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질문을 들은 엘로힘이 잠시간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잘못… 짚은 건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엘로힘의 반응에 조마조마했다. 경직된 공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자 한참 만에 엘로힘이 말문을 열었다.
“아니, 네 잘못은 아니란다. 이번 질문도 제법 괜찮았단다. 나는 그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서 입가를 매만지던 엘로힘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너와 대가를 조율할 때마다 드는 감정이지만… 도통 익숙해지지를 않구나.”
“예?”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자꾸만 선을 넘고 싶어져서.”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닌지, 멋쩍은 미소를 지은 엘로힘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 질문의 답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쉽다. 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갈 때,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뒤만 보지 않으면 되는 겁니까?”
“그래. 무슨 소리가 들려오거나 어떤 문제가 생긴다 해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거라.”
설마 이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계단’이라는 조건이 정해져 있는 거면 계단이 아니면 뒤를 돌아봐도 된다는 뜻이었다. 질문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었으니… 계단이 가장 위험할 테니까 그때만 조심하면 된다는 건가? 그런 거라면 나름 할 만한데.
“생각만큼 만만하지는 않을 거다.”
내 머릿속을 읽어 낸 엘로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어떤 방식으로 지하 내부를 만들었는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단다. 네가 앞으로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될지도.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엘로힘이 해 준 조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마음을 조금 놓고 말았다. 그의 말처럼 계단이 특히 신경 써야 하는 구간일 뿐, 프라우스 신도단이 만든 공간에 들어가 있으니 매 순간 조심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엘로힘의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는 커피 잔으로 향했다. 그러자 잔이 조금씩 떨렸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하나 더 있다.”
달각, 달각.
커피 잔은 이제 눈에 띄게 흔들렸다. 담겨 있는 커피가 금방이라도 흐를 기세로 넘실거렸다.
계속 들어도 되는 건가? 저러다가 커피가 넘치거나 잔이 깨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대가의 균형이 깨지면 그 타격은 엘로힘이 받게 될 게 뻔했다.
“엘.”
“괜찮단다.”
불안해하는 내게 부드럽게 웃어 준 엘로힘이 설명을 덧붙였다.
“지하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끼긱, 긱. 그극.
커피 잔 표면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금이 갔다.
“현실에서 그 어떤 음식도 먹으면 안 된다.”
덜걱, 덜걱.
흔들리는 커피 잔 안에서 커피가 파도치는 것처럼 요동쳤다. 나와 마찬가지로 엘로힘도 커피 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당장이라도 잔이 깨지고 커피가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떨리던 커피 잔의 움직임은 금방 잦아들었다. 다시금 잠잠해진 커피 잔이 엘로힘의 손짓에 따라 느릿하게 테이블 위로 내려왔다.
대가의 균형을 알려 주던 커피 잔이 무사히 역할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걸 깨닫자 절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괜찮을 거라고 하지 않았니.”
“…….”
그런 것치고 엘로힘도 커피 잔이 흔들릴 때 좀 긴장했던 것 같은데.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엘로힘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머릿속을 읽었을 텐데도 아무 반박을 하지 않는 거로 보아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다.
“혹시 문제가 있는데도 속이는 거라면…….”
“그럴 리가. 커피 잔이 이렇게 멀쩡한데.”
“걱정돼서 그럽니다.”
미술관 사건 때 우리를 위해서 거리낌 없이 희생하던 엘로힘과 엘라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저도… 엘과 엘라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엘로힘이 힌트를 하나 더 준 이유를 안다. 이제부터 혼자서 사라진 팀원들을 찾아야 하는 내 처지가 안쓰럽겠지. 적이 만들어 낸 함정에 제대로 휘말린 상태이니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염려스러울 거고.
하지만 그 둘이 나를 챙겨 주는 만큼 나도 가능하다면 그들을 위해 주고 싶었다. 물론… 난 그럴 힘도 능력도 없지만.
“진심이구나.”
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엘로힘이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어이없으시죠.”
“어이없기는. 오히려 기쁘지.”
엘로힘의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사락, 흩날리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닿아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존재는 서로밖에 없었으니까.”
“…….”
“아주 잠깐은 그런 존재가 한 명 더 생겼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지. 결과는 우리의 착각이었지만…….”
엘로힘의 미소에는 씁쓸함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엘로힘과 엘라하가 믿었던 칼리는 그들을 배신하고 떠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악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엘라하도 분명 기뻐할 거란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세 가지 질문이 끝났으니 꿈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마.”
복잡한 기색을 빠르게 없앤 엘로힘이 평소와 같은 얼굴로 꿈의 끝을 고했다.
“내게서 얻어 낸 질문의 답을 잊지 말거라.”
“예.”
“엘라하와 함께 계속 지켜보마.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엘로힘의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가 엄청나게 강해졌다. 팔로 바람을 막으며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칙칙한 회색빛 벽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보였던 새하얀 공간과 엘로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꿈이 끝난 것을 깨닫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미로 내부인 건지, 기절하기 전에 봤던 일자로 이어진 좁은 길이 보였다.
“윽…….”
벽을 짚고 일어서자 몸 여기저기에 뻐근한 통증이 퍼졌다. 아무래도 기절하면서 몸이 바닥에 부딪힌 것 같다.
어두컴컴한 미로 속에 혼자 눈을 뜬 나는 꿈에서 엘로힘에게 얻어 낸 답을 하나씩 떠올렸다.
‘흩어진 팀원들을 찾을 적절한 방법이 내게 찾아온다고 했고, 잠든 팀원들을 깨우려면 개입 능력을 써야 하며, 가장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면 계단과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엘로힘이 해 준 말대로라면 적절한 방법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자리를 이동해도 되는 건지, 이 자리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아.”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는 일단 기다려 보는 게 낫겠지. 무릎을 굽히고 앉자 지친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직 팀원들을 찾지도 못했는데 벌써 피로감이 어마어마했다.
환경이 주는 압박감이 제법 컸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미로를 몇 시간이고 걸었는데, 기절하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미로 속이라니… 정말 끔찍하다.
‘혼자 있으니까 더…….’
팀원들이랑 다 같이 있을 때는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이 들진 않았는데. 아무리 힘들고 지친다 해도 팀원들을 반드시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슬슬 초조함이 밀려와 자리를 이동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피이익, 피익!
“……!”
어둠 속에서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가 절로 번쩍 들렸다.
“여우?”
피익! 픽!
혹시나 해서 이름을 부르자 여우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한층 더 크게 들려왔다. 나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급히 일어서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여우!”
피익!
어둠만이 가득한 저편에서 새하얀 빛이 쏜살같이 내게로 날아왔다. 서럽게 울며 품에 달려드는 여우를 반갑게 마주 안자 따듯한 체온이 퍼져 나갔다.
피익, 피익! 피이익!
안긴 여우가 온 힘을 다해 뭐라고 떠들어 댔다. 무슨 얘기인지는 몰라도 내가 사라진 게 굉장히 불만이라는 건 확실하게 전해졌다.
“알았어, 미안.”
피이, 픽!
“응, 그래. 그… 윽!”
열심히 잔소리하는 여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무성의하게 대꾸하자 여우가 짜증 났는지 솜방망이로 내 뺨을 후려갈겼다.
“여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기운을 감지한 거야?”
픽.
내 질문에 여우가 자그마한 얼굴을 끄덕이며 그렇다는 뜻을 담아 짧게 울었다.
‘여우가 팀원들을 찾을 방법이구나.’
생각해 보면 여우는 기운에도 예민하고 물체 통과도 가능하니 미로에서 사람을 찾기에 아주 제격이었다.
물론 권세현으로 변해서 개입 능력을 써도 팀원들의 기운을 볼 수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잡한 미로를 뚫고 찾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능력을 쓰는 동안은 시야가 달라지고 움직일 수 없어지니까.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팀원들의 정확한 위치와 길을 알고 있는 여우의 도움이 필요했다.
“여우, 다른 사람들의 기운도 느껴져?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 줄 수 있어?”
내 품에서 벗어나 공중을 날아오른 여우가 새까만 눈을 빛내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양양하게 위로 솟구친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렸다.
“부탁해. 팀원들을 구하러 가자.”
나만 믿으라는 것처럼 자신감 가득한 여우 덕분에 저절로 옅은 웃음이 나왔다. 여우에게 농담 같은 진담을 건네자 나를 따라 키득키득 웃은 여우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유일하게 빛나는 여우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내 짐작대로 팀원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여우는 갈림길이 나와도 망설임 없이 방향을 정했다.
체감상 10분 정도가 지난 듯했다. 세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자 드디어 복도가 끝나고 작은 방 하나가 나타났다.
방 내부는 복도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는 데다 벽이 모두 돌로 되어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샅샅이 살핀 후에야 어둠 속에 가려졌던 검은 인영을 겨우 발견했다.
“박건호 팀장님!”
쓰러져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박건호였다. 급히 달려가 상태를 살피자 그는 다행히도 눈을 감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꿈속에 갇혀 있는 건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다.
구하려면 엘로힘의 조언대로 권세현으로 변해서 개입 능력을 써야 한다. 아마 엘로힘이 날 구해 줬듯이 박건호의 꿈속으로 들어가서 꿈에서 깰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지.
‘하지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박건호와 나, 여우 외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박건호의 꿈속으로 개입하려면 나도 잠이 들어야 할 텐데… 너무 위험했다. 이 작은 여우에게 모든 걸 맡기는 건 무리였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입술을 깨물며 적당한 방법을 고민하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던 여우가 갑자기 근처를 빙빙 돌며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피익! 픽, 피익, 픽!
“…뭐라고?”
피이익! 피이익!
여우가 이젠 양 앞발까지 휘적휘적 휘두르며 열성적으로 울어 댔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게 분명한 행동에 진지하게 여우의 울음소리와 몸짓에 집중했다.
피익! 픽, 픽.
“…….”
피익!
“…미안, 모르겠어.”
하지만 언어가 다른 생명체가 하는 말을 집중 좀 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과와 함께 포기하자 여우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제대로 들어 줄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피익…….
여우가 상심한 기색으로 천천히 하강했다. 잔뜩 시무룩해진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박건호는 꿈속에 갇혀서 고통받고 있을 테니까.
‘아예 박건호를 데리고 장소를 이동하는 건 어떨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을 찾아간 다음에 개입 능력을 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지금 이 자리에서 능력을 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여우에게 갈 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여우?”
옆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던 여우의 몸이 점차 하얗게 빛났다. 어두웠던 방 안이 환해질 정도로 강한 빛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여우… 으윽!”
여우를 감싸고 있던 하얀 빛이 빠르게 크기를 키워 나갔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혹시 여우의 몸에도 무언가 이상이 생긴 건가 싶어서 덜컥 겁이 들었다.
“잠깐… 무슨…….”
이제는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빛이 지나치게 강해졌다. 두 눈을 꾹 감은 채로 잠시 기다리자 다행히 방 안은 다시 어두워졌다.
강한 빛에 흐려졌던 시야도 점차 돌아왔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후에야 앞을 제대로 보게 된 나는 방금까지 여우가 있던 자리에 나타난 사람을 발견하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있는 상대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한이결과 똑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다만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동그란 눈동자는 칠흑처럼 새까맸고, 피부와 머리카락 또한 한이결보다 창백하고 색이 옅었다. 옅고 흐릿한 분위기는 이전에도 본 적 있었다.
저번에 미술관 사건에서 엘로힘이 우리 대신 대가를 치르고 쓰러졌을 때, 엘라하가 사람으로 변한 고양이를 데리고 찾아온 적 있었다.
엘라하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던 고양이가 풍겼던 분위기와 지금 눈앞에 있는 한이결이 아주 흡사했다. 여우는 고양이와 형제이니 여우도 사람으로 변한다면 비슷하겠지.
“설마… 여우?”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가 잠깐의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당연한 질문을 왜 해?”
“…….”
오만한 목소리로 대답한 남자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예상을 초월하는 답변을 듣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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