절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아는지, 곧바로 여우의 몸에 새하얀 빛이 차올랐다.
첫 번째로 변했을 때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커진 빛은 이윽고 형태를 잡아 갔다.
“됐어?”
순식간에 한이결로 변신을 끝낸 여우가 까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그 작은 여우가 한이결로 변하는 장면은 봐도 봐도 신기했다. 박건호도 마찬가지인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내게 물었다.
“겉모습이 한이결인 건 일부러 따라 하는 건가 보군. 근데 성격이 좀… 원래 저런가?”
“다 들려, 이 변태 인간 놈아.”
변태 인간 놈이라니. 저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거지?
“그런 말은 쓰면 안 돼.”
아이를 가르치는 심정으로 짚어 주자 여우는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변태를 변태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 해?”
“박건호 팀장님이 왜 변태야.”
“변태 맞잖아. 저 인간이 너 가슴 만졌는데?”
“…….”
“오.”
막힘없이 나온 대답에 말문이 절로 막혔다. 할 말을 잃은 나를 두고 변태가 된 박건호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입가를 매만졌다.
괜한 부탁을 했나. 이제 와서 다시 여우로 돌아가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괜히 이마만 긁적이다가 우선 하태헌부터 구하자고 생각을 돌렸다.
“아무튼 하태헌 씨를 깨우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팀장님 깨울 때가 30분이었다고 했으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도록.”
“그냥 대충 깨워. 뭐 대단한 거라고.”
박건호 옆에서 여우가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저 둘을 두고 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여우가 엄청나게 시비 걸 것 같은데.
하지만 다른 방안이 없었다. 나는 온갖 근심을 안은 채로 개입 능력을 사용했다.
***
어딘가에서 고소한 버터 냄새가 났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새하얀 접시가 놓인 식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꿈속으로 제대로 들어온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옅은 베이지색 식탁과 코끝에 닿아 오는 맛있는 냄새. 근처에 보이는 모든 게 낯설지 않았다.
“한이결.”
두리번거리는 나를 하태헌이 불렀다. 박건호 꿈과 똑같이 나는 이번에도 권세현이 아닌 한이결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하태헌은 한 손에 프라이팬을 들고 있었다. 옷 위에는 남색 앞치마를 걸친 상태였다.
“먹어라.”
“예?”
내 곁으로 다가온 하태헌이 프라이팬에 담긴 것을 접시로 옮겨 줬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계란프라이였다.
“저기, 그…….”
“목 메니까 주스도 마셔라.”
이번에는 오렌지 주스가 담긴 잔이 옆에 놓였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소도 익숙한데.’
아무리 봐도 이곳은 하태헌의 집 주방이었다. 그나마 낯선 곳이 아니라서 좋다고 해야 할지.
“왜 안 먹지?”
“아, 아닙니다.”
복잡한 심경으로 앞에 놓인 토스트를 바라만 보자 하태헌이 눈가를 좁혔다. 마땅히 거절할 말도 없어서 머쓱하게 웃으며 나이프를 쥐었다.
노란 빛깔로 고소한 향을 풍기는 토스트를 조금 잘라서 입에 넣자 달달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예전에 먹었던 그 맛과 똑같았다.
‘하태헌은 여기가 꿈속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박건호는 내가 개입 능력으로 꿈속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챘다고 했는데, 하태헌은 모르는 걸 보면 상황마다 다르게 적용할지도 모르겠다.
앞에 앉아서 턱을 괸 채로 나를 구경하는 하태헌의 눈치를 살피며 토스트를 열심히 먹었다. 내가 토스트와 주스를 모두 먹어 치우자 하태헌은 곧장 접시와 잔을 치웠다.
“하태헌 씨.”
이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입을 열자마자 접시를 치운 하태헌이 주방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메이플 시럽이 뿌려진 핫케이크였다.
“먹어라.”
“예……?”
토스트가 사라진 자리에 핫케이크가 놓였다. 이쯤 되니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태헌 씨.”
“말해.”
“왜 자꾸… 먹을 거를 주시는 겁니까?”
핫케이크를 가리키며 묻자 하태헌이 아주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도리어 내게 질문을 건네왔다.
“배고프지 않나?”
“네?”
“배고플 텐데.”
배가… 고프냐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밑도 끝도 없는 허기짐이 몰려왔다.
과하게 고픈 건 아니었지만 불편할 정도는 됐다. 분명 토스트 하나를 먹어 치웠는데 이 허기짐은 뭐란 말인가. 당황해서 배에 손을 올리자 하태헌이 핫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가까이 밀었다.
“역시 배고픈 게 맞군. 어서 먹어라.”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태헌의 눈빛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접시에 놓인 핫케이크가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웠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웠다.
‘설마…….’
하태헌의 꿈은 오로지 내게 음식을 먹이는 게 목적인 건가? 어째서?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내가 핫케이크를 바라만 보고 손을 대지 않자 하태헌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접시를 도로 가져갔다.
멀어지는 핫케이크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됐다. 하지만 이대로 끝일 줄 알았던 내 기대는 하태헌이 세 번째로 들고 나온 접시에 무참히 박살 났다.
“먹어라.”
“…….”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딸기 케이크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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