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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80화 (380/394)
  • 380화

    “일단… 일어나세요. 이제 다른 팀원들도 찾으러 가야 합니다.”

    황급히 말을 돌리며 박건호의 팔을 붙잡았다. 잡아당기는 힘에 순순히 따라서 일어선 박건호가 복잡한 눈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근데 저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아.”

    그제야 여우가 한이결로 변한 사실을 아직 박건호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우를 억지로 옆에 데려와 말했다.

    “여우가 한이결 모습으로 잠깐 변한 겁니다. 제가 팀장님 꿈에 들어가서 깨울 동안 우리를 지켜 줬어요.”

    “그러고 보니 동물이 아니라 유령 몬스터라고 했던가?”

    “네, 비슷합니다.”

    설명해 줘야 할 건 여우의 정체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까 하려고 했던 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꿈에서는 놀이공원에서 반나절 이상을 보냈지만, 현실 시간은 30분이 지났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꿈속과 현실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피로의 원인이 그거였나.”

    박건호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한이결. 네가 꿈속에 들어오기 전에도 나는 꿈을 꾸고 있었어. 정말 오랜 시간을… 꿈속에서 보냈지.”

    “그 기간이 정확히 기억납니까?”

    “정확히는 어렵고, 대략 따지자면 2년 정도.”

    “2년이나요?”

    내가 박건호의 꿈속에 막 들어갔을 때가 떠올랐다. 시간은 모르지만 해가 화창하게 떠오른 낮이었던 건 확실하다. 그 후에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밤까지 놀이공원에서 머물렀지.

    ‘꿈속에서 보낸 반나절이 현실에서는 30분이라는 건데, 그럼 계산이 맞지 않아.’

    2년짜리 꿈을 꾸려면 몇 날 며칠을 자도 부족할 것이다. 결론은 꿈과 현실을 비교하는 의미가 없었다. 꿈에서 흐르는 시간은 제멋대로였다.

    “실제 2년보다는 빠르긴 흘러가긴 했지만… 그래도 꿈속에서 겪은 일이 마치 현실처럼 생생해.”

    힘없는 음성으로 이어서 설명한 박건호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긴 하네.”

    꿈속에서 박건호가 내게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나와 연애하고 미국에서 결혼까지 한 기억이 선명하다고 했지. 현실에서는 만나지 못할 동생도 꿈에서는 계속 곁에 있었고.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당황스러웠는데, 박건호 입장에서는 참 허무하고 무서운 상황 아닌가. 2년을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다 한낱 꿈이었다니.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 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혼란스러워하는 박건호의 상태가 걱정돼서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지. 꿈속에서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너한테 괜한 짓도 했고.”

    “팀장님이 잘못이 아닙니다. 탓하지 마세요.”

    박건호가 현실이 아닌 꿈속 세계에 집착한 건 어디까지나 꿈이 만들어 낸 가짜 감정 때문이었다.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박건호에게서 느껴지는 무거운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미치겠네…….’

    나로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꿈속에서 박건호와 내가 연애 끝에 결혼했다는 것도 놀랍고, 그걸 현실로 돌아온 박건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난감했다.

    동생 일도 마찬가지였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박건호를 고작 꿈속에 들어간 경험 한 번만으로 섣불리 위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박건호가 감정을 수습할 때까지 모른 척해 주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내게 박건호가 먼저 주제를 돌렸다.

    “다른 팀원들도 이런 상태라면 빨리 찾아서 깨어날 수 있게 도와야겠군. 팀원들의 위치는 알고 있나?”

    “아, 네. 여우가 안내해 줄 겁니다.”

    나와 박건호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향했다.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대화를 지켜보던 여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얘는 또 왜 이래.’

    박건호를 적나라하게 노려보는 여우의 시선에 내가 다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 박건호는 여우를 신기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딱히 기분 나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여우. 다른 팀원들은 어디 있어?”

    놔두면 하루 종일 노려볼 기세라 눈치껏 질문을 하자 여우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거리가 좀 있어서 걸어야 해.”

    “그래도 가야지.”

    상관없으니까 안내해 달라는 뜻으로 말하자 여우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시에 녀석의 몸이 새하얀 빛으로 번쩍 빛났다.

    사람으로 변했을 때와 달리 순식간에 작고 귀여운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온 녀석은 내 품으로 호로록 날아왔다.

    “뭐야. 이 모습으로 안내해 주게?”

    픽.

    반사적으로 여우를 안아 주며 묻자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부드러운 털이 닿아 왔다. 내게 안긴 여우가 경계 가득한 눈초리로 박건호를 노려봤다.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나 본데?”

    “…죄송합니다. 여우, 그만하고 길 알려 줘.”

    결국 한마디 하자 여우가 귀를 축 늘어뜨리며 앞발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삐치긴 했지만 제대로 알려 준 건 맞는지 여우가 가리킨 대로 정면으로 향하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의 끝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야 되는 게 확실해? 이 주변에는 없어?”

    함부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여우에게 재차 확인했다.

    피익.

    여우가 작은 머리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계단이라니.’

    축축한 돌로 된 계단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나올 줄이야.

    “팀장님.”

    “뭐지?”

    “계단을 오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나는 박건호를 찾기 전에 꿈에서 엘로힘을 만나 세 가지 힌트를 얻어 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박건호는 ‘계단을 오를 때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는 부분에서 표정을 굳혔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건… 뒤를 돌아볼 만한 위협이 올 거라는 의미겠군.”

    “예. 대신 계단을 통과하는 데 성공하면 그만큼 이득입니다.”

    엘로힘은 ‘마주하게 될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준 것이다. 그러니 별일 없이 계단을 지나가면 위험 요소를 줄일 수 있었다.

    “누가 먼저 앞장설지도 중요하겠어.”

    계단의 폭이 좁아서 두 명이 함께 오를 수 없었다. 내가 앞장서거나 박건호가 앞장서야 하는데, 둘 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앞장서는 사람은 뒤를 돌아볼 수 없으니 그에 따른 압박감을 견뎌야 하고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앞사람 없이 버텨야 했다.

    어느 위치가 더 어려울지 한참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역시 제가 뒤…….”

    “내가 뒤에 서는 게 낫겠군.”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건호가 선수 쳐서 포지션을 정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겪게 될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해서 내가 가려고 한 건데, 박건호도 나와 같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팀장님.”

    뒤에서 따라올 박건호가 염려스러웠지만, 그는 내 의견을 듣지 않고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이결, 넌 흩어진 팀원들을 찾아서 개입 능력으로 꿈을 깨트려야지. 네가 다치거나 쓰러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 내가 뒤로 가겠다.”

    “…….”

    씁쓸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내 개입 능력만이 팀원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지만 마땅한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앞장설게요.”

    “그래.”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박건호가 시원스레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금 나는 한이결이 아닌 권세현인데도 불구하고 그 손짓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꿈에서 깨고 난 박건호는 말투부터 행동까지 예전보다 훨씬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따라오시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도망치셔야 합니다. 제가 무조건 다시 찾아갈 테니까, 안전부터 챙겨 주세요.”

    “물론이지. 날 좀 믿어 봐.”

    “당연히 믿습니다. 믿는 만큼 걱정도 될 뿐이죠.”

    짧게 한숨을 내쉰 후에 박건호를 지나쳐 계단 바로 앞에 섰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계단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소름을 일으켰다.

    “여우, 혹시 모르니까 너도 뒤돌아보지 마. 아니면 아예 눈을 감고 있어도 돼.”

    피익!

    내게 안겨 있는 여우가 알겠다는 듯이 높게 울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쓸데없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계단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을 모양이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긴장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첫걸음을 떼기 직전, 박건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이결, 나는 계단에 오르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다.”

    “…….”

    “그러니까 무슨 소리가 들려도 무시해. 끝까지 앞만 보고 가.”

    박건호의 당부가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걸 애써 외면하며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지하의 질척하고 싸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아 올 때마다 불쾌감이 치솟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시선은 어둠이 내리깔린 계단 위에 고정했다.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여우가 알아채고는 나를 달래듯 피익, 작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그 짧은 위로만으로도 숨통이 아주 살짝 트였다.

    껴안고 있는 여우의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으며 겨우 침착함을 유지했다.

    ‘괜찮아.’

    바로 뒤에서 나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있는 박건호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발소리도 들린다.

    조심해야 하는 건 맞았지만 과하게 겁먹는 건 오히려 좋지 않았다. 어둠 저편에 뭐가 있을지는 나도 모르지만 박건호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계단 끝에 도달해야 했다. 그것만이 지금 상황에서 박건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뚜벅, 뚜벅.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소리가 교차해서 울려 퍼졌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면 뒤에서 박건호의 발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의지해서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오르던 그때였다.

    “한이결…….”

    잔뜩 메마른 박건호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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