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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377화 (377/394)
  • 377화

    95. 꿈속에서 마주한 세계

    ‘여우… 맞나?’

    여우가 저런 싸가지 없는 대답을 한다고? 게다가 저 태도는 뭐야. 너무 버릇없잖아. 겨우 이성을 챙기고 다시 물었다.

    “정말… 여우라고?”

    “어.”

    이번에도 성의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갑자기… 왜 변한 거야? 여우 모습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설마 이런 상황에서 여우가 사람으로 변할 줄이야.

    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여우의 형제를 보고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예전에 엘로힘에게 여우가 저 모습을 좋아해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 못했다.

    내 질문을 들은 여우가 입술을 삐죽였다. 눈가를 잔뜩 찌푸린 그는 불만을 가득 담아 말했다.

    “나도 변하기 싫었어. 근데 네가 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듣냐…….”

    “몰라, 짜증 나!”

    버럭 소리를 지른 여우가 내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나 진짜 변하기 싫었거든? 그런 내가 이만큼이나 도와주는 거잖아. 그러니까 빨리 갔다 와.”

    “어, 뭐?”

    “빨리 갔다 오라고! 이 인간 꿈속으로! 그동안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지켜 주겠다는 부분에서 여우가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자신감 가득한 몸짓에 식은땀이 절로 났다.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내 계획을 이해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지켜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신기했다. 쉽사리 믿기 어려워서 재차 확인했다.

    “네가 우리 둘을 지켜 줄 수 있다고?”

    “응. 그러니까 빨리 시작해.”

    “어떻게 지켜 주려고? 너 싸울 줄 모르잖아.”

    당연한 부분을 짚었을 뿐인데 여우가 뺨을 살짝 붉히며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다.

    “싸울 줄 알아! 그, 그리고 싸우는 게 아니라 난 너네보다 기운을 잘 느끼니까…….”

    “아, 누가 오면 알려 준다는 뜻이야?”

    “그래. 그리고 두 명 정도는 내가 들고 날 수 있어.”

    결국 싸우진 못하고 대신 우리를 들쳐 업고 도망치겠다는 건가 보다. 여우보다 몸이 커져서 가능해 보이긴 하는데. 이걸 정말 믿고 맡겨도 되나?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것도 애매하고.’

    어쩔 수 없지. 일단 여우에게 맡기고 최대한 빨리 박건호를 깨우는 수밖에 없다.

    “그럼 해결하고 올 테니까, 혹시 낯선 기운이 느껴지면 싸우지 말고 나랑 박건호 팀장님 데리고 자리부터 이동해. 그다음에 나 깨우고. 알겠지?”

    “일일이 알려 줄 필요 없어.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래…….”

    걱정스러운 마음에 신신당부하자 까칠한 반응이 돌아왔다.

    진짜 적응 안 되네. 그동안 여우 모습으로 뱉은 울음소리의 뜻이 다 이런 식이었던 건가?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도 들었다.

    아무튼 박건호부터 구하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박건호 쪽으로 몸을 굽히며 권세현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르게 권세현으로 변한 나는 곧장 개입 능력을 사용했다.

    “으…….”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이 강제로 박건호의 꿈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힘이 빠져 휘청이는 내 몸을 여우가 안아 줬다.

    ***

    희미했던 감각이 점차 선명해지며 주변에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피부에 닿아 오는 기온은 따듯하고 평온했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울려 퍼졌다.

    “다음에는 동물원도 가 보자. 동물 구경하고 싶어.”

    “동물원? 좋지.”

    밝고 어린 여자 목소리와 함께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건호의 목소리였다.

    타인의 꿈에 개입 능력을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다행히 별다른 문제 없이 성공한 것 같았다. 조금 안도하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보인 것은 얼음이 잔뜩 들어간 바닐라 라테가 담긴 유리잔이었다. 잔 표면에 맺혀 있는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 아래로는 새하얗고 깨끗한 내 손이 보였다. 꿈속에서 나는 권세현이 아니라 한이결이 되어 있었다.

    “이결 오빠.”

    상황을 미처 다 파악하기도 전에 나를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환한 햇살 아래로 내 앞에 앉아 있는 낯선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주홍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과 콧등에 주근깨가 있는 여자아이는 밝고 장난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아이는 과일 주스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든 채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도 좋아요? 동물원?”

    “어, 음, 예?”

    내게 자연스럽게 질문하는 아이의 모습에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에 앉아 있는 박건호를 발견했다. 턱을 괸 채로 나와 여자아이를 지켜보던 박건호가 내 시선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지?’

    아무리 봐도 내가 꿨던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질적인 평화로운 분위기와 처음 보는 사람까지 있어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도 여자아이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응시하는 커다란 두 눈동자에 기대감이 한가득 들어 있는 것을 느끼고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말해야 할지 존댓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자 여자아이의 표정이 단번에 환해졌다.

    “이결 오빠도 좋대! 동물원으로 가자!”

    “잠깐, 이거 다 마시고. 가는 길에 간식도 새로 사 줄 테니까 구경하면서 먹어.”

    “으응.”

    신나서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것만 같던 여자아이를 막은 건 박건호였다. 박건호가 잔을 손끝으로 툭 두드리며 하는 말에 여자아이가 남은 주스를 열심히 마셨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놀이공원 내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 행복하게 웃으며 놀이공원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꿈이 나올 줄이야…….’

    당연히 고통받는 꿈보다야 이게 훨씬 낫지만 좀 놀랍기는 했다.

    여자아이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박건호를 훔쳐보며 앞에 놓인 바닐라 라테를 들이켰다.

    이 꿈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꿈에 들어오는 건 겨우 성공했지만 꿈을 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꿈속인 걸 설명해 줘야 하나?’

    설명해 준 다음에는? 막무가내로 깨어나라고 해 봤자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나조차도 엘로힘이 도와줘서 겨우 깨어났는데. 완전 산 넘어 산이었다.

    두통이 밀려와 이마를 짚는 사이에 주스를 다 마셨는지 박건호와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기회를 잡아야 하니까 둘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동물원은 좀 멀리 있네. 중앙을 가로질러서 외부로 아예 나가야겠군.”

    “많이 멀어?”

    “구경하는 셈 치고 좀 걷지, 뭐. 가는 길에 정원도 있으니까 거기도 들러 보자.”

    지도를 보며 여자아이와 얘기를 나누는 박건호의 목소리는 여태껏 들었던 목소리 중에 가장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평소와 달리 장난기도 없는 박건호의 모습은 굉장히 어색했다.

    한걸음 뒤에서 박건호와 여자아이를 구경하는데,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이결아.”

    …나? 나 부른 거야?

    “예? 네?”

    여자아이에게 썼던 다정한 목소리 그대로 내 이름을 부르는 박건호의 행동에 몸이 움찔 떨렸다. 정신을 잡지 못하고 멍청하게 대꾸하자 박건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넋을 놨어? 동물원까지 30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괜찮나?”

    “아, 네. 저야 당연히 괜찮죠.”

    이런. 꼼짝없이 동물원까지 가야 할 판이었다. 신이 난 발걸음으로 앞장서서 뛰어가는 여자아이를 보며 박건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자아이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이 타이밍에 시도라도 해 보자는 생각으로 막 입을 연 그때였다.

    “오늘 같이 와 줘서 고맙군.”

    “예?”

    “동생이 오래전부터 놀이공원에 와 보고 싶어 해서.”

    박건호에게 선수를 뺏긴 나는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동생…….

    ‘설마…….’

    천사연의 집에서 파티했을 때, 박건호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분명… 여동생과 엮인 좋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했었지.

    그럼 저 금발 머리 여자아이의 정체가 바로 그 동생이었던 건가. 박건호와 조금도 닮지 않아서 알아채지 못했다.

    여자아이가 동생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가슴 속이 무거워졌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해서 꿈을 꾸고 있던 거구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설득하려고 했는데 자신이 없어졌다. 밝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와 그런 아이를 보며 마주 웃는 박건호의 모습에 한숨을 힘겹게 삼켰다.

    “…저야말로 초대해 줘서 고맙죠. 덕분에 놀이공원도 다 와 보네요.”

    꿈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뤄 두고 가장 무난한 답변을 했다. 그럴 때가 아닌 걸 아는데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좋지. 그리고 리아가 널 소개해 달라고 계속 졸랐거든.”

    동생 이름이 리아인가 보네. 아니, 그보다…….

    “저를 왜 소개해 달라고 한 겁니까?”

    박건호랑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천사연이나 우서혁이 아니라 나를 소개해 달라고 한 건 좀 의외였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자 박건호가 묘한 기색을 보였다.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잠시간 나를 쳐다보던 박건호가 이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뭐, 그야… 당연하지 않나?”

    “예?”

    “너랑 내가 결혼했으니까 리아 입장에서는 만나 보고 싶었겠지.”

    “……예?”

    지금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내 귀가 이상해진 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방금… 뭐라고…….”

    “음? 리아 입장에서는 만나 보고 싶었을 거라고.”

    “아니, 그 앞에…….”

    “너랑 내가 결혼했다고.”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저 미친 단어를 두 번이나 듣게 되다니. 너무 경악스러운 나머지 입이 절로 벌어졌다.

    “우리가… 결…혼…을 했다고요? 아니, 잠깐만, 근데 저…는 남자인데요?”

    “그래서 미국에서 했잖아.”

    “…….”

    막힘없이 나온 대답에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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