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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78화 (378/394)

378화

“오빠, 저기 봐! 기린!”

“이야, 엄청 크다.”

여동생, 리아의 외침에 박건호가 맞장구를 쳐 줬다. 리아를 목말 태운 채로 동물을 구경하고 있는 박건호의 등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박건호에게 얘기만 들었던 여동생의 존재만으로도 부담인데, 박건호와 결혼한 상태인 점도 놀라웠다.

‘나랑 결, 하… 결혼… 하아…….’

하필 꿈을 꿔도 이런 꿈을 꾸냐고.

어릴 적 좋지 않은 일로 헤어진 여동생의 존재는 백번 이해해도 나랑 미국까지 가서 결혼했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이 꿈속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어떡하지…….’

리아와 함께 행복하게 웃고 있는 박건호에게 지금 여긴 꿈속이니까 어둡고 암울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도저히 알려 줄 수가 없었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즐겁게 웃고 있는 와중에 나 혼자만 심란했다. 꿈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된 두통에 다시 이마를 짚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박건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대로 계속 꿈속에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이 꿈은 어디까지나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들어 낸 인공적인 세계였다. 지금은 일견 멀쩡해 보일지라도, 언제 어느 때에 비정상적으로 변할지 모른다.

“다음에는 뭐 보고 싶어?”

“으음, 그럼 토끼.”

“토끼라. 토끼가 있으려나.”

“저, 팀장님.”

내가 고민을 하는 사이에 기린 구경을 끝낸 박건호와 리아는 또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왕 자리를 옮길 거면 좀 조용한 장소로 가고 싶은데. 여긴 사람이 너무 많고 정신없어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으니까.

내 부름에 리아를 아래로 내려 준 박건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지?

“왜 그러십니까?”

“아니, 흠…….”

입가를 매만지던 박건호가 장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부른 건 오랜만이라서. 감회가 새롭네.”

“예? 무슨… 팀장님, 이거요?”

“응. 연애하고 나서는 팀장님 소리를 안 했으니까.”

“…….”

상상도 못 한 대답이 훅 치고 들어왔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로 굳어 버린 날 두고 리아가 천진한 얼굴을 하고서 끼어들었다.

“그럼 연애하고 나서는 뭐라고 불렀는데?”

“자기야, 건호야, 이런 거?”

“헛소리하지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아무리 연애를 한다 해도 저런 호칭을 입에 올릴 리가 없었다. 정색하고 한마디 하자 역시나 박건호가 거짓말인 걸 순순히 인정했다.

“들켰네.”

들키긴 뭘 들켜. 진짜 기가 막혔다. 설마 결혼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박건호를 의심스럽게 노려보자 그가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서 덧붙여 설명했다.

“리아 앞이라 내 체면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운데, 그냥 평소처럼 불러도 돼.”

…평소가 뭔데. 그런 거 난 모른다고.

안타깝게도 연애한 다음에 호칭이 바뀐 건 사실인 모양이다. 그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내가 입을 다문 사이에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여기 작은 동물을 모아 둔 곳이 있네. 토끼도 있겠군. 여기 갈까?”

“토끼? 가자, 가자!”

박건호의 제안에 리아가 양팔을 번쩍 들며 신나게 외쳤다. 이번에도 대화에 실패한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

온종일 놀이공원 내부를 끌려다니며 리아와 함께 박건호가 사 준 밥을 먹고 솜사탕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정말 별걸 다 먹었다. 그래도 어린 리아 덕분에 놀이 기구는 별로 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현실에서도 놀이공원에 와 본 경험이 없는데 이걸 남의 꿈속에서 해 보네. 내 처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밤이 되자 놀이공원 곳곳에 환한 조명이 켜지며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퍼레이드에 시선을 뺏긴 리아를 위해 우리는 퍼레이드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와, 예쁘다.”

잔뜩 치장한 여자가 타고 있는 호박 마차가 리아 앞을 지나갔다.

아무래도 신데렐라 동화를 구현한 모양이다. 신데렐라 동화라면 그리 좋은 기억이 없는 나는 차마 즐겁게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실제도 아니고 만들어진 놀이공원에서 퍼레이드를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겨우 잊고 있었던 회의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현실에서 여우 혼자 우리 둘을 지켜 주고 있는 데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지 파악이 안 돼서 더욱 걱정스러웠다.

자꾸만 심장을 조이는 초조함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리자 따듯한 손길이 입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결아.”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에 어깨가 절로 흠칫 떨렸다. 고개를 들자 박건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검은 눈동자를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안… 좋다기보단, 음…….”

머쓱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려다가 어쩌면 이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앞에 서 있는 리아를 확인하자 아이는 퍼레이드에 집중하느라고 우리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드디어 찾아온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박건호가 어떤 반응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으니 꿈에 대한 설명부터 해 봐야겠다.

“저, 팀장님.”

어쩌면 박건호에게 상처를 안겨 줄지 모르는 말을 하기 위해 긴장한 상태로 시선을 올린 그때였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아 왔다.

“……!”

상체를 내 쪽으로 숙인 박건호의 체온이 훅 다가왔다. 내게 입을 맞춰 온 상대가 박건호라는 사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굳게 다물린 내 입술을 박건호가 마치 열어 달라는 듯이 살짝 힘줘서 깨물어 왔다. 옅게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자 등줄기로 소름이 끼쳤다.

“자, 잠깐만요…!”

황급히 박건호를 밀어 내며 혹시라도 리아가 알아채기라도 할까 봐 소리 낮춰 말했다.

“이건, 조금…….”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귓가와 목덜미에 열기가 올라왔다.

박건호는 자신을 밀어 낸 내 행동이 불만스러운 듯 눈썹 한쪽을 치켜세웠다. 퍼레이드 불빛이 비쳐 얼굴의 반절 정도가 밝게 보였던 터라 그의 표정 변화가 선명했다.

“이건 조금?”

“그… 이러면 안 됩니다.”

“왜?”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어투로 나온 질문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와 달리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박건호의 얼굴이 낯설어서 무심코 뒷걸음질을 쳤다.

“후회하실 거예요, 팀장님.”

“내가? 후회를?”

그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현실로 돌아가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저는 팀장님과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현실이라.”

“네. 팀장님, 잘 들으세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지금 여기는…….”

하지만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박건호가 픽 실소를 흘렸다. 가벼운 미소를 지은 그가 내가 해야 할 말을 가로챘다.

“여기는 꿈속이라고?”

예상과는 다른 박건호의 반응에 다행스러운 마음이 아닌 불안감만 커졌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요란하게 이어지는 퍼레이드 행렬과 그걸 보고 즐거워하는 수많은 사람, 우리 앞에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리아는 여전히 똑같았지만 아까처럼 평화로운 느낌을 주진 않았다.

모든 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와중에 박건호만이 내게 다정하게 웃어 줬다.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부터 안 건 아니고. 한이결, 너와 눈이 마주친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됐지. 아마 네가 능력을 써서 그런 것 같군.”

심지어 내가 개입 능력을 사용한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오싹한 감각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조용히 심호흡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왜 팀장님 꿈속에 들어왔는지도 아시겠네요.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글쎄. 굳이 그래야 하나.”

“무슨 뜻입니까?”

“꿈을 깰 필요가 있을까? 여긴 지금 이대로도 완벽하잖아.”

“팀장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 질 나쁜 농담이라고 여기고 싶었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질 않았다. 차갑게 굳은 나를 향해 박건호가 손짓했다.

“겁먹지 말고 이리 가까이 와, 이결아.”

“아뇨, 뭔가 잘못됐습니다. 지금 팀장님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박건호가 보이는 기이한 태도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나도 처음 꿈에 빠졌을 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평화롭다며 만족했으니까.

박건호도 지금 그때의 나와 비슷한 상태인 거다. 이대로 그가 꿈에 먹히도록 내버려 뒀다가는 여기서 벗어나는 게 더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나가야 합니다. 이러는 동안 현실에서는……!”

“현실 생각은 그만해.”

끝까지 다가가지 않는 내게 박건호가 먼저 거리를 좁혀 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선 그가 팔을 강하게 잡아 왔다.

“주변을 둘러봐. 여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도 없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어.”

“…….”

“너랑 내가 연애했던 시간과 미국에서 올린 결혼식이 모두 선명하게 기억나. 그런데도 여기가 단순히 꿈속이라고 치부할 수 있나? 그게 다 그저 꿈일 뿐이라고?”

내게 바싹 다가서서 말하는 박건호의 검은 눈동자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는 애원에 가까운 질문들이 내 가슴을 아프게 찔러 왔다. 내게 사랑을 바라는 박건호의 모습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네.”

꿈이 만들어 낸 추억이라 해도 그걸 모두 기억하는 박건호에게는 단순한 가짜가 아니었다.

“그저 꿈입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걸 알면서도 끝내 그의 편을 들어 줄 수 없었다.

“팀장님이 연애하고 결혼했다는 상대는 제가 아닙니다.”

“…….”

“그러니까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이 꿈이 자꾸만 팀장님을… 윽!”

붙잡힌 팔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자 차가운 눈을 하고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박건호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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