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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79화 (379/394)

379화

“…팀장님.”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박건호에게서 벗어나려고 잡힌 팔에 힘을 줬지만 그는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아, 한이결.”

팔을 놔주기는커녕 제 쪽으로 끌어당긴 박건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결국 이 꿈을 벗어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여긴 우리를 방해하는 놈들도 없고, 내 결혼 상대는 너니까.”

“무슨…….”

“오빠들, 싸워요?”

나와 박건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리아가 눈치를 봤다. 벗어나려는 내 허리마저 감싸 안은 박건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니야. 퍼레이드 구경 다 했어?”

“으응. 나 다리 아파서 앉고 싶어.”

“카페 갈까? 가서 케이크도 사 줄게.”

“팀장님.”

“케이크 다 먹고 나면 집으로 가는 거지?”

리아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에 아까까진 몰랐던 기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착각인가? 마른침을 삼키며 리아를 살피자 이 느낌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건 내가 이 꿈에 동화되지 않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었다.

‘저게 꿈의 중심이었어.’

박건호의 곁에서 그가 아끼는 여동생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 리아의 정체는 다름 아닌 꿈 그 자체였다. 박건호가 이만큼 꿈에 몰입하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 리아의 탈을 쓴 저 존재 때문인 게 확실했다.

“응? 가는 거지? 오빠랑 이결 오빠, 나, 이렇게 셋이서 사는 집으로.”

리아의 말에 박건호가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이어 갔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박건호가 꿈에 더 깊게 빠질 것 같다는 생각에 급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

“이쪽을 봐, 박건호!”

박건호의 고개를 붙잡아 억지로 돌렸다. 그 행동에 리아를 담고 있던 흐릿한 눈이 조금 놀란 듯 크게 떠졌다.

“이런 게 정말로 팀장님이 원하는 겁니까?”

“난…….”

“천사연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 모두 버리고 저와 과거의 인연, 이렇게 두 명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날카로운 지적에 박건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눈앞에 보이는 저 여자아이는 팀장님의 동생이 아닙니다.”

“…….”

“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꿈에 홀려서 이성을 찾지 못하는 상태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거와 별개로, 꿈속에서나마 오래전에 헤어진 동생을 다시 만나서 놀이공원에 놀러 온 박건호가 얼마나 진심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과 함께 기린을 구경하며 행복하게 웃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더욱 박건호를 데리고 이 지독한 꿈에서 벗어나야 했다. 꿈이 만들어 낸 가짜가 아닌 진짜 리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박건호가 현실에서 살아가기를 바랄 테니까.

담담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던 박건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나보고… 동생을 또 포기하라고?”

“또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박건호와 그의 여동생인 리아가 어떤 관계이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꿈을 선택하는 게 정말로 동생을 두 번 포기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박건호가 이 정도로 아끼는 걸 보면 분명 리아도 박건호를 많이 좋아했을 거다. 남이 만들어 낸 꿈속에서 허무하게 죽어 가기를 원할 리 없다.

깊게 가라앉은 박건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한 번 더 설득했다.

“저랑 같이 돌아가요, 팀장님.”

“…….”

가까운 곳에서 마주한 박건호가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러자 주변을 가득 메운 시끄러운 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퍼레이드 행렬과 구경꾼들이 사라졌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보였던 놀이 기구도 사라지고, 놀이공원 특유의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도 없어졌다. 그 대신 연기로 가득한 흐릿한 하늘과 잿빛 바닥이 넓게 펼쳐졌다.

“오빠…….”

꿈의 배경이 바뀌는 와중에도 리아만큼은 변함없이 우리들의 앞에 서 있었다. 잔뜩 겁먹은 기색으로 박건호를 바라보는 리아의 머리 위로 돌풍과 함께 커다란 헬기 세 대가 나타났다.

새까만 헬기에서 총을 소지한 군인들이 쉴 새 없이 내려와 순식간에 리아 주변을 둘러쌌다. 자신을 향한 총구를 본 리아의 양 뺨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렸다.

“잠깐…….”

“가지 마.”

아무리 가짜라 해도 군인들에게 위협당하는 아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그런 날 막아선 건 오히려 박건호였다.

리아에게 다가가려는 내 허리를 다시금 힘줘서 붙잡은 박건호는 아이를 그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나와 박건호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리아가 울먹거렸다.

“오, 오빠…….”

“목표물 접근 완료.”

“섣불리 다가가지 마라. 각성자다.”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와 동시에 군인들이 리아에게로 거리를 좁혀 왔다. 그 대화를 통해 리아가 능력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기운이 리아에게서 풍겨 왔다. 이 정도면 A급인가? 아니, 그보다 조금 더 강하다. 굳이 제대로 따진다면 정제되지 않은 S급 정도의 기운이었다.

“포획해.”

군인들은 어린 여자아이인 리아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마치 아주 위험한 테러범 혹은 폭발물을 다루듯 여러 명의 군인이 아이에게 달려들어 온몸을 붙잡았다.

“시, 싫어! 오빠!”

“능력 못 쓰게 팔부터 묶어!”

“오빠, 도와줘!”

박건호에게 가려는 리아의 양팔을 억지로 붙잡은 군인들이 그대로 아이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던 아이는 결국 눈물을 쏟아 냈다.

“나 가기 싫어, 오빠! 가기 싫어!”

“…….”

“오빠……!”

리아의 처절한 애원에도 박건호는 지켜만 볼 뿐이었다.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무표정한 박건호의 얼굴에 마음이 아파졌다.

“팀장님.”

“저걸 보니까 오히려 꿈인 게 더 와닿네.”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쓰게 미소 지은 박건호가 여전히 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 장면을 꿈으로 수백 번은 봐서 이젠 아프지도 않아.”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구속구에 채워진 리아는 입을 포함한 양팔과 다리가 모두 묶였다. 그 상태로 뒤이어 도착한 군용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비현실적이고 끔찍한 광경이었다.

아마 이게 리아의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박건호가 기억하는 리아는 언제나 어린아이였으니까.

“위험한 꿈이었지만 덕분에 리아와 놀이공원에 와 볼 수 있었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 박건호는 동생을 태운 채로 떠나가는 군용차를 끝까지 응시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 장면을 꿈꿀 때마다 내 옆에 우리 한이결 능력자가 같이 있어 주겠군.”

군용차가 사라진 곳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차올랐다. 박건호는 그제야 편안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가자, 한이결.”

***

희미한 의식이 금방 선명해졌다. 굳게 감긴 눈을 조심스럽게 뜨자 옅은 갈색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왜 이렇게 늦어?”

나와 눈이 마주친 여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박건호의 꿈에 들어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한이결의 모습을 한 여우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미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30분?”

곧장 돌아온 대답에 조금 놀랐다.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놀았는데 현실 시간은 고작 30분밖에 안 지났다고?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다른 팀원들도 꿈에 갇혀 있는 상황이니 시간을 과하게 소비하지 않은 건 확실히 좋긴 한데.

“30분이면 별로 늦은 것도 아니잖아.”

“늦어! 10분이면 충분하잖아.”

“꿈속에서 일이 좀 있었어.”

몸을 일으키며 이마를 짚었다. 현실은 고작 30분이 지났지만, 꿈속에서는 온종일 놀이공원에 갇혀 있었다 보니 그 괴리감이 너무 커서 피곤했다.

설마 이 짓을 다른 팀원들 깨울 때마다 반복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다 깨우기 전에 내가 먼저 지쳐서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대답을 들은 여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궁시렁거렸다.

“안 봐도 뻔해. 어차피 꿈이니까 강제로 깨우면 될 텐데, 또 상대 처지 생각해 주느라고 이것저것 다 기다려 줬겠지.”

“…….”

“어떻게 그렇게 미련하고 멍청해? 겨우 꿈 하나 깨운다고 인간들 머리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그 정도로 허약하면 그냥 망가지게 둬! 대충 깨우라고! 밖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내 생각은 안 해? 내가 얼마나 걱정…….”

“알겠으니까 그만해.”

내버려 두니까 잔소리가 아주 끝이 없다. 차라리 여우 모습으로 피익거리면서 울 때가 훨씬 나았다.

한이결의 모습을 한 채로 징징거리는 여우를 뒤로하고 아직 바닥에 누워 있는 박건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와 같이 꿈에서 빠져나온 박건호는 내 손길에 곧이어 눈을 떴다.

“팀장님, 괜찮습니까?”

“으…….”

깨어난 박건호는 내가 했듯이 신음을 흘리며 머리부터 부여잡았다. 상체를 일으키는 박건호를 부축하며 혹시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상태부터 살폈다.

“제대로 돌아오신 거 맞습니까?”

“음, 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다른 건 괜찮아.”

다행히 개입 능력으로 꿈을 깨트린 부작용은 딱히 없는 모양이다.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안도의 숨을 조용히 내쉬는데, 고개를 든 박건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

“…….”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에 말문이 턱 막혔다. 박건호도 나와 같은지 평소와 달리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와 박건호 사이로 어마어마하게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뒤늦게 꿈속에서 박건호와 입을 맞췄던 일이 떠올라서 목덜미에 뜨끈한 열이 치솟았다.

뻘쭘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박건호를 부축하던 손을 느릿하게 뗐다. 뒤에서 우리를 구경하던 여우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서 어이없다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뭐야?”

“…….”

나도 몰라. 묻지 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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