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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81화 (381/394)
  • 381화

    96. 꿈속에서 마주한 세계 2

    반사적으로 뒤로 향하려는 고개를 억지로 정면에 고정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멈춰 서자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허억, 한이결…….”

    손끝이 절로 움찔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의 주인은 박건호가 맞았다. 심지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처럼 굉장히 거칠고 지쳐 보였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어디 다쳤나? 어떡하지? 잠깐 멈춰 줘야 하나?

    머릿속이 순식간에 뒤엉켰다. 당장에라도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저게 만약 진짜 박건호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

    치열한 갈등 끝에 나는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시하고 앞만 보고 가라고 당부하던 박건호를 믿는다.

    내가 다시 계단을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한이결…….”

    “…….”

    “나, 팔이… 으윽, 안 돼… 기다려. 나 좀 도와줘…….”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가 애원의 형태로 변해 갔다.

    “살려 줘, 한이결. 나 버리고 가지 마.”

    저건 가짜다.

    “한이결, 가지 마. 가지 마…….”

    가짜가 확실할 텐데.

    “한이결… 도와줘…….”

    가슴이 너무 아팠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 도움의 요청이 진짜 박건호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따라오던 박건호의 발소리와 기척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더욱 불안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누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계단 끝에 다다라서 뒤를 돌아봤을 때…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들려오던 박건호의 목소리가… 가짜가 아니면… 정말로 다쳐서 내게 도움을 청한 거라면… 내가 지금 내린 이 선택 때문에 박건호가 사라지거나 죽는다면…….

    차라리 박건호를 앞장서게 해야 했다. 그는 나보다 경험이 많으니 이런 거로 절대 흔들리지 않을 텐데. 아니면 이 계단의 위험성이라도 더 확실하게 설명해 줬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생각만큼 만만하지는 않을 거다.

    엘로힘이 했던 말이 이제는 이해됐다. ‘고작 계단’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내가 지금은 그저 우스웠다.

    사람의 심리를 건드리는 데에 도가 튼 놈들이 바로 사마엘과 프라우스 신도단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이 장소는 꿈부터 시작해서 계단까지, 모두 다 우리의 감정과 의식을 건드려서 절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흔들리면 안 된다. 사마엘과 프라우스 신도단이 원하는 건 내가 여기서 뒤를 돌아보는 거겠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 주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서든 계단 끝에 닿을 때까지 앞만 보고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한이결, 한이결…! 도와줘!”

    “후우…….”

    여전히 머리를 헤집어 오는 박건호의 애원을 들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

    ‘…느낌이 좋지 않은데.’

    권세현을 따라서 계단을 오르던 박건호는 피부에 닿아 오는 불쾌한 기운에 미간을 찌푸렸다.

    타인의 기운이 아닌 공간 내에서 풍기는 기운이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앞서 계단을 오르는 권세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이라면 권세현도 느꼈을 게 분명했다.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 줘야 하나, 잠시 갈등하던 박건호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아까 권세현에게 말한 것처럼 계단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그렇게 각오하고 뒤처지지 않게 권세현을 쫓던 그때였다.

    쿠구궁!

    낯선 기운이 한층 더 강해진 동시에 벽과 계단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로 격한 진동이라 박건호는 휘청이며 벽을 손으로 짚었다.

    ‘뭐지?’

    비틀거린 자신과 달리 앞서가는 권세현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 위화감에 눈가를 좁힌 박건호는 벽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와 길을 막아선 것을 발견했다.

    “이건…….”

    새로 생긴 벽은 박건호의 허리까지 오는 높이라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을 붙잡고 힘을 줘 봤지만 S급의 힘으로도 부술 수 없었다.

    가림막처럼 생긴 벽 위에는 붉고 작은 보석이 놓여 있었다. 마치 석류알처럼 생긴 그 작은 보석들은 총 네 개로, 그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꺼림칙한 기색으로 보석을 집어 들었지만 가로막은 벽은 여전했다. 생긴 것도 그렇고, 사라지지 않는 벽도 그렇고. 박건호는 석류알의 목적을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지나가고 싶으면 먹으라는 건가.’

    박건호는 고개를 들고 권세현을 위치를 살폈다. 그새 저 멀리 나아간 권세현은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한…….”

    어쩔 수 없이 권세현을 불러 세우려던 박건호는 이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만약 제 목소리를 듣고 권세현이 불안해하거나 무심코 뒤를 돌아보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 권세현을 놓치는 것도 위험했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권세현은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오르고 있으니 자신도 어서 결론을 내려야 했다.

    고민 끝에 박건호는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석류알에 손을 뻗었다. 새빨간 석류알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거북한 감각을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박건호는 ‘그것’을 입 안에 넣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망설였다.

    먹는다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 조심해야 한다. 먹고 난 후에 내 몸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는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건호는 음식에 예민한 천사연만큼은 아니어도 믿을 수 있는 음식만을 먹어 왔다. 값비싼 돈을 주고 요리를 사 먹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러니 이 석류알도 평소라면 절대 입에 대지 않았을 거다.

    “…….”

    차가운 눈으로 석류알을 응시하던 박건호는 이내 그것을 입에 넣고 삼켰다. 나머지 세 알도 거침없이 먹었다.

    광화문 사건 때, 사마엘이 넘겨준 붉은 액체를 망설임 없이 마시던 한이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사람들을 살리고, 팀원들을 살리기 위해서 혼자 적진으로 걸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까지 마시던 그 행동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마신 액체는 결국 한이결의 몸에도 좋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돌이킬 수도, 고칠 수도 없이… 어쩌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변화였다. 한이결이 그것도 모르고 액체를 마셨을 리는 없다.

    그러니 박건호는 고작 이런 일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까지 있었다. 이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사람이 앞서 걷고 있는 권세현이 아닌 자신이라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박건호가 석류알을 모두 먹자 가로막았던 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매슥거리는 속을 애써 외면하며 박건호는 멀어진 권세현을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높여서 계단을 올라갔다.

    ***

    한참을 올라간 끝에 어둠이 사라지고 계단 대신 어느 방의 입구가 보였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길었던 계단도 드디어 끝이었다.

    지치지 않고 내게 달라붙었던 박건호의 목소리도 돌로 된 문에 손을 올리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역시 그건 계단이 만들어 낸 환청이었다.

    문을 밀어 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처음 박건호를 만났던 곳과 비슷하게 어둡고 벽으로 된 내부가 나타났다. 혹시 모르니 방 안으로 아예 들어온 다음에도 박건호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이결.”

    돌문을 미는 소리와 함께 박건호가 나를 불렀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들었던 목소리와 달리 평소와 같은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계단을 오르는 동안 정말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급히 그에게 다가가 팔부터 붙잡았다. 대뜸 내게 몸이 붙잡힌 박건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건호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두 팔부터 시작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자신을 버리고 가지 말라며 애원하던 박건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끈질기게 맴돌아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다친 곳 없어요?”

    “보다시피.”

    남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실실거리며 웃던 박건호가 이어지는 질문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재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게 차라리 나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박건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올라오는 동안 뭐 문제라도 있었던 건가?”

    “…대단한 건 아니고요.”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까. 주저하다가 숨길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팀장님 목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내 목소리가?”

    “다쳤다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흠, 뒤를 돌아보게 하려고 계단에 별짓을 다 해 놨나 보군.”

    쯧, 나지막이 혀를 찬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단 한 마디도 한 적 없어. 아마 네가 들었던 건… 네게 혼란을 주기 위한 장치겠지. 네가 들었다는 내 목소리를 여우도 들었나?”

    “아.”

    그러고 보니 여우가 내게 안겨 있었구나.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느라 여우의 반응을 살펴볼 생각을 미처 못했다.

    “여우. 계단 오르는 동안 팀장님 목소리 들었어?”

    어깨에 올라온 채로 박건호를 노려보던 여우가 내 질문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럼 정말로… 그건 환청이었던 건가. 목소리의 정체를 확신하게 되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동시에 그만큼 사실적인 목소리를 구현해 낸 이 공간이 더욱 역겨워졌다. 여길 만들어 낸 사마엘의 음습함에 치를 떨자 박건호가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고생했군.”

    “아닙니다. 다치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죠.”

    “사실 나도 뭔가를 겪긴 했는데.”

    “네?”

    “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석류알처럼 생긴 보석을 먹었어.”

    “……!”

    솔직하게 털어놓은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야 나는 박건호에게 계단에서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내용만 알려 주고 그 어떤 것도 먹으면 안 된다는 내용은 깜빡하고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한이결?”

    창백하게 질린 내가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로 비틀거리자 박건호가 놀란 표정으로 허리를 잡아 줬다.

    엘로힘이 자칫하면 대가를 치러야 할 상황을 무릅쓰고 하나 더 알려 준 대답이었는데, 그걸…….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팀장님.”

    “한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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